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형은 광주의 계엄군이었다

[기고] 누가 진정 광주의 가해자였는가

그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난 동네 형이었다. 나보다 3살 위인 그를 나는 어려서부터 '형'이라고 부르며 항상 따라다녔다. 그는 마음이 착하고 순해서 동네에서도 칭찬이 자자한 아이였다. 우리 어머니도 어린 시절 그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아무개는 어쩌면 그렇게 착한지..."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는 또래 친구보다 키도 크고 몸도 건장했다. 그래서 그런 듬직하고 항상 다정한 그를 나는 친형처럼 따라다녔던 것 같다.

홀어머니 사이에서 생활이 넉넉하지 않았던 그는 197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비가 면제인 국립 2년제 전문학교에 당당히 합격했고 그래서 그런지 학교생활도 아주 열심히 했다.

1978년 전문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마치고 그는 직장생활을 몇 개월 하다가 군대에 입대했다. 체구가 좋은 그는 군대에서 하사관으로 차출되어서 군생활을 하다가 1981년 무사히(?) 제대했다.

나는 1979년 대학입학, 1981년 군대입대, 1984년 군 제대 후 바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1976년 그가 전문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우리는 거의 10년이 넘도록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1987년 6월 10일 항쟁 전 시국이 어수선 할 때였다. 약 11년 만에 그를 퇴근길 저녁 우연히 서울시내에서 마주쳤다. 둘 다 총각인 우리는 반가운 마음으로 한잔하기 위해 허름한 술집을 찾았다. 술잔이 몇 잔 오간 후 우리는 군생활이 어땠느니 하며 지나간 세월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술집에는 TV가 켜있었고 갑자기 TV를 흘끗 보던 형은 "전두환 개XX"하고 소리쳤다. 그때 뉴스시간에 전두환이 나왔던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나는 좀 당황했고 주변사람들도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때부터 그는 큰 소리로 "전두환 XXX"를 연발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의 눈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광기와 분노를 보았고 그것은 내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려서부터 그는 내게 항상 조용하고 온순한 동네 형의 모습으로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두환을 향한 그의 욕설이 심해지고 목소리가 높아지자 옆에서 술을 마시던 주객이 "임마, 좀 조용히 해라, 대통령을 그렇게 욕하는 놈이 어디 있나!" 하고 소리 질렀다. 금방 분위기가 험악해졌고 그와 주객은 서로 멱살을 잡고 소리치며 당장 주먹이 난무할 상황이었다. 그와 주객의 싸움을 말리느라 내 옷은 찢어졌고 그 와중에 옆자리 술상이 엎어졌으며 술집은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경찰 둘이 술집으로 들어왔다. 술집 주인이 신고를 한 것 같았다. 경찰을 보자 그의 얼굴은 갑자기 차갑게 굳어버렸다. 찰나이지만 나는 그의 얼굴에서 극심한 공포심을 보았다. 그가 그렇게 공포에 질려하는 모습을 나는 평생 처음 보았기 때문에 갑자기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고 아차 하는 순간, 그는 어느새 난장판이 된 술집에서 총알같이 튀어 나갔다. 그는 어둠 속으로 재빠르게 사라졌다.

그 형은 광주계엄군이었다

며칠 후 그는 내게 전화를 했다. 그날 술집에서의 일을 그는 정중하게 사과하고 한 번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어느 주말 오후에 조용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찻집에서 그는 내게 자신의 충격적인 군대생활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었고 그 후 삼청교육대 교관을 하다가 제대했다. 다음은 그날 그가 광주계엄군으로 자신이 겪은 경험을 이야기 해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내가 광주에 투입되기 전 상관들은 광주에서 반정부 반란군이 도시를 점령하며 시위를 하고 있고 그들은 모두 '빨갱이'나 좌경분자들이라고 했다. 신문이나 뉴스를 볼 수 없는 우리들은 상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그런 '빨갱이들'에 대해서 자연히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광주에 투입된 우리들은 총에 대검을 끼고 실탄을 넣었다. 비록 상관의 명령이었지만 나는 그 대검으로 '빨갱이'들을 찌르고 군중을 향해 사격을 했다. 잡혀온 '빨갱이'들은 개처럼 두들겨 패고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겼다. 진압봉과 개머리판 그리고 군화발로 온 몸이 시커멓게 피멍이 들도록 때렸다.

