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4주기가 다가온다. 벚꽃만 피어도 가슴 한편이 시큰거리고, 거짓말과 발뺌으로 일관하던 인물들이 떠오르면 울화가 치미는 것도 그대로인데, 올해는 정부가 주관하는 합동영결식이 치러질 예정이다. 합동영결식은 희생자와 그 가족들을 위한 의식이기도 하겠지만, 세월호 참사에 연루된 우리 모두를 위한 의식이기도 할 것이다. 영원히 헤어진다는 게 가능할까마는, 이별도 숙제라면 4주기의 다짐은 무엇이어야 할까?
4주기를 맞는 지금
3주기에 우리는 '박근혜는 내려오고 세월호는 올라온' 모습을 확인했다. 참사의 진상규명에 대한 기대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거대한 전환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어진 촛불대선에서 시민들은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는데, 그는 당선이 확실시된 순간 광화문으로 나와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났다. 정부든 국회든 사법부든 생명과 안전을 강조하는 모습이 두드러지고, 헌법에 생명에 대한 권리와 안전하게 살 권리를 명문화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폭넓은 합의가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죽음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30일 100일이 된 제천 화재 참사를 기억해보자. 당시 스포츠센터 건물 2층에 있던 사람은 모두 불이 아니라 연기 때문에 죽었다. "유리창만이라도 깨줬더라면"이라는 탄식은 "퇴선 명령만 있었더라면"이 아직도 진행 중임을 깨닫게 했다. 유가족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모두가 함께 아파하던 시기가 지나면, 진상규명 과정에서는 배제되기 십상이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는데 끝났다 하고 주위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냐고 물어온다. 모든 것이 그대로다.
세월호 참사는 각자의 삶을 짓는 터전이라 믿었던 지반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사건이었다. '모두가 지켜보는데도 내가 버려진 채 죽어갈 수 있다니….' 세월호 참사는 사회의 붕괴를 경험하게 했던 만큼 사회의 재건을 숙제로 남겼다. 지금까지로 본다면 한국사회가 생명과 안전을 재건의 기치로 올린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누군가 위험에 처했을 때 목숨을 구할 줄 아는 사회, 누구도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줄 아는 사회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생명과 안전을 지킬 방법을 찾고 익혀야 한다.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추궁해야
방법을 찾는 데에 '인권'이 길잡이가 된다. 생명과 안전이 권리임을 확인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생명에 대한 권리가 명시되진 않았지만 누구도 생명이 기본적 인권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권리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국가가 모를 뿐이다. 이제 방법을 알아야 할 때라면 국가의 의무에 대해서도 확장된 접근이 필요하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익숙한 방식은 형사법적 접근을 따른다. 규정을 지키지 않은 것이 '죄'로 구성되고 '벌'에 처해진다. 세월호 참사에서 해경123정장을 비롯하여 해경 지휘부 누구도 현장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거나 퇴선 안내 및 유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경123정장을 제외하고 아무도 벌을 받지 않았고 누구도 잘못을 빌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에서 생명권 보호 의무 위반이 아니라는 결정 역시 같은 한계에 멈춰 있다. 정해진 것을 어기지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 의무만 판단하는 방식이다.
유럽인권재판소의 판례들은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모색하는 데에 참조가 된다. 몰타 국영 조선소 수리공들이 오래 동안 석면에 노출된 사건에 관해 재판소는, "최소한 1970년대 초부터는 석면에 노출된 환경에서 근무하는 조선소 수리공들의 위험에 대하여 알았거나 알았어야 했"다고 지적하며 그 이후 아무런 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의무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피해자가 위험에 처한 사실이 알려진 후에야 국가에 의무가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수준에서 알려졌어야 할 때 알지 못한 것부터 의무 위반이라는 것이다. 해경 지휘부의 '배 안에 그렇게 사람이 많은 줄 몰랐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다. 책임져야 할 수많은 잘못 중의 하나다.
