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역사를 보면, 당쟁이 끊임없이 지속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도대체 왜 당쟁이 그토록 극심했을까?
일제 식민사관은 당쟁의 원인을 우리의 '민족성'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필자는 당쟁이란 근본적으로 자원 부족이라는 조선시대의 객관적 조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판단한다. 당시 기본적으로 자원이 부족하고 먹을 것도 부족하며, 또 벼슬자리도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렇게 한정된 관직을 놓고 정치 세력 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으니 이것이 곧 당쟁이었다.
지금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니 사회에 대한 기여와 남에 대한 배려보다 '우선 나부터 살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이 앞설 수밖에 없다. 더구나 치열한 경쟁 구조에서 패자부활전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고 한번 실패하면 두 번 다시 재기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전개된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사회보장 시스템도 갖춰져 있지 않다. 결국 우리 사회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만 적용되는 살벌한 정글로 전락했다. 이러한 구조에서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는 자취를 감추었고 반목은 극심해졌으며, 민주주의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부의 독점과 만연한 부패
그러나 사실 현재 우리의 경제 조건은 조선시대와 비할 바 없이 성장을 이루었고 부도 축적했다. 하지만 '상대적' 의미에서의 자원 부족 현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성장한 경제와 축적된 부가 소수에게 집중, 독점됐기 때문에 여전히 상대적인 자원 부족과 경제적 여유의 결핍 현상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 결핍'은 '절대적 결핍'에 비해 경시되기 쉽지만, 최소한 심리적 범주에서 당사자로서는 오히려 그로 인해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받게 된다. 특히 사회 갈등의 측면에서 상대적 결핍은 절대적 결핍보다 더한 갈등 요인으로 작동된다.
이렇듯 '상대적으로 불균형한' 사회를 만드는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다. 우리나라가 아프리카의 르완다보다 부패국가로 지목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박근혜 시대에 이뤄졌던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실상에 대한 보도가 매일같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부패의 고리는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각급 공공기관에서 사시사철 계속되는 각종 공사에서는 언제나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또 공공기관에서 도무지 제한이 없이 이뤄지는 조직 확대를 비롯해 효과는 전혀 없는 각종 공무원 연수와 파견 등은 모두 국민의 혈세로 진행되는 것들이다. 최근에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각종 특수활동비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독립적인 회계감사원 설치로 부정부패를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사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공기관의 감사시스템은 유명무실, 거의 작동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가재는 게 편"으로 감싸고 은폐에 급급하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통령 직속기구의 위상을 지닌 감사원이 감사의 직책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국 의회에는 회계감사원(GAO)이 설치돼 정부 예산을 사용하는 모든 사업과 활동을 조사한다. 미국에서도 회계감사원 설치에 소요되는 비용 문제로 비판이 없지 않았지만, 이 기구를 설치하는 비용보다 회계감사원의 철저한 회계감사에 의해 절약되고 방지되는 예산이 10배 이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우리 사회도 의회에 소속되거나 혹은 독립적 기관으로서의 회계감사원을 하루바삐 설치함으로써 만연한 부정부패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민주주의란 권력에 대한 대중적 통제가 핵심
공무원이란 영어로 'public servant'로서, 문자 그대로 국민을 위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며, 한자어로는 '국민의 종'이라는 뜻의 ‘공복(公僕)’이다. 우리 헌법 제7조는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민들이 정부 조직에 대해 감독을 하는 것은 국민들이 당연히 보유한 기본적인 권리이다. 국민의 감독 의식이야말로 권력 기제를 견제하는 정신적 보장이며, 국가권력이 국민의 감독을 받는 것은 국민주권 원칙의 핵심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국민이 '공복'인 공무원 관료 집단을 견제할 제도와 수단이 사실상 주어져 있지 않다. 거꾸로 아무런 통제 수단을 지니지 못한 채 항상 '을'의 위치에 놓여 있을 뿐이다. 반면 관료 집단은 견제장치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조건에서 자신들의 영토를 소리 소문 없이 수호하고 계속 확대시켜나간다. 때로는 시행령으로 상위법을 무력화시키는 위법도 서슴지 않는다. 곳곳에서 직권의 남용이 범람한다. 그러나 직권남용죄란, 우병우를 직권남용죄로 잡기 어려운 현실에서 알 수 있듯, 큰 고기는 대부분 빠져나가고 겨우 송사리만 걸릴 정도의 엉성한 그물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행위의 책임성(accountability)과 투명성(transparency)은 민주주의의 핵심적 요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성과 투명성은 치자와 피치자로 구분되는 현대 국가체제에서 각종 권력행위가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한 최우선적 고려사항이 된다. 여기에서 민주주의란 대중들이 자신을 지배하는 지배자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 즉 어떤 권력행위에 대해서도 대중들이 감시·평가하며 그에 상응하는 판단과 행동을 내릴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해 민주주의란 권력기관과 권력행위에 대한 대중적 통제를 핵심적 요소로 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 대중들은 권력에 대한 아무런 통제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법왜곡죄' 신설로 권력에 대한 시민의 통제 가능해야
독일 형법 제339조는 "법관, 기타 공직자 또는 중재인이 법률사건을 지휘하거나 재판함에 있어 당사자 일방을 유리하거나 법을 왜곡한 경우에는 1년 이상 5년 이하의 자유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법왜곡죄'다. 독일을 비롯해 스페인, 노르웨이, 중국 등 적지 않은 국가에서 이러한 법왜곡죄를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재판 과정만이 아니라 법 집행 과정에서 허다한 왜곡 현상이 발생하고 그 고통이 고스란히 대중들에게 전가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처벌 대상을 판사, 검사로 국한시키는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이고 대중들의 법 감정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적용 범위를 법률 집행기관까지 확대해 법왜곡 행위 조항을 적용하는 것이 전체 사회의 법왜곡 현상을 바로잡고 국민이 소망하는 법적 정의를 실현하는 방안이라고 판단된다. 법왜곡죄 신설은 권력기관 및 권력행위에 대한 대중적 통제의 출발점으로 작동될 수 있다.
법왜곡죄의 대상을 사법부만이 아니라 법률 집행기관을 포함하게 되면 그 대상 범위는 경찰이나 각 부처 민원부서까지 대폭 확대된다. 이는 '김영란법'처럼 우리 사회 전체 시스템의 커다란 변화까지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 사회에서 언제나 '을'의 위치에만 놓일 수밖에 없었던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방어적 장치를 제공함으로써 오만한 권력기관과 권력행위를 통제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고 국민의 입장에서 '법적 정의' 실현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 그럴 때 비로소 공무원을 왜 공복(公僕)이라고 하는지가 입증될 수 있고, 만연한 부정부패 역시 대폭 줄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국민주권의 민주주의를 실제로 이뤄내기 위해 법왜곡죄 신설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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