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시민사회는 선거의 해 2018년 새해맞이 행사로 "Turun!"(뚜룬은 '내려오다’, ‘내리다’를 의미한다)을 외치며, 나집 정권의 퇴진과 물가안정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가행진을 벌인 바 있다. 5월 9일 실시된 말레이시아 14대 총선에서 유권자는 독립 이후 최초의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총 222석 중 야당의 연합체인 희망연대(Pakatan Harapan)가 113석을 얻어 범야권 의석은 총 124석을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희망연대를 구성한 정당 간 사전 합의에 따라 마하티르는 다수당의 대표로 총리에 취임했다. 일부 언론은 93세 정치인의 재집권으로 표현하지만 이번 선거 결과는 오랜 개혁의 열망과 희망이 가져온 국민의 승리이다.
개혁 열망으로 이뤄 낸 61년 만의 정권 교체
지난 61년간 장기 집권을 통해 여당은 이른바 '3M' (money, machinery, media)을 장악해왔다. 금권 선거의 관행 속에 방대한 조직력을 가진 여당은 주요 언론 매체를 소유하고 있어 선거 국면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로 구성된 다종족 사회인 말레이시아 정치에서 종족(Race), 종교(Religion), 충성심(Royalty), 이른바 '3R' 요인은 정치 현안과 이슈들을 압도했다.
이번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도 야당은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말레이계 지지가 선거 결과를 좌우할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 속에 정부 여당은 정략적 차원에서 탈세속주의를 부추겼다. '정치적 이슬람'의 부상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야당 중 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빠스당(PAS)은 야당연합에서 이탈했다. 이로 인해 말레이계의 표심을 두고 3파전을 벌이게 되는 불리한 지형이 형성되었다. 언론 탄압과 더불어 온라인상 정부에게 불리한 정보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거짓 뉴스 처벌법'을 도입했다. 거짓의 여부를 정부 당국이 판단하는 악법적 요인을 담았다. 한편, 야당의 분열 속에 마하티르는 나집을 비판하며 정계에 복귀했으며 구속 중인 안와르를 대신하여 야당연합의 대표로 추대되었다. 마하티르 재임시절의 권위주의적 행태로 인해 민주적 개혁에 한계를 가질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불리한 여건 속에 거둔 이번 승리는 지난 20여 년간 지속적으로 전개된 정치변동과 사회운동의 결과이다. 1998년 당시 부총리 안와르의 구속으로 개혁 운동이 촉발되었다. 2007년 시작된 공정 선거와 개혁을 요구하는 버르시(Bershi)운동은 시민사회의 연대와 저항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2008년부터 시작된 변화
이미 말레이시아 유권자는 2008년 총선에서 정권교체의 희망을 쏘아 올렸다. 2008년 총선에서 야당은 크게 약진하며 여당은 안정적으로 유지해왔던 2/3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당시 총선 결과는 '정치적 쓰나미'로 표현되었다. 특히, 도시 지역에서 야당에 대한 지지는 뚜렷했으며 중국계의 표심은 야당을 향했다. 이를 두고 정부와 여당은 '중국계 쓰나미'로 칭하며 말레이계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2013년 총선에서는 비록 정권교체에 실패했지만 총 유효 득표율에서는 이미 야당연합이 50%를 확보하며 여당의 47%를 넘어섰다. 정권 교체의 가능성을 보았지만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러던 중 2015년 현직 총리가 연루된 최대의 부정부패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1MDB라는 정부 투자 기관의 기금 중 최소 7억 달러 이상이 나집 총리 개인 구좌로 유입된 정황이 포착되었다. 사법 당국은 면죄부를 부여했으나 정치적 신뢰도는 크게 추락했다. 이는 대외 신인도 하락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누적된 재정적자 회복을 위한 특별소비세 (GST)의 도입은 물가 인상으로 이어졌다. 부정부패와 실정으로 인해 정부에 대한 비판은 증가했다.
2017년 실시된 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52%는 말레이시아의 정치제도와 정치시스템을 신뢰할 수 없으며, 말레이시아 정치가 정의롭지 못하고 희망이 결여된 상태로 보았다. 성난 민심과 개혁에 대한 열망이 정치공학적 불리함을 극복한 것이다. 평화적 시위를 통한 정치 참여로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주의를 보여주었다. 기존 언론이 여당에 통제되는 상황에서 인터넷 기반 언론과 소셜미디어 활용은 중요한 정보 공유의 장이 되었다. 무엇보다 종족 간 갈등 위협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69년 5월 종족 간 유혈사태를 겪은 이후 집권 여당은 정치 변화는 종족 간 갈등을 유발할 것이라는 우려를 전파해 왔다. 실제 지난 2차례의 선거에서 변화의 열망과 더불어 혹시 모를 충돌 사태를 우려하기도 했다. 더 이상 종족의 경계로 정치를 나눌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아울러 정치적 이슬람의 부상을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동남아시아 민주주의 쇠퇴 속에 이룩한 값진 변화
희망연대 정권은 개혁을 향해 급변하고 있다. 정치보복에는 관심이 없고 법치의 회복에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집 전 총리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가 취해져 그간 부정부패에 대한 조사를 예고했다. 뿐만 아니라 선관위, 부정부패방지위원회, 검찰 수뇌부 등에 대한 교체와 조사 요구가 거세다. 정치적 탄압의 결과로 구속되었던 안와르는 전격 사면되며 석방되었다. 대표적 개혁 성향의 학자인 조모(Jomo)교수를 포함하는 5인으로 구성된 국가자문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재무장관에는 개혁성향의 중국계 정당 지도자가 임명되었다. 마하티르 개인의 공과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개혁에 대한 열망은 거스를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선거제도의 불공정성 등 기울어진 운동장이 복구될 경우 민주주의는 더욱 안정적으로 성숙될 수 있을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정권 교체는 지역적 차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동남아시아 전반에서 뚜렷해지는 권위주의화와 민주주의 쇠퇴 속에 이룩한 값진 변화이다. 싱가포르 등 주변국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마하티르의 복귀와 민주주의 진전은 아세안 등의 외교 무대에서의 말레이시아의 역할을 강화할 것이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아세안의 잊힌 역할이 부활하는데도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말레이시아 시민들이 선택한 희망연대 정권에게 '희망'을 걸어야 하는 이유이다.
한국은 아시아에 속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슈는 곧 아시아의 이슈이고 아시아의 이슈는 곧 한국의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아시아는 아직도 멀게 느껴집니다. 매년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아시아를 여행하지만 아시아의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낯설기만 합니다.
아시아를 적극적으로 알고 재인식하는 과정은 우리들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또한 아시아를 넘어서 국제 사회에서 아시아에 속한 한 국가로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2007년부터 <프레시안>과 함께 '아시아 생각'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필자들이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권, 민주주의, 개발과 관련된 대안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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