아프간 철군은 미국 패권 쇠퇴의 징후가 아니다

[시민정치시평] 미국 국내 정치가 더 위험하다

8월 18일자 USA TODAY의 일면은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어느 건물 옥상에서 날아오르는 헬리콥터의 사진을 담고 있다. 미국 대사관 인원을 서둘러 대피시키는 이 장면은 1975년 베트남전의 마지막 모습과 닮았다. 제목도 '아프가니스탄 함락(Afghanistan Falls)'으로, 미국인들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사이공 함락(The Fall of Saigon)'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USA TODAY 뿐만 아니라 다수의 매체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 철군을 '붕괴(collapse)'나 '혼란(chaos)'의 과정으로 정의했다. 이미 서구 사회의 판데믹 대응에 실망해 있던 일부 국제여론은 이제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의 종말을 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아프간 철군을 기점으로 국제관계의 밑그림 자체가 새로 그려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패권적 영향력이 베트남전 후에 갑작스레 쇠퇴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프가니스탄 철군도 새로운 국제질서 도래의 전조라 보기 힘들다. 진정한 위협은 사실 중동이나 중국보다는 미국 국내정치에 있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나 중국의 세력 확장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는 기존 질서의 근간인 강력한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여전하다는 데에 있다. 2020년을 기준으로 미국은 전 세계 국방예산의 37%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1990년대 초반의 40%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핵을 포함한 전략무기의 경우 다른 나라들과의 격차는 더 커진다. 베트남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압도적인 군사력이 때로 가장 효과적인 정책 수단이 아닐 수도 있으나, 전후 국제질서가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이라는 대전제 위에 유지-형성된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중국을 포함한 세계경제의 생산력 증가를 담보하는 거대한 소비시장으로서의 미국의 역할도 갑작스레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기축통화 및 안전 자산으로서의 달러의 중요성, 그리고 그에 근거한 미국 금융의 힘은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미국 경제에 악재가 발생할 때마다 금융시장의 불안감이 커져서 오히려 달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기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기실 아프가니스탄 철군의 국제정치적 의미는 미국의 쇠퇴라기보다는 전통적 미국외교정책 노선의 부분적 회복에 가깝다. 전후 미국주도 국제질서의 특징은 다자주의와 제도주의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그리고 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세계무역기구로 대표되는 브레튼우즈(Bretton Woods) 체제를 통해 군사-경제적 국제질서를 유지해왔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다수의 국가들이 미국을 중심으로 조약과 국제기구라는 제도적인 틀 안에서 공통의 문제를 해결해 온 것이다. 동맹국과 당사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의 미국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수행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이와 같은 다자-제도주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었다. 미군 철수는 이와 같은 부분적 일탈의 중단이다. 오커스(AUKUS)나 쿼드로 통칭되는 4개국 안보회담, 그리고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와 같은 최근 바이든 행정부가 내놓고 있는 일련의 제안들과 연결해보면, 아프간 철군은 오바마 행정부 때부터 시작된 미국적 질서 회복과정의 한 단계로 볼 수 있다. 미국외교정책에서 중동에 편향된 일방주의를 털어내는 한편 전통적 다자주의는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미국의 패권적 영향력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오히려 미국 국내 정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정치의 심각한 양극화는 트럼프와 같은 극단적 파퓰리스트들의 집권이 가능한 상황을 만들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를 비롯한 다수의 전문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이들 파퓰리스트들은 다자-제도주의적 외교정책을 '세계주의자(globalist)'의 반애국적 책동으로 규정하고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전통적인 역할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트럼프 재임 시기에 미국정부가 북대서양조약기구 관련 예산 삭감을 검토하고 파리 기후협약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탈퇴했다는 사실은 이런 태도가 단순한 구호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준다. 아프간 철군이 미국주도 구질서의 부분적인 회복이었다면, 미국 내 파퓰리스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이런 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들 수 있는 위협이라 할 수 있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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