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진료팀을 채운 스포츠형 다목적 차량(SUV)에 취재진 둘도 끼어 앉았다. 깨끗하게 포장된 도로이지만, 길은 구불구불 이어졌다.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차량은 춘천시 북산면 추곡리에 도착했다. 25일 오후의 첫 방문 진료자인 황모(83) 할머니 댁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라는(황 할머니는 세 번째 만남으로 기억하고 계셨다) 진료팀을 황 할머니가 반갑게 맞이했다. 오가는 인사부터가 통상의 병원에서 오가는 대화와는 달랐다. 냉장고를 뒤적이는 황 할머니가 "이거 잡숴"하며 인사를 건넸다.
황 할머니는 장기간 당뇨를 앓아 왔다. 무릎 관절염이 도져 대문 밖을 나가는 것도 일이다. 동네에서 춘천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큰 길로 나가야 한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거리는 1.2킬로미터. 건강한 성인이라면 20분도 안 걸릴 거리다. 황 할머니에게는 천리길이다. 오전 9시 30분 버스를 타려면 아침 7시에 집을 나서야 한다. 걷다 멈추고, 아픈 다리를 두들기며 쉬다가 다시 걸어야 한다. 그렇게 겨우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 병원 문을 힘겹게 들어선 후, 진료실에서 기다리는 의사를 만나 3분가량을 이야기하고 다시 집으로 천리길을 나서야 한다. 처방전을 받고, 한 달 먹을 약을 타려면 하루를 종일 소비해야 한다. 이 큰 일만으로 할머니는 앓아 누울 지경이다.
양창모 의사, 최희선 간호사, 정윤후 케어매니저로 구성된 3인의 방문진료팀 '호호방문진료센터(이하 방문진료팀)'는 황 할머니와 같은 이들을 방문한다. 방문진료팀, 더 익숙한 말로는 왕진 전담 팀이다. 지난해 한국수자원공사가 소양강댐 수몰지역 거주민의 의료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해 실시한 방문의료 사업이 한 해 연장돼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3인의 팀이 수몰지역 반경 5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춘천시 신북읍, 북산면, 동면, 동내면, 사북면의 30개 마을을 돌며 노인들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간단한 시술도 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에게는 존재조차 익숙지 않은 왕진 의료가 이곳에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이들의 의료 행위는 양창모 의사가 올해 쓴 책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한겨레출판)를 통해 더 잘 알려졌다. 그가 전공의 시절부터 지난해까지 경험한 일들, 총 600여 회의 왕진을 하며 본 사례들을 정리한 책은 언론에서 제법 화제가 됐다. 정부가 '세계적 수준'의 한국 의료를 홍보하며, 이제 세계인을 대상으로 한국 의료 '서비스'를 강화하자고 할 때, 원격의료를 도입해 한국 의료 서비스의 질을 한 차원 높이자고 할 때 의료 소외 지역의 누군가는 여전히 왕진 없이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한국 의료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책에 담겼다.
특히 양 의사는 책에서 기존 한국의 진료실 의료 행위를 '3분 진료'로 통칭하고, 의사와 환자가 서로 의료의 본질로부터 소외되는 문제가 극도의 효율성만 추구하는 한국 의료 시스템에 있음을 지적했다. 양 의사는 아울러 왕진을 통해 진료실 바깥에서 한국 의료의 문제점을 직시하게 됐음을 강조했다.
방문진료가 온 국민 의료접근권 보장하는 열쇠
취재진은 25일 오후를 방문진료팀과 동행했다. 오후 2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약 3시간가량 겨우 두 명의 환자를 만났다.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의료와는 거리가 멀다. 대부분 시민의 병원 경험은 다음과 같다. 가까운 동네 병원을 찾는다. 약 10분가량 기다린다. 의사를 만난다. 3분가량 진료를 받는다. 시술이 필요할 경우, 시술을 받는다. 처방전을 받는다. 약국으로 가 약을 구입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방문진료팀의 의료행위는 이와 다르다. 수십 분을 이동한다. 길게는 댐 건너 마을을 찾기 위해 배를 타고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환자를 만난다. 환자는 대부분 홀로 사는 65세 이상 노인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본래 목적의 진료를 한다. 혈압도 재고, 상담도 하고, 주사도 놓는다. 또 이야기를 나눈다. 이 대목에서 환자도 모르던, 의료진도 모르던 새로운 문제를 발견한다. 그 문제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노인이 걷기에 너무 미끄러운 화장실 바닥을 발견한다. 화장실에 미끄럼 방지 패드를 부착한다. 이는 골절을 예방할 수 있다. 대문 문턱 계단이 지나치게 높아 노인이 집 밖을 나올 수 없는 현실을 확인한다. 마을 활동가에게 부탁해 계단에 난간을 설치한다. 노인의 이동권을 보장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노인이 병원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진료는 당연하겠지만, 특정 목적의 대화만 짧게 이뤄지는 병원에서는 불가능하다. 방문진료에서만 가능하다. 방문진료가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 일인가는 오직 방문진료를 해 본 의사만이 알 수 있다고 양창모 의사는 힘줘 말했다.
