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한류 인물 김염
몇 해 전부터 한류 열풍이 참 대단하다. 가까운 일본, 중국, 동남아를 넘어 이제는 유럽에까지 한류 바람이 불고 있다. 외국인들이 '어설픈' 한국말로 자신이 좋아하는 한국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좋아하는 배우를 응원하기 위해 삐뚤빼뚤하게 쓴 한국어 푯말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풋' 하고 웃음이 나오면서도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이런 한류 열풍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건 아마도 그들이 열광하는 대상과 내가 같은 한국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1930년대 중국에 이미 한류 바람이 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1935년 1월 1일, 중국에서는 한 편의 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다. 표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던 그 영화의 제목은 <대로>(大路)다.
영화의 주인공은 100년이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14억 중국인들에게 '영화 황제'로 기억되고 있다. 그 주인공의 이름은 '김염(金焰, 본명 김덕린, 1910~1983)'이다. 그는 한국 사람이었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중국 영화계에서는 근대 영화인 가운데 독보적인 존재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전설과도 같은 존재다. 오늘날까지 중국영화계에서 '황제' 칭호를 부여받은 사람은 김염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한다. 중국영화계에서 중국인도 아닌 한국 배우가 황제라고 불리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그는 상하이영화제작소 부주임, 상하이 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영화작가협회 이사 등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자오단(趙丹), 바이양(白楊) 등과 함께 중국 국가 1급 배우로 임명돼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접견하기도 했다. 김염은 명실공히 중국 대륙을 사로잡았던 원조 한류 스타였던 것이다. 그리고 2019년 신중국 건국 70주년에 인민예술가로 선정된 친이(秦怡)가 그의 부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역사가 김염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국외에서 이름을 떨친 유명 배우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염은 중국에서 영화와 연극을 통해 항일의 전면에 나선 인물이었다. 그의 출연작은 거의 대부분 항일과 관련돼 있다. 그는 이들 작품을 통해 중국인들은 물론 조선인들의 가슴에 항일에 대한 의지와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선각자적 역할을 했다.
한 예로 영화 <대로>에서 김염은 일본군 앞잡이의 방해 공작 속에서도 항일 투쟁을 위한 도로를 개통해 내고, 이후 적기의 공습에 장렬하게 전사하는 주인공 역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이 영화는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에 뜨거운 조국애를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영화를 본 많은 젊은이들이 이 영화의 주제가를 부르며 저마다 김염이 되어 항일 전선으로 달려 나갔다.
일본을 향한 김염의 강한 적개심을 살펴볼 수 있게 하는 자료가 있다. 님웨일즈가 정리산 김산의 <아리랑>에는 다음과 같은 예화가 나온다.
김산이 기억하고 있는 '김엄'이, "왜놈의 주구"라는 말에 크게 분노하며 자신을 그렇게 부른 중국인에게 경주를 하다 말고 달려가 응징한 이가 바로 '김염'이다.
김염의 아버지, 김필순의 가문
김염의 아버지가 바로 의사(醫師)이자 의사(義士)였던 독립운동가 김필순이다. 세브란스의학교(제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의술로써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아버지와 최고의 영화배우로 영화로써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아들. 참 그 아버지에 그 아들답지 않은가?
독립운동가의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의 가족들 가운데는 유독 나라를 위해 애쓴 인물들이 많다. 김염뿐만 아니라 그 형제들인 김덕홍(金德洪), 김위(金瑋), 김로(金蘆) 또한 아버지 김필순의 피를 물려받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김필순의 형인 김윤방(金允邦)과 김윤오(金允五), 여동생인 김구례(金具禮)와 김순애(金淳愛), 조카딸 김마리아도 모두 독립운동에 열정을 바친 인물들이다.
특히 김구례는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의원을 지낸 서병호(徐炳浩)의 아내이며, 김순애는 상하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표로서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을 지낸 김규식(金奎植)의 아내다. 또한 김마리아는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상하이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를 지냈다.
이렇게 김필순의 집안에서는 우리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희망을 전해주는 등불과도 같은 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 그들 중심에 하얀 가운을 입고 태극기를 휘날리는 그가 서있다.
