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불러낸 新 '참여' 정부

[시민정치시평] 어떤 민주주의 소통 모델이 오는가

방역의 성공을 민주주의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코로나 이후의 한국사회를 상상하며 먼저 이 질문에 답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코로나 방역 국면에서 국제사회의 화두로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정부의 리더십 문제다. 뉴질랜드, 한국, 대만, 독일, 덴마크 등이 방역에 성공하며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투명한 정보공개로 국민적 신뢰를 이끌어낸 독일 총리 메르켈, 적극적인 초기 대처로 확진자 제로 상태를 이끌어낸 뉴질랜드의 아던 총리와 한국의 문재인 정부는 팬데믹의 아노미 상태에서도 극적인 지지율 상승을 경험 중이다. 한국을 제외하면 모두 여성을 정부의 수장으로 둔다는 점, 방역 실패의 대표적 사례들이 우파 포퓰리스트들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받고 있다.

그 반대 국면에 놓인 나라들이 미국, 브라질, 일본, 영국 등이다. 아베는 도쿄 올림픽 개최에 맹목적인 태도를 보였고, 트럼프는 증시 변동에 촉각을 세우며 초기 대응을 방관했다. 지지자들과 집회를 강행하고 물놀이를 즐긴 브라질의 보우소나우, 일상을 즐기라고 말하다 스스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영국의 보리스 존슨까지 일부 지도자들의 '기행’ 역시 국제사회의 새로운 스캔들이 되고 있다.

언론들은 이 우파 스트롱맨들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매몰돼 눈앞의 팬데믹을 부인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재난은 아노미 상태를 유발하며 리더십의 근간을 흔든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방역의 출발점이 정부의 시민사회에 대한 신뢰였다고 생각한다. 시민사회를 믿지 못하면 팬데믹을 그 자체로 드러내고 투명하게 공론화할 수 없다. 2008년 금융위기의 재난상황에서 우파 스트롱맨들은 난민과 이주민 등에게서 가상의 적을 발견했고, 그들에게 재난의 책임을 전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의인화될 수 없었고, 코로나19는 각자의 안전을 모두의 안전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재난국면을 연출했다. 이 재난국면의 소통모델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방역은 정치적 소통의 문제다

방역이 소통의 문제를 수반한다고 할 때, 그 문제가 실천으로 연결된 것이 거리두기 참여였다.

거리두기에 대한 많은 우려가 있었다. 그것이 우려를 낳은 것은 사회적 약자를 고립화할 가능성, 사회의 파편화라는 시대현상을 가속화할 가능성 때문이었다. 좁게는 2008년 이후, 넓게는 1997년 이후의 시대상을 특징짓는 요소 중 하나가 각자도생의 정신이었다. 세월호 참사의 비유를 빌리면, 안전망도 컨트롤타워도 사리진 채 십수 년의 '국가부재중의 민주주의’ 상태가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각자도생의 파편화는 다시 디지털 생태계의 원리들과 맞물리며 디지털 반향실(反響室, echo-chamber) 효과라는 현상을 낳았다. 온라인 연결관계는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 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경향을 낳는다.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갖는 이들이 온라인 매체를 타고 연결될 때, 사람들은 세계를 자신의 메아리로 가득 찬 공간으로 착각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박근혜 정권을 기점으로 카카오톡 단톡방이 고령층 우파들의 정치적 연결을 촉진하는 플랫폼으로 떠올랐다. 전 지구적으로는 유튜브가 우파 음모론의 새로운 서식지로 부상 중이다.

방역의 성공은 디지털 반향실의 이 착시효과를 억제한 것과 연관된다. 그 억제의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하나는 정보 수용자의 태도 변화였다. <뉴욕타임즈>의 한 기사(바로가기)에 따르면, 미국에서 거리두기가 시작된 후 전체 디지털 접속량 중 당파적 매체 접속도는 줄고, 지역방역 정보를 전달하는 로컬 매체의 접속도가 크게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정치적 세계관보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정확한 정보를 더 갈구했다.