더 구체적인 사례를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일상이 이런 환자를 보는 것일 텐데, 양 의사는 최근의 사례 하나를 소개했다.
방문을 통해 형성되는 '관계'
방문진료팀은 단순히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치료만 하지 않는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소외된 노인들에게 큰 의미를 지님을 알 수 있었다.
양 의사가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50년 된 괘종시계다. 손으로 시곗밥을 줘야만 돌아가는 예전 시계다. 오전에 방문한 한 할머니 댁에 있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유품이란다.
방문진료팀이 소외된 지역에 있는 노인들의 말벗이 되고, 정기적으로 얼굴을 내비치는 자식 노릇도 했다. 이런 방문진료팀이 전국 곳곳에 있다면? 독거 노인의 삶의 질 하락 문제는 한국에서 특히 심각하다. 한국 노년의 삶의 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장시간 최악을 달리고 있다. 꾸준히 방문하는 이들의 존재만 있더라도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이런 관계망은 환자에게뿐만 아니라, 의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양창모 의사는 힘줘 말한다. 왕진이 의사에게도 필요한 의료행위라고 양 의사가 강조하는 배경이다.
민간의료와 공공의료 사이에 벽을 세울 때
방문진료의 필요성을 정부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다. 2019년 정부가 시작한 왕진수가 시범사업이 증거다. 사업에 참여하는 의원들은 왕진을 실시하고, 별도로 책정된 왕진수가를 받을 수 있다. 왕진수가는 기본수가 8만 원에 별도 행위료가 추가 산정되는 방식과 정액 수가 11만5000원이 적용되는 두 종류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보다 부진하다. 핵심은 왕진수가가 현 의료 현실 대비 지나치게 낮다는 데 있다. 다시 양창모 의사가 강조한 '3분 진료' 현실로 돌아가 보자.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놓인 제품처럼 환자가 들어오면, 의사는 3분 만에 처방전을 쓱 작성하고 다음 환자를 받을 수 있다. 한 시간이면 최대 20명의 환자를 볼 수 있다는 단순 계산이 나온다.
만일 시골에서 왕진을 하는 의사라면? 양창모 의사 방문진료팀의 경우 통상 오전에 2명, 오후에 2명의 환자를 본다. 하루 최대 4명에서 5명가량의 환자가 전부다. 단순히 현 왕진수가를 적용한다면, 하루 44만 원가량의 수익이 발생한다. 그 수익으로 의사는 간호사를 고용하고, 차량을 운영하고, 각종 의료 장비를 구입하고, 의원 임대료도 지불해야 한다. 얼핏 보아도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는 의사의 수익과 비교할 수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의사에게는 현 시범사업이 크게 매력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문제를 의사의 탐욕으로만 돌리는 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고 양창모 의사는 강조한다. 그는 우선 '왕진'과 '방문진료' 개념을 분리해 주길 강조했다. 그리고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방문진료의 공공화'라고 양창모 의사는 지적했다.
실제 취재진의 눈 앞에서 환자가 모르던 의료 수요를 방문진료팀이 찾아내는 현실이 펼쳐졌다. 앞서 이야기한 황 할머니의 사례다. 무릎에 관절주사 시술을 끝내고, 진료팀은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는 당뇨 후유증으로 발바닥 감각이 일반인보다 떨어졌다. 그런데 할머니가 유난히 발등을 긁는 모습이 양창모 의사의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피부약을 발랐다고 한다. 진료팀이 할머니의 양말을 벗겼다. 무좀균이 발등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의료진이 즉석에서 할머니에게 바람직한 대처법을 설명해 드렸다.
