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시는 '유하동유적'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고 국가사적 지정의 당위성을 검토하기 위해 지난 10일 장유도서관에서 학술대회를 마련했다.
김해 유하동유적은 국가사적 제454호인 양동리고분군을 만든 집단의 생활유적으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 유적의 최남단에 위치한 유하패총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 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에 김해시는 유하동유적의 성격 확인을 위해 유하패총 일부와 남쪽 구릉 일원을 대상으로 3차례 걸쳐 정밀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가야' 시기 때 주거지와 수혈건물지, 제사 관련 건물지, 패총의 시기 등을 조사한 것이다.
김건수 문화재위원은 "유하동유적을 사적으로 지정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몇개 있다"며 "유하동유적은 유구(遺構)의 종류가 모두 지하에 매장돼어 있는 관계로 지석묘·고분·산성·읍성 등과 달리 그 중요성을 시각적으로 어필할 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김 위원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인접한 봉황유적(사적2호)의 성격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는 장점될 수도 있겠지만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단점도 될 수가 있다"고 말했다.
이재호 한화문물연구원은 "일부만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유하패총’의 범위에 대해서도 제고돼야 한다"면서 "김해 양동리고분군(사적 제454호)과 양동산성(도 기념물 제91호)을 하나의 유적군으로 지정해 꾸준히 금관가야의 정체성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재용 김해시 학예사는 "유하패총 구간은 변형삼각형 점토대토기를 상한으로 하여 6세기 후반의 수혈이 조사돼 김해 양동리고분군의 연대와 일치한다"며 "패총과 최근 제사관련 유구에서 조사된 유물들도 김해 양동리고분군과의 연관성을 말해주고 있다"고 밝혔다.
심 학예사는 "아직까지 유하동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성과가 많이 부족하다. 유하동유적이 김해 양동리고분군을 조성한 집단의 무덤이 확실하기 때문에, 최상위 집단이 거주했던 곳과 의례공간·방어공간·교역공간 등이 모두 존재할 곳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동희 인제대 교수는 "현재까지 유하동에서 조사된 주거지나 수혈·패총 등 생활유적의 중심시기는 3∼5세기대로 추정된다"며 "이와 유사한 시기의 금관가야권 내의 유적으로는 해반천유역의 봉황동유적이 대표적인데, 이 유적은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관련되는 왕성 유적이다"고 지목했다.
이 교수는 "현재 조사된 하층에서 김해 양동리고분군의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유구가 확인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현재 조사된 구역의 주변부 혹은 북쪽에서 1∼2세기대(목관묘 단계)의 유구가 확인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옛 김해만에서 지석묘 직후 단계인 1~2세기대의 목관묘는 해반천유역의 대성동과 조만강유역의 양동유적에서만 집중되어 유력세력이 봉황동과 유하동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봉황동유적과 함께 금관가야의 핵심 취락으로 존재했던 유하동유적은 그 보존상태가 상대적으로 양호해 장기적인 발굴조사 계획하에 전기 가야의 중심취락의 전모를 밝혀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학종 前 국립김해박물관장은 "유하동유적은 양동 고분유적의 생활유적이다. 이미 30여 년 전에 주장된 바가 있다. 진작 이 유적의 성격 등이 밝혀져야 했지만, 발굴조사가 지금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