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각국의 노동계와 재계를 대표하는 국제노총과 국제상공회의소(ICC)는 지난 20일 공동 명의로 G20 정상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두 조직은 코로나19 대응책 마련을 위한 G20 화상회의 개최를 환영하면서 현재의 위기가 초래할 인적 희생과 경제적 비용을 억제하는데 G20 지도자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수출 금지와 무역 제한은 근시안적
국제노총과 국제상공회의소는 잘 조율된 지구적 행동만이 국경을 뛰어넘은 지금의 위협과 씨름할 수 있다면서 △감염 통제를 위한 의료 물품이 필요한 사람에게 가게 할 것, △소상공인과 노동자에게 바로 지원할 것, △민간 부문도 공공 부문과 함께 바이러스 검사를 돕도록 할 것, △가난한 나라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늘릴 것을 요구했다.
이상의 요구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진단키트, 의약품, 살균제, 비누, 개인 보호장구와 같은 코로나19 방역 필수품의 자유로운 흐름을 가로막는 수출 금지나 교역 제한 조치가 철폐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러한 무역 제한은 국경을 쉽게 넘나드는 바이러스의 희생자를 늘릴 수 있는 근시안적 조치라고 비판했다.
국제 노동계와 재계를 대표하는 두 조직은 중소기업들이 글로벌 고용의 80%를 감당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을 지원하고 노동자의 소득을 보상하기 위하여 경기부양책을 신속하게 시행할 것을 G20 정상들에게 요구했다.
특히 고용관계에서 취약한 상태에 있는 비공식 경제 종사자와 이주노동자, 그리고 난민들에 대한 사회보장 확대가 이번 G20 회의에서 반드시 합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제상공회의소, 유급 병가의 중요성 인정
공동 서한에서 국제노총과 국제상공회의소는 경제적 여유가 있고 의료 자원이 있는 선진국들이 자국 상황에 집중하게 되면서 가난한 나라들이 바이러스에 날로 취약해지는 문제를 지적하면서, 개발도상국의 공공보건 프로그램과 사회보장 제도를 지원하기 위한 국제 기금을 늘릴 것을 G20에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감염 억제와 위기 대처를 위한 사회적 대화의 중요성을 언급한 국제 사회의 양대 노사 단체는 유급 병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기업들이 노동자들에게 유급 병가(paid sick leave)를 부담 없이 허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필요한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비정규, 비공식 경제 노동자 보호해야
국제상공회의소와의 공동 서한에 이어 국제노총(ITUC)은 경제협력개발기구 노동조합자문위원회(OECD-TUAC)와 함께 '코로나19' G20 회의에 보내는 공동 서한을 3월 23일 발표했다.
각국 노동조합 총연맹(노총)들의 국제 상급단체인 두 조직은 공동 서한에서 인류의 생존이 현시기 가장 중요한 목표임을 강조하면서 △유급 병가 보장, △임금 소득 보호, △근무시간 단축, △대출 융자와 임대료 부담 완화, △보편적 사회보장 및 무상 의료, △보건, 상업, 약국 등 필수 사업 종사자들을 위한 탁아 지원 등 6가지 정책을 조속히 시행할 것을 G20에 제안했다.
특히 고용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프리랜서, 플랫폼, 기그(gig) 경제 노동자를 비롯한 모든 노동자들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지원책 마련에 나서고 있는 정부들의 노력을 평가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조치들을 적극 시행함으로써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 유지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나아가 글로벌 연대와 협력만이 코로나19로 인한 인명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억제할 수 있다면서 고용의 대부분을 감당하고 있는 중소기업 지원에 우선 순위를 두는 동시에 정부 지원을 받았음에도 정리해고와 무급 휴직의 꼼수를 부리는 기업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할 것을 주장했다.
사회적 대화 통한 경제 재건 계획
양대 국제노동 조직은 국경 봉쇄가 확산되고 코로나19 관련 물품의 수출 제한이 늘어나는 상황에 심각한 우려를 표하면서 일국적 생산이 지구 전체로 통합된 글로벌 공급 사슬을 대체할 수 없기에 자국만의 이해관계에 지나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두 노동 조직은 이번 사태가 경제에 미칠 영향은 2008/2009년의 글로벌 금융 위기보다 훨씬 심대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사람과 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단기 처방을 넘어서는 통합적 경제 재건 정책을 시급히 마련할 것과 이 과정에서 사회적 대화를 통한 노동조합과의 협력체제를 강화할 것도 주문했다.
마지막으로 공동 서한은 글로벌 경제를 안정시킬 수 있는 기회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각국 중앙은행 간의 조정 역할을 맡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역할이 중요한 때임을 강조하면서 국제노동기구(ILO),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은행, 세계보건기구(WHO)같은 국제기구들이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는 국제 환경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지도력을 G20 정상들이 발휘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경총 "재벌과 부자 위해 세금 깎자"
위에서 살펴보았듯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국제 사회에서는 노동자 단체만이 아니라 재계 단체도 인적 피해와 경제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재계가 국가적 위기 상황을 자기 이해관계의 관철을 위한 기회로 악용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지난 3월 23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이 국회에 제출한 '경제 활력 제고와 고용노동시장 선진화를 위한 경영계 건의'가 대표적이다. 경총의 건의서는 "연초부터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예기치 못한 공중보건 위기로 글로벌 경제가 초대형 복합 위기에 처해 있"다고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면서도 정작 바이러스 감염 사태로부터 사람과 경제를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한 구체적 제안은 하나도 없다.
대신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하기 전부터 지겹게 반복해온 경총의 시대착오적 요구사항으로 일관하는데, 대표적으로 △재벌과 부자들의 사유재산권 증진을 위한 법인세와 상속세 인하, △노동시장의 건전성을 망치기 위한 근로시간 증대와 해고할 자유의 확대,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의 경제적 기반을 망가트릴 최저임금 삭감, △사회보장제도의 형해화를 목표로 하는 국민건강보험 약화, △사용자의 보건안전 책임 회피, △일터에서의 법의 지배에 대한 부정,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거부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노동자와 일터를 중심에 두어야
국제노총과 글로벌노조들로 구성된 글로벌노조협의회(Council of the Global Unions)는 3월 12일 낸 공동성명에서 "바이러스의 영향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노동자의 건강과 일터에서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사용자, 정부 사이의 대화와 단체교섭이 중요하다"면서 이번 사태 대응에서 "노동자와 일터가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국제 사회는 코로나19 사태의 대응책으로 △유급 병가 확대, △고용상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에게 사회보장 혜택 제공, △근로 계층의 임금과 소득 보호, △중소기업을 위한 맞춤형 지원, △일자리와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국가 재정 패키지의 법제화, △빈국에 대한 원조 확대를 제안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들이 '코로나19' G20 화상회의에서 핵심 의제로 논의되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노동법, 병가 조항 없어
코로나19 사태를 보면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는 대목은 병가(sick leave, 질병 휴가)의 법제화다. 지금 우리나라 노동법에는 유급이냐 무급이냐를 떠나 질병에 따른 휴가나 휴직을 규정하는 조항이 없다.
미국의 세계정책분석센터가 2018년 낸 '개인 질병에 따른 유급 휴가'에 따르면, OECD 34개 회원국 중 개인 질병에 대해 유급 휴가를 보장하지 않는 나라는 미국과 대한민국 두 나라뿐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28개국은 유급 병가 기간이 최소 6개월이었고, 19개국은 병가 기간 중 임금의 80% 이상을 지급한다. 이제 대한민국에서도 유급 병가의 법제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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