다른 사례도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가 평소 드시는 약을 한 아름 들고 왔다. 황 할머니는 7알의 약을
하루 세 번 드셔야 한다. 양창모 의사가 약을 유심히 살폈다.
즉석에서 약국과 양창모 의사가 대화를 나눴다. 대화 끝에 결론이 내려졌다. 그 중 2알의 약은 필요가 없었다. 통상적으로 병원이 처방하기 마련인 위장약이 포함됐는데, 할머니가 굳이 복용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고 양창모 의사는 지적했다. 그만큼 할머니는 약값을 과다 지출하는 중이었다.
궁금해졌다. 양창모 의사가 대신 처방전을 쓰고, 할머니가 이 처방전으로 보건지소에서 약을 새로 타면 되지 않을까? 지금의 방문진료팀은 수자원공사의 시범사업으로 운영된다. 그로 인해 보험수가가 적용되지 않아 처방전 작성이 불가능하다. 현 시범사업의 한계다. 양창모 의사가 이번 시범 사업이 끝나면 왕진 전문의원 개원을 고민하는 배경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느린 진료'
방문진료의 공공성을 말하는 양창모 의사의 입장은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 의료' 사업의 핵심인 원격 의료와 배치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정부는 원격 의료 사업에 공공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환자가 언제든 주치의와 전화해 자신의 증상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만큼 환자의 의료 접근권이 강화된다고 정부는 주장한다. 얼핏 생각하면 맞는 이야기처럼도 여겨진다. 의료단체들이 그토록 원격 의료를 '의료 영리화'라며 반대하는 이유가 쉽게 와닿지 않는다.
양창모 의사는 사례 하나를 들며 원격 의료에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양창모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기존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환자와 의사의 대면 시간을 최소화하는 3분 진료가 그 상징이다. 원격진료 역시 이 같은 철학에서 나온 정책이다. 의사와 환자의 대면 거리를 기존보다 더 늘렸다.
이 '효율성'은 환자를 향하지 않는다. 의사를 위한 효율성이고, 의료서비스 기업의 수익을 위한 효율성이다. 환자에게 정말 필요한 게 이 '효율성'이냐고 양창모 의사는 물었다. 오히려 병원 바깥에서 보기에는 비효율적인 방문진료가 환자에게 훨씬 중요하고 필요한 일 아니냐는 얘기다. 더 느린 진료, 환자와 의사의 거리가 동네 이웃처럼 가까워지는 진료가 환자에게 정말 필요한, 공공을 위한 의료 아니냐고 양창모 의사는 지적했다.
온 마을이 노인을 돌봐야 한다
양창모 의사는 방문진료의 공공화는 지금 당장에도 소규모 예산으로 시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존엄한 죽음'을 돕는 방법
양창모 의사의 말 중 특히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가 있었다. 왕진, 혹은 방문진료는 집 밖으로 거동이 불편한 이를 위해서만 필요한 의료행위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다. 혹은 병원을 찾기 힘든 농촌, 산촌, 어촌에나 필요한 의료 서비스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방문진료는 도시민에게도 필요한 사업이라고 양창모 의사는 강조했다. 방문진료가 우리 모두의 '존엄한 죽음'을 위해 필요하다는 그의 설명이 크게 와닿았다.
의사가 좋은 이웃이 돼야 한다
우리 모두의 존엄한 죽음을 위해 방문진료 서비스의 공공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보건소가 방문진료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들을 새겨 들으며 새삼 현장에서 긴 시간 고민한 사람의 족적이 느껴졌다.
양창모 의사는 2006년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2009년까지 강원도 원주의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과거 의료생협)에서 일했다. 이후 춘천으로 건너와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운영하는 가족보건의원에서 일했고, 지난해부터 호호방문진료센터 사업에 참여했다.
그의 족적은 보통 의대 졸업생의 그것과는 출발부터 다르다. 그가 연고도 없는 강원도(그의 고향은 전남 목포고, 그가 졸업한 의대는 서울에 소재했다)를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실제로 시민 사회 활동을 지금도 왕성히 한다. 책에 자세한 내용이 소개돼 있다. 한편으로 그는 녹색당 당원이며, 프레시안 협동조합의 조합원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의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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