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후진국' 한국에서 ILO 사무총장에 도전한 강경화 전 장관에게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한국은 주68시간이 합법이며 외국인 노동자가 얼어 죽는 나라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국제연합 산하 노사정 3자 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의 차기 사무총장직에 입후보하였다. 현 ILO 사무총장 가이 라이더(Guy Ryder)의 임기는 내년 9월 완료된다.

ILO 사무총장은 187개 회원국의 노사정 대표가 참가하는 연례총회인 국제노동회의(International Labour Conference)가 아니라 이사회(Governing Body)에서 선출된다. ILO 이사회는 총 56명으로 구성된다. 정부대표가 과반인 28석을 차지하고, 나머지 28석을 노사 대표가 각각 14석씩 차지하고 있다. 정부 대표가 사실상 이사회의 결정을 좌우하는 구조인 셈이다.

한국이 '노동선진국'?

정부는 "강 후보자의 ILO 사무총장 진출 시 '노동선진국'으로서 우리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면서 외교부, 고용노동부 등이 참여하는 범부처 TF를 구성하여 입후보 활동을 적극 지원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재미난 점은 정부가 한국을 이미 '노동선진국'이라 보고 있으며, 강 후보자가 당선되면 '노동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대목이다. 주관적 관념론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정부는 '노동선진국'의 징표로 우리나라가 지난 4월 ILO 협약 29호(강제노동, 1930년 채택), 87호(결사의 자유와 조직할 권리의 보호, 1948년 채택), 98호(조직할 권리와 단체교섭 협약, 1949년 채택)를 비준한 것을 내세운다. 하지만, 이들 협약에 대한 한국의 비준은 '노동선진국'이 아니라 '노동후진국'의 징표임을 기억해야 한다.

ILO의 187개 회원국 중 대한민국 정부가 지난 4월 비준하기 전에 이미 29호를 비준한 나라는 178개, 87호를 비준한 나라는 156개, 98호를 비준한 나라는 167개에 달했다. ILO가 기본협약(Fundamental Conventions)으로 분류하는 이들 협약의 비준 시점이 한국은 늦어도 너무 늦었다. 선진국(先進國)은 앞서가는 나라지, 뒤처진 나라가 아니다.

한국, '강제노동 철폐' 협약도 비준 못 해

더 큰 문제는 ILO 기본협약 중 하나인 105호 '강제노동 철폐' 협약(1959년 채택)을 한국은 아직도 비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187개 회원국 중 176개국이 비준한 105호는 국제노동기준의 인정에서 한국보다 소극적인 미국까지 비준한 협약이다.

ILO의 8개 기본협약 가운데 하나인 '강제노동의 철폐' 105호는 "(a)기성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체제에 반대하는 정치적 관점 혹은 사상적 견해를 가진 것을 처벌하기 위한 정치적 강압이나 교육 혹은 처벌의 수단으로, (b)경제발전의 목적을 위해 노동을 동원하고 사용하는 방법으로, (c)노동규율을 위한 수단으로, (d) 파업 참가자에 대한 처벌의 수단으로, (d)인종적·사회적·국적 혹은 종교적 차별의 수단"으로 강제노동을 이용하지 말 것과 이러한 형태의 강제노동을 즉시 철폐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너무나 뒤처진 ILO협약 비준

또한 ILO가 정부의 노동행정과 노동정책의 토대 마련을 위해 '우선협약(Priority Conventions)'으로 분류해 놓은 협약들도 한국은 완전히 비준하지 못하고 있다. 129호 '농업 근로감독' 협약이 대표적이다.

독자 여러분은 지난 겨울 포천의 농막에서 간경화로 얼어 죽은 캄보디아 여성노동자를 기억할 것이다. 적은 월급에서 매달 국민건강보험료를 납부했지만, 장시간 근무와 열악한 처우로 병원 한번 가지 못하고 미처 피지 못한 아쉬운 생을 이국땅에서 마무리했다. 농업에 대한 정부의 근로감독(labour inspection)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예방할 수도 있었던 비극이었다.

일하는 시간(working time)에 대한 규제와 관련하여 ILO가 회원국의 비준을 강조하는 협약 8개 중 한국이 비준한 건 고작 1개다. 근무시간 협약들 중 한국이 비준한 유일한 협약은 47호 '주 40시간'(1935년 채택)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오늘도 주 68시간이 합법이다.

사회보장 및 사회정책과 관련하여 ILO가 회원국의 비준을 강조하는 협약 10개 중 한국이 비준한 협약은 단 하나도 없다. 우리나라는 183호 '모성보호' 협약도 비준하지 않았으며, 이주노동자 관련 협약도 비준하지 않았다.

190개 협약 중 고작 32개 비준

1919년 출범 이래 ILO는 모두 190개 협약을 노사정 3자 합의로 채택했다. 190개 협약은 기본협약 8개, 정부노동행정(우선)협약 4개, 기술협약(Technical Conventions) 178개로 이뤄진다. 한국은 기본협약 7개, 우선협약 3개, 기술협약 22개 등 모두 32개를 비준했다.

이른바 '노동선진국'인 스웨덴은 190개 협약 중 94개(기본 8개, 우선 4개, 기술 82개)를 비준했다. 덴마크는 73개(기본 8개, 우선 4개, 기술 61개), 독일은 85개(기본 8개, 우선 4개, 기술 73개), 네덜란드는 110개(기본 8개, 우선 4개, 기술 98개)를 비준했다.

'노동중진국'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은 49개(기본 6개, 우선 3개, 기술 40개), 인도는 47개(기본 6개, 우선3개, 기술 38개)를 비준했다. 한국인들이 일당독재의 '정치후진국'이라 업신여기는 중국은 26개(기본 4개, 우선 2개, 기술 20개), 베트남은 25개(기본 7개, 우선 3개, 기술 15개)를 비준했다. ILO 협약 비준에서 한국은 중국과 베트남과 비슷한 수준이다.

한국은 '노동후진국'

한국인이 국제연합 산하 국제기구의 수장이 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한국은 국민이 낸 세금으로 매년 90억 원 가까운 회비를 ILO에 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 강경화 씨의 ILO 사무총장 입후보는 나무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강경화 씨가 한국이 '노동후진국'이라는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의 총장 입후보는 국제연합 산하 노동 전문 국제기구인 ILO의 임무 수행은 물론이거니와 국제사회의 한국에 대한 평가에도 그리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19년 10월 창립된 ILO는 "사회정의 없이 항구적 평화 없다"는 신념을 자신의 헌장에 새겨 넣었다. 2차 대전이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의 승리로 귀결되던 1944년 5월 ILO는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는 신념을 자신의 헌장에 새겨 넣었다.

강경화 씨가 제대로 된 ILO 총장이 되려 한다면, 이 두 신념의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그를 총장으로 밀려 하는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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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원

택시노련 기획교선 간사,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사무국장, 민주노동당 국제담당, 천영세 의원 보좌관으로 일했다. 근로기준법을 일터에 실현하고 노동자가 기업 경영과 정치에 공평하게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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