다른 하나는 방역 당국들의 일종의 큐레이팅 작업이었다. 큐레이트(curate)의 라틴어 어원은 cura, 즉 돌봄(care)으로, 큐레이팅이란 사물을 돌보는 것 혹은 사물들 간의 관계로 길을 안내하는 행위를 뜻한다. 팬데믹의 아노미 상태에서 방역 큐레이팅의 작업을 담당한 것이 질병관리본부의 일간 브리핑이었다. 뉴질랜드의 방역 성공을 묘사한 한 칼럼은 일간 브리핑의 효과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사회는 반향실의 '여러 거품들’ 속으로 파편화되고, 사람들은 공유된 목적과 이해에 기반해 경험을 서로 연결하지 못한 채 분열된 온라인 서식지들로 들어갔다. 그러나 정부의 메시지 전달, 특히 일간 브리핑은 우리의 현실들을 상호연결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위기와 직면해 상호연결되어 있으며 통합되었다는 감각을 갖게 했다."(바로가기)

통합과 연결의 감각은 정부와 공권력으로부터 등을 돌렸던 많은 이들을 공론장으로 돌아오게 했다. 20세기 말부터 정치학에서 새로운 화두로 부상한 것이 정치적 독립층(independents), 우리말로 무당층의 거대한 확산이었다. 독립층의 부상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정치 효능감의 부재다. 내 실천이 공적 관계망을 바꾸는 데 유효한가, 나의 개입이 내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실질적인 움직임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 정치적 효능감의 물음이다. 정치적 대표성의 실효성 상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현상은 정치권 엘리트들과 대중의 삶을 분열시키고, 금융위기 이후 엘리트 권력에 분노한 거대한 아스팔트 우파 집단들을 낳았다.

한국에서 이 정치적 독립층은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을 낳은 2007~2008년에 극대화되었다. 반대로, 2020년의 팬데믹 구간은 이 정치 효능감을 폭발시키며 공론장을 가득 채우게 된다. 21대 총선은 21세기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한 총선이었다. 왜 정치적 효능감은 이 거리두기 구간에서 높아졌을까? 아마도 그것은 팬데믹이 모든 관계질서들을 재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명의 지침 위반이 전국적인 확진자 증가세로 번지는 코로나19의 전파력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책임감을 강화시켰다. 방역 지침과 바이러스 전파 추이를 안내한 일간 브리핑은 이런 점에서 단순한 정보 전달이라기보다 시민들을 이 책임의 연결망으로 안내하는 재난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거리두기는 파편화보다는 전 국민적 연결감각을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참여민주주의’로는 부족하다

소통이란 쌍방향의 주고받음 행위를 의미한다. 정부의 방역지침 전달과 호응하며 부재중이던 국가를 공론장의 컨트롤타워로 세운 것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방역지침 실행이었다. 여기서 방역의 큐레이팅 작업이 정부와 시민사회 간의 쌍방향에서 일어났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태원발 확진자 증가 추이에서 성소수자 혐오 억제에 대한 시민사회의 요구들은 일부 지자체들이 익명 검사를 실행하도록 강제했다. 경기도에서 이주민을 배제했던 재난기본소득은 시민들의 항의에 의해 (불완전한 수준이지만) 이주민 일부를 수용하게 된다.

방역의 거대한 열정은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분노로 크게 전환되지 않았다. 이것이 유럽 및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아시아인 인종차별의 집단심리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팬데믹 구간에서 형성된 이러한 흐름들을 우선 기존의 '참여민주주의’ 모델에서 분리해 볼 필요가 있다. 과거 '참여정부’에서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참여민주주의란 사실상 친정부적인 시민단체들이 정부 행정의 하위파트너로 흡수되는 것을 의미했다. 상당수의 시민단체 엘리트들이 정부의 콜을 받았고, 민관협치는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처럼 각광받았다. 그러나 이 모델은 민주주의의 미래상이라기보다는 친정부 엘리트 간 동맹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386의 세대 내 동맹은 이 흐름 속에서 견고해졌다.

반대로, 오늘날의 정치적 독립층들은 이러한 엘리트 카르텔에 냉소를 보이며, 본인들이 공적 의사결정에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연루되기를 바란다. 팬데믹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가능케 했다. 우리는 팬데믹이 일상의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그 변화시킴의 연결감각에 주목해야 한다. 디지털 뉴딜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원격의료의 도입이 아니라 바로 이 소통의 효능감을 높이는 모델의 발견이어야 할 것이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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