처음에는 길가에 서 있던 시민들이 우리 군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항의하는 사람들도 몇 몇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이 실제 사람을 패서 죽이고, 총으로 쏴서 죽이고, 대검으로 찔러서 죽이는 것을 몇 번 보는 순간부터는 감히 항의하는 시민도 없었다. 서로 눈치만 보며 우리를 무서워하며 그저 바라만 보았다.

잡혀 온 수백 명의 남녀노소 '빨갱이'들은 넓은 공터에서 우리들에게 사정없이 맞고 짓밟혔다. 그들은 우리들이 시키는 대로 시궁창을 기었다. 오리걸음으로 선착순을 반복했고, 그중에서 늦은 '빨갱이'들은 군홧발과 진압봉으로 죽도록 맞았다.

나는 광주시내 여기저기서 죽어 넘어져 있는 시신도 여럿 보았다. 어떤 군인들은 "전라도xx들은 다 죽여야 해"라고 떠들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감히 빨갱이들이 대한민국에서 활개치고 다녀" 하며 잡혀온 민간인들에게 심한 분노와 증오를 품었다.

한 번은 밤에 어디서인지 모르는 방향에서 갑자기 날아오는 돌에 맞아 전우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도 했다. 이 일로 '빨갱이'들에 대한 우리들의 분노와 적개심은 더욱 커갔다. 그 후 우리 손에 잡히는 '빨갱이'들을 더욱 무자비하게 죽였다. 사방에서 터지는 총성과 최루탄가스 연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리는 고함, 비명, 절규들은 생지옥을 연상하게 했다.

우리들은 물이 없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면도도 하지 못했고 그럴수록 이런 상황을 초래한 '빨갱이'들에게 극심한 분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전우 중에는 지난 밤 몇 놈을 대검으로 통쾌하게 찔렀노라고 자랑삼아 말하던 이도 있었다."

삼청교육대 교관이 된 그 형

그는 광주에서의 성공적인 '빨갱이' 진압 후 보너스와 훈장의 종류인 '국난극복기장'을 받았다. 그리고 3개월 후 그는 1980년 8월 이제 막 만들어진 삼청교육대의 교관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아래는 삼청교육대에서 그의 교관 생활을 정리한 것이다.

"삼청교육대에 보내지기 전 나는 '교육생들'은 깡패, 조폭, 포주, 범죄자, 전과자. 인간말종, 인간쓰레기들로 훈련을 통해서 그들을 교화시키고 사람으로 만들어줄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고 교육받았다. 그래서 훈련을 시키다가 교육생들이 설사 부상을 당하거나 심지어 죽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상관들은 말해 주었다. 그래서 당시 20대의 나는 50대의 아버지 세대 교육생들도 개 패듯이 팼다.

삼청교육대에서 교관들은 교육생들에게 하느님과 같은 존재였다. 우리가 교육생들에게 셰퍼드에게 주는 개밥을 개처럼 입으로 먹으라면 그들은 먹었다. 또 교관의 구두를 혀로 핥으라면 그들은 핥았다. 겨울에는 눈이 쌓인 연병장 위에 술병을 깨 유리 조각을 뿌리고는 팬티 바람으로 눈 위에서 구르게 하면 그들은 굴렀다. 그들이 구를 때 몽둥이로, 기는 교육생의 팬티만 입은 몸을 사정없이 내려치는 교관도 있었다. 그렇게 서너 시간 지나면 연병장은 시뻘겋게 변해버렸다. 그래도 아무도 불평하는 교육생이 없었다. 아마 불평하면 맞아 죽었을 것이다.