의사(醫師)이자 의사(義士) 김필순, 중국으로 망명하다
세브란스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자,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 7인 중 한 사람으로 실력까지 출중했던 '의사(醫師) 김필순'은 어쩌다가 '의사(義士) 김필순'의 길을 걷게 된 것일까? 김필순이 학업에 열중하고 있을 당시 국내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1905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박탈된 상태였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고뇌하던 그는 1907년 8월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반발해 봉기를 일으켰던 군인들이 무참히 진압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신민회(新民會)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신민회는 안창호, 양기탁(梁起鐸), 신채호, 이동휘(李東輝), 김구 등이 1907년 9월에 조직한 비밀 결사 단체다. 당시 김필순은 자신의 형인 김윤오와 함께 세브란스병원 건너편에서 '김형제상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을 신민회의 비밀 모임 장소로 제공했다.
김필순은 낮에는 청진기를 든 의사로, 밤에는 태극기를 든 독립운동가로 살아갔다. 1911년 일제가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건을 확대 조작해 신민회의 주요 인사를 포함한 독립운동가 700여 명을 구속하고, 그중 105명에게 실형을 언도한 사건이다. 김필순은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감지하고, 1911년 12월 31일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중국 땅에서도 독립을 향한 김필순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그는 이회영 6형제와 이상룡(李相龍)을 비롯한 안동 사람들이 이미 이주해 활동하고 있던 서간도로 향했다. 그가 정착한 곳은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유하현(柳河縣)과 인접한 통화현(通化縣)이었다. 김필순은 그곳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의술로써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병원을 운영해 얻은 수익금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도 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무관학교 운영에도 발 벗고 나섰다.
그러나 김필순의 망명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1912년 3월, 그가 당시 캘리포니아에 있던 안창호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조촐한 짐을 꾸려 이주한 이국땅에서 언어가 소통되지 않아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고 털어 놓고 있다.
치치하얼 김필순 농장 그리고 순국
이후 김필순은 안창호의 권유에 따라 치치하얼로 무대를 옮기게 된다. 안창호는 만주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흑룡강성 치치하얼 부근과 밀산 지역을 후보지로 정한 안창호는 김필순에게 치치하얼에서 활동할 것을 권했고, 김필순이 이를 수락하면서 치치하얼에서의 그의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치치하얼에서 김필순은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힘썼다. 치치하얼의 용사공원 내 관제묘(關帝廟, 관우묘)에 거처를 정한 김필순은 그와 인접한 영안대가(永安大街)에 '북제진료소(北濟診療所)'를 개원했다. 이 병원의 이름은 제중원과 인연이 깊었던 그가 '북쪽에 있는 제중원'이라는 뜻으로 명명한 것이다. 김필순은 이 병원에서 현지인들과 한인들은 물론 부상당한 독립군들을 돌봤을 뿐만 아니라, 이곳이 독립운동가들의 연락 거점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했다. 이 당시 그는 중국군과 러시아군의 군의관으로도 활동했는데, 이를 통해 신변을 보호받았다.
한편 김필순은 병원 운영과 함께 대규모 농장을 꾸려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다. 일명 '김필순 농장'이 그것이다. 치치하얼 일본영사관의 보고에 의하면, 김필순은 중국인 지주와 함께 토지를 개간했는데, 그중 3분의 1 가량이 그의 소유였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그는 한국인 이광범(李廣範), 중국인 조좌향(趙左鄕)과 함께 농장을 꾸렸다. 김필순은 이 농장을 운영해 독립군에게 자금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이주 한인 자제를 교육시켜 훌륭한 독립투사로 키우고자 했다. 이를 위해 김필순은 일제강점기 여성운동가로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던 자신의 동생 김필례를 농장으로 불러 농민 교육을 담당하게 했다.
이렇게 김필순 농장은 한인공동체이자, 독립운동의 인적자원 공급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농장 경영에 매진하기 위해 자신의 매제이자 대한민국 수립 이후 전라남도 도지사를 역임했던 최영욱(崔永旭)(세브란스 6회 졸업생)에게 병원 일을 맡기는 등 농장에 많은 노력과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병원과 농장 수입의 거의 대부분을 자신과 가족이 아닌 조국의 독립과 동포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그러나 이렇게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김필순은 안타깝게도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일본인 의사가 전해준 우유를 먹고 건강이 악화돼 1919년 음력 7월 7일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자신의 작은 외할아버지인 김염의 삶을 조명한 <상하이 올드 데이스>를 쓴 박규원에 따르면, 일본인에게 독살당한 자신의 외증조부 김필순은 이후 치치하얼에 묻혔는데, 일본군이 그 묘마저 불도저로 밀어버려 흔적조차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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