2005년 터키에서는 미숙아로 태어나 호흡곤란을 겪는 신생아가 공립병원들이 서로 치료를 떠넘기던 중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병원은 그 부모에게 치료 장치가 없다, 치료센터에 자리가 없다는 등의 변명을 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국가의 의무 위반이 아기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판단했다. "병원 상호간의 협력 부족, 신생아 센터 내에 장비의 불충분(인큐베이터 고장), 응급의료검사의 부재"라는 상황이 문제였고, 결국 아기는 "적절한 응급치료에 대한 접근을 박탈당한 점에서 병원 서비스 장애의 희생자"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도 적절하고 유효한 긴급구조에 대한 접근을 박탈당한 사건이다. 국가가 생명과 안전을 보호할 의무를 위반했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해경 지휘부를 비롯한 재난 컨트롤타워의 재수사는 필수적이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위와 같은 실체적 의무뿐만 아니라 절차적 의무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린다. 절차적 의무란 사건 발생 후 그 원인과 관련 기관의 책임을 묻는 조사가 제대로-즉각적으로/유의미하게/효율적으로 등- 이루어져야 함을 말한다. 생명과 안전이 권리라면 불충분한 조사, 서두른 종결, 지연된 배상 등도 의무 위반이라는 것이다. 억울한 죽음의 이유를 밝힐 줄 아는 사회가 생명과 안전을 보호할 줄도 알 것이므로, 절차적 의무는 본질적이다. 세월호 참사 관련 기록의 은폐, 진상규명 방해, 특조위 해산 시도 등을 끝까지 밝혀내는 것은 진상규명과 무관한 정치보복이 아니라 진상규명 그 자체의 요소다.
피해자는 권리의 주체
국가의 의무를 더욱 적극적으로 밝히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 번 환기되어야 할 것이 피해자의 권리다. 1기 특조위의 강제해산 경험을 딛고 다시 세워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도 이 점을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첫 회의에서 장완익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들은 민원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루는 참사의 당사자이자, 특별조사위원회의 또 다른 구성원입니다." 진실과 정의에 피해자가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인권의 중요한 원칙이다. 그러나 아직 한국사회는 피해자를 권리의 주체로 대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다.
'유가족'이 사회에 등장할 때 사람들은 동정을 보낸다. 유가족이 호소하는 피해를 함께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동정은 혐오의 이면이기 쉽다는 말은 여기에도 들어맞는다. 사회는 사건의 배경화면 정도에 유가족의 위치를 지정해준다. 너무 빨리 웃어도 안 되고 너무 오래 울어도 안 된다. 알려주는 만큼만 궁금해하고 쥐어주는 만큼만 감사히 받아야 한다.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은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여러 사건의 유가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방송이다. 그/녀들은 전혀 다른 사건을 겪었지만 마치 같은 일을 겪은 것처럼 서로의 마음을 헤아린다. 그만큼 한국사회가 한결같다는 증거다.
"피해를 입은 사람이기 이전에 권리를 보유한 주체"로서 유가족을 만나는 연습이 필요하다. 유가족은 정해준 자리에 있어야 할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유가족은 생명과 안전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한 희생자를 대신해 권리의 회복을 요구하는 사람이자,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참사를 겪은 피해생존자다. 그리고 어떤 설명에도 앞서, 한 사람이다.
죽음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회일수록 피해자를 권리의 보유자가 아니라 민원인으로 취급하게 된다. 피해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생명과 안전이 과연 권리로 자리 잡았는지, 국가는 의무를 깨달았는지 진단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피해에 대한 호소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인권 현실에 대한 고발로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녀들이 있는 곳이 진실과 정의의 자리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녀들이 모든 걸 알기 때문이 아니다. 한 사람을 애도하고 그리워하기 위해 진실과 정의를 경유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인권을 약속하자
재난참사에서 인권에 기초한 접근은 매우 중요하다. 인권 무시나 차별의 관행과 법제도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재난참사의 위험에 취약하게 만든다. 또한 재난참사가 발생했을 때 구조에서부터 회복에 이르기까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실현하는 전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인권의 증진을 목표로 삼고 실현할 방법을 찾아내 익히는 만큼, 재난참사는 덜 발생하고 덜 지속된다. 생명과 안전을 강조하며 자칫 사람들을 보호나 통제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릴 가능성도 경계할 수 있다.
4주기 합동영결식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들의 다짐도 희생자들의 영전에 바쳐질 것이다. 그들은 다시금 생명과 안전을 강조하며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할 텐데, 시민으로서 우리는 어떤 다짐을 해야 할까? 당신들의 약속보다 더 오래 갈 인권의 토대를 세우겠다는 다짐을 해보면 어떨까? 우리 스스로 인권의 주체임을 잊지 않고,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밝히기 위한 진상규명 운동에 다시 신발끈을 묶어야 할 때다.
*유럽인권재판소의 판례는 다음 자료를 참고하고 인용했습니다. 김성진, 국가의 국민 안전보장의무: 유럽인권재판소 판례를 중심으로, 공익세미나 <국가의 국민 안전보장의무:세월호 참사 이후 법적 논쟁>(2017.7.11)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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