교육은 새벽 6시부터 구보로 시작하고 포복 훈련을 시켰다. 땅바닥에 머리를 박는 기합인 '원산폭격'을 수시로 시켰다. 행동이 늦는 교육생들은 양동이에 물을 퍼다가 머리를 집어넣었고, 반항하면 몽둥이로 때리고 군화발로 짓밟았다. 교관들이 이렇게 할 때 상관들이 다 쳐다보며 희희낙락하고 즐거운 듯이 박장대소했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물론 상관들도 무감각해지고 죄책감도 없어지는 것 같았다."

1981년 광주계엄군과 삼청교육대 교관으로 군대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그는 한동안 자신이 나라를 위해 애국한 훌륭한 군인인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는 자신의 '죄악'을 깨달아갔고 그 시간들이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그는 삼청교육대 교육생 들 중엔 나이 어린 중, 고등학생도 있었고, 주로 부모가 항의할 여력이 되지 않는 저소득층 자녀가 많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고 했다.

그 후 1990년대 내가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결혼하여 서울 강남의 어느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형수가 직장생활을 하고 그는 집에서 아기를 보고 있어 나는 낮에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그는 삼청교육대에 대해서 새로 발견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야기 해주었다.

"삼청교육대 교육생 중엔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노동운동을 한 노동자들, 몸에 문신이 있는 사람들, 당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전과기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끌려온 사람들, 정부에 비판적인 종교인들, 계엄당국의 보도검열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끌려온 당시 충주MBC 사장이었던 유호 씨(2007년 작고), 군장교 출신 코미디언 이기동 씨 등 수많은 죄없는 사람들이 삼청교육대에서 교육 받았다는 것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과거에 내가 광주와 삼청교육대에서 저지른 죄악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요즘 밤잠을 제대로 못 잔다."

이외에도 삼청교육대에 끌려온 사람들 중엔 당시에는 통금시간이 있었는데 술 취해서 통금시간 어겼다가 끌려가기도 했고 심지어 대낮에 길 가다가 걸린 불심검문에서 신분증을 집에 놔두고 나왔다는 이유로 잡혀가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 1982년 국방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삼청교육대의 총 사망자는 57명으로 질병 36명, 구타 10명, 총기사고 3명, 안전사고 2명, 자살 2명, 미상 1명이다. 지난 노태우 정권 당시 삼청교육대 피해사례 접수를 시작했을 때 접수된 추가건수에 따르면, 군부대내 사망 54명, 후유증 사망 397명, 부상 및 상해 2786명의 추가 피해자가 있었다. 노태우 정권은 이에 대한 보상 및 명예회복을 약속했으나 지키지 않았다. 또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내건 단체 소송은 "시효가 지났다"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국가 폭력의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인 그 형

그 후 나는 광주계엄군이었고 삼청교육대 교관이었던 그를 다시 못 만났고 지금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것은 어린 시절 그렇게 착하고 다정했던 형이 그렇게 광기와 공포로 점철 지워진 세월을 혼자 속으로 숨기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전두환 정권 시절 국가폭력의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피해자'다. 언론이 통제된 상황에서 군에서 상관이 주는 일방적 정보에만 의지해서 그는 '빨갱이'을 죽였고, '인간말종'을 교육시킨 것이다. 그러나 제대하고 세월이 흘러서 그는 진실을 알고 너무나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이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다. 지난 2010년 11월 이명박 정권 시절 이명박이 임명한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이영조는 미국에서 열린 국제학회에서 "제주 4·3은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한 폭동, 광주 5·18은 민중반란"이라고 폄훼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두고 민주화단체 등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민중반란', 제주 4·3항쟁을 '공산주의자가 주도한 폭동'으로 규정했다며 이영조 씨에게 크게 반발했다. (☞관련기사 바로보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12년 3월 9일 16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이영조를 강남을 국회의원 후보에 공천했다. 그러나 광주시민과 제주도민을 비롯한 국민들의 반대 여론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2012년 3월 13일 이영조는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현하여 "5.18재단에서도 광주민중반란(Gwangju Popular Revolt)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상직 5.18 민주유공자 공법단체 설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은 그해 3월 14일 PBC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이상도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5.18 기념재단에서는 'May 18 Democratic Uprising'이라는 공식명칭이 있고 가끔 'Gwangju Uprising'이라고 한다"며 "'revolt'라는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이영조 씨의 거짓말을 반박했다.

