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재연. 들어본 사람이 별로 없을, 그리 유명하지 않은 역사적 인물이다. 그를 만나려면 강화대교와 강화초지대교 중간의 바닷가에 있는 해안동로 삼거리 광장으로 가야한다. 그곳에는 키가 작은 동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어재연 장군의 동상이다. 150년 전인 1871년 신미양요 당시, 그는 이 삼거리에서 가까운 광성보에서 개항을 요구하며 쳐들어온 미군들과 싸우다가 동생 어재순과 함께 미 해병의 총검에 찔려 전사했다.
수도 한양에 가까운 바다가 섬이라는 이유로 몽고의 침입에서부터 저항과 수난의 장소가 돼야 했던 강화도는 개화기에도 비극적인 저항과 수난의 중요한 장소였다. 어재연 동상에서 20분을 달려 강화읍으로 들어가면 '한국고속철의 출발점'이 나온다. '이곳에 무슨 고속철?'하고 의아해하겠지만 다 사연이 있다.
강화읍에는 고려시대 몽고군을 피해 왔던 왕실이 거주했던 고려 궁지가 있는데,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외규장각이 그곳에 있다. 외규장각은 1866년 프랑스 신부 살해를 이유로 침략한 프랑스 해군이 5000여 권의 책들과 함께 불태운 것(병인양요)을 2000년대 들어 복원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군은 340권의 책 등을 약탈해갔다. 1992년 우리가 고속철사업을 시작하면서 프랑스의 TGV를 수입하게 되는데, 이와 관련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약속했고 2011년 5년마다 갱신 대여하는 형식으로 반환됐다. 그러니 '고속철의 출발점'인 셈이다.
프랑스군에 의해 외규장각이 잿더미가 된 지 5년 뒤인 1871년, 이번에는 미 해병에 의해 초지진, 덕진진과 광성보에서 비극이 반복됐다. 재건한 초지진에는 바다가 보이는 성곽 중앙에 당시의 대포를 재건해 놓았다. 개항 요구를 일축한 조선을 힘으로 굴복시키기로 결심한 미국은 미군함의 함포사격과 미해병 450명의 상륙 공격으로 초지진을 점령해 파괴한 뒤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로 향했다.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의 지휘 아래 500명이 필사의 저항을 했지만, 최신 무기로 무장하고 남북전쟁 등으로 단련된 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340여 명이 전사하고 20명이 포로로 잡혔다.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卽和 主和賣國 :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보은, 청주, 예천에 가면 이 같은 내용의 '척화비(斥和碑)'를 만날 수 있다. 미국 함대가 계속 주둔할 수 없어 물러가자, 대원군은 강화도에서 참패를 당하고도 미국을 물리쳤다고 기고만장해져,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일본은 한일합방 후 이 척화비를 땅에 묻는 등 철거했으나 보은 등 몇 곳에는 이를 복원하여 아직도 남아있다.
"운명이란 우리 행동의 절반에 관해서만 중재자이며, 나머지 절반은 대체로 우리 인간이 통제한다." 마키아벨리는 세상사에 있어서 '운'이라고 할 수 있는 '포르투나(fortuna)'가 절반이고, '실력'이라고 볼 수 있는 '비르투(virtu)'가 반이라고 했다.
광성보 위에 서서 19세기 말 서구제국주의가 동쪽으로 몰려오던 '서세동점'의 시대에 비(非)서구국가 중 자생적인 근대화에 성공해 후발제국주의 국가로 부상한 일본과 근대화에 실패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이라는 동북아 양극분화를 생각하자, 문득 떠오른 것이 바로 이 마키아벨리의 분석이었다. 일본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한, 일본의 부상과 조선의 몰락이라는 '동북아의 양극분화'는 '운이 반이고, 실력이 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구로후네(흑선)다!" 신미양요가 있기 18년 전인 1853년,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군함들이 개항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의 심장부인 에도만에 나타났다. 일본은 자신들이 보유한 가장 큰 배의 수배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군함에 놀랐고, 이들은 일본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공포를 발사하는가 하면 상륙을 위해 강의 측량을 하는 등 무력시위를 벌였다. 개항을 요구하는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받은 일본은 마지못해 당시 실세인 도쿠가와 막부의 장군이 중병중이라 시간을 달라고 했다.
페리는 1년 뒤 더 많은 군함들을 거느리고 다시 나타났고, 일본은 결국 개항을 했다. 일본이 운이 좋았던 것은 이후 미국이 남북전쟁(1861~1865년)에 빠져 상당기간 동안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에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줬고, 이 공백기를 이용해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 등을 통해 자생적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운도, 실력도 없었다. 우리가 미국과 부딪친 중요한 첫 사건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이다.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1866년 대동강에 나타났다. 당시 물이 불어 강 상류까지 올라와 행패를 부리다가 물이 빠져 기동을 못하게 되자 관민이 합동해서 불을 태워버린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대원군 등은 미국에 대해 '별 것 아니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고, 신미양요 때 참패를 하고도 미군함이 장기체류가 어려워 철수하자 미국을 무찔렀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런 만큼 자체적인 근대화에 타이밍이 늦어졌고, 결국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 한데 이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야 했다.
미국을 접한 역사적 경험의 차이 외에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개항이 불가피하다고 느낀 일본 지도자들의 현실주의적인 판단과 대조적인 '척화론'이라는, 우리 지배층의 한심한 '자폐적' 정세 인식이다. 한마디로,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다.'
그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국가를 경영하던 '국가지배계급', 즉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관료의 차이다. 구체적으로, 일본 사무라이와 조선 양반·유림의 차이이다. 위로부터의 혁명에 대한 대작인 <위로부터의 혁명(Revolution from Above)>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이라는 '위로부터의 혁명', '위로부터의 근대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사무라이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에서 찾았다. 이들은 양반 등 많은 중세의 지배계급과 달리 토지에 매어있지 않았다. 이들은 농지가 아니라 현금으로 월급을 받았다. 따라서 이들은 일본의 봉건적 지배질서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고, 이 상대적 자율성이 막부체제라는 일본의 봉건체제를 무너트리고 근대화를 주도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조선을 움직였던 양반·유림이라는 '국가지배계급'은 기본적으로 농지를 가진 지주라는 '경제적 지배계급'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은 봉건적 질서와 경제적 지배계급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질 수 없었고, 이들과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개항과 근대화에, 나아가 동학 같은 밑으로부터의 근대화에 반대하고 봉건적 질서를 지키는 척화론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 쪽으로 올라가다보면, 한 삼거리 모퉁이에 작은 표시판이 자리 잡고 있다. 1882년 조선이 서양과는 처음으로 통상조약을 맺은 장소를 기념하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라는 표시석이다. 이곳으로부터 2킬로미터 떨어진 화도진은 서해안 방어를 위해 1878년 건설한 방어시설로, 전권대사 신헌이 미국의 슈펠트 제독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협의하는 실물모형을 비롯하여 다양한 관련 자료들을 이곳에 전시해 놓아 최근까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한 시민단체의 끈질긴 노력으로 체결지가 화도진이 아니라 자유공원 쪽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이 표시석을 보고 있자, 세계의 흐름과 동떨어진 자폐적인 인식으로 개항에 저항하다가 그 같은 압력에 굴복해 뒤늦게 개항을 해야 했던 19세기말 우리 지배계급의 무지와 이에 따른 우리 민족의 비극에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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