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약을 지으면, 멀리서 오신 분들은 택배로 받고, 동네 분들은 대개 직접 가져갑니다. 그런데 종종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거나 관절이 좋지 않아 힘든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식구들과 함께 살면 괜찮은데, 혼자 생활하시는 분들도 많지요. 가까운 거리여도 부득불 택배로 보내드린다고 하면, 동네인데 가져다주면 좋겠다는 뜻을 넌지시 건네십니다.
어르신은 약을 일찍 받아서 좋고, 저는 택배비도 아끼고 좋아하는 명륜동 골목길 산책도 할 수 있으니 1석 3조입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입동이 지나고 나니 퇴근 무렵은 어느덧 깜깜한 밤입니다. 미리 전화를 드리고 지도에서 위치를 확인하고 슬슬 걸어갑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종종거리며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이 보이고, 길가 식당에는 드문드문 앉아 저녁을 먹는 모습이 보입니다. 저녁 밥 때가 되면 늘 북적대던 곳이었는데, 비어있는 테이블을 바라보는 주인의 어깨가 무거워 보입니다. 가끔 어깨랑 허리가 아파서 오는데, 좀 더 신경 써서 챙겨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적어 주신 주소에 도착하니 오래된 4층 건물입니다. 1층에 있으면 내려오마. 하셨는데, 좁고 가파른 계단을 보니 걱정이 앞서 올라갔습니다. 4층에 가니 막 문을 열고 나오십니다. 그대로 계시라 하고 약을 전해드리고, 차 한잔하고 가란 말씀을 뒤로 하고 내려옵니다. 무릎이 아파 수술을 받으시고도 아프신데, '이 계단이 한몫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며칠 후에 한의원에 오셨을 때 계단 이야기를 했더니, 안 그래도 죽을 맛이라고 하십니다. 수술하고 난 후, 같은 동네에서 1층에 사는 아들한테 서로 바꿔 살자고 했는데, 못 들은 척한다며 서운한 마음도 보이십니다.
내가 만나는 눈앞의 환자와 그 환자의 병은 정말 빙산의 일각 같습니다. 병의 원인 혹은 뿌리를 뽑는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거짓말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환자를 둘러싼 세상, 결국 사회를 바꾸는 일이 그것에 가깝겠지요. 생각하다 보니 문제도 해결책도 결국은 정치에 있다는 말에 공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뉴스로 전해지는 소식들은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깝습니다.
그 다음 날은 언덕 위에 있는 할머니 댁에 배달을 갔습니다. 겨울이 되면 웬만큼 아파서는 잘 오지 않으시는데, 왜 그런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오고 가는 길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에도 아마 내가 만난 환자들 중 누군가가 살고 있겠구나 합니다.
오늘 저녁 퇴근길에는 발목 골절로 목발을 짚고 오신 환자분 댁에 배달을 갑니다.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오늘 밤의 공기는 어떨지 기대되고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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