그리고 이 반박 때문인지 같은 날인 2012년 3월 14일 당시 정홍원 새누리당 공천위원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이영조 후보 공천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정 위원장은 "공천심사과정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점이 언론 보도로 논란이 됨에 따라, 해석에 따라서는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할 부분이 있다는 판단 아래 유감의 뜻을 표한다"며 "마음에 상처를 입은 분들께 죄송하다"고 말했다.

5월의 반란은 광주시민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몇몇 군 장성이 일으킨 것

캐나다 대학교의 도널드 베이커 한국학 교수는 "1980년 5월의 반란은 광주시민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몇몇 군 장성이 일으킨 것이다. 80년 5월 18일 전국적으로 계엄이 확대되는 것에 반대해 소수의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그 시위는 평화적인 것이었고 반란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시위대들이 자국민을 상대로 치명적 폭력을 저지른 군대와 마주쳤을 때 그 시민들이 정당방위로 저항한 것이다. 그래서 이영조 씨의 '반란'이라는 표현은 아주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바 있다. (☞관련기사 보기)

이영조는 <박정희 시대>라는 책의 공동저자다. 또,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시절 박근혜의 아버지 독재자 박정희를 비판적으로 평가한 진실화해위원회의 영문책자를 배포금지 시켰다. 이로 인해 이영조가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잘 보였을 것이고, 그 덕에 강남을에 공천을 받았을 것이라고 쉽게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해 11월 20일 이낙연 총리는 '제주4.3항쟁'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폭동',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반란'이라고 폄훼한 이영조를 총리자문기구인 시민사회발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과거 독립운동을 했다고 친일파 등용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나는 이낙연 총리가 이승만과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평생을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바친 함석헌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단점은 매사에 철저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는 과거사정리나 과거청산이 철저하지 못하면 비극적인 사건은 앞으로도 또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썩은 나무는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말이다.

지난 5월 1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참혹함을 알리기 위해서 당시 부상자들을 간호했던 차명숙(58세) 씨가 거리에 나왔다. 그는 "한 달 동안 손이 허리에 묶여 식사도 볼일도, 짐승처럼 해결했다. 흰 옷이 까맣게 되도록 짓밟혔다"며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연행돼 고문과 잔혹행위를 당한 사실을 폭로하고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반란'으로 폄훼한 이영조는 지금 이낙연 총리의 자문위원이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관계, 북의 비핵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운동을 펼쳐 가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구시대의 적폐청산을 소홀이 하고 적폐에 인물을 다시 재기용하고 있는 것이 결코 용납되어선 안 된다. 적폐청산을 하지 않고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하는 것은 과거 "반민특위"를 통한 친일파청산을 할 수 없었기에 겪어야 했던 민족의 불행에 슬그머니 눈을 감는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영조 국정자문위원 해촉을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시작한다. 이를 통하여 씨알(촛불, 풀뿌리, 민중, 민초)들이 나서야 한다. 이영조 국정자문위원 해촉 국민청원운동에 독자들의 많은 동참을 바란다. 많은 독자들이 이 국민청원에 동참하여 반드시 광주시민을 능욕하고 민주화운동을 폄훼한 자를 시민발전위원에서 끌어내려 더 이상 적폐의 짓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응징해야 하지 않겠는가! "역사를 멸시한 국민은 역사로부터 멸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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