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식 문화관광해설사의 숨은 문화재를 찾아서

명성황후바위와 요박골

■명성황후바위(최송설당바위)


▲명성왕후 바위라 불리는 최송설당 바위 ⓒ프레시안 이철우
지금으로부터 17,8년 전 함안군에 살면서 ‘함안 아라가야향토사연구회’에 활동하던 나는 연구회 부회장님인 전직 교사 배종대 선생님으로 부터 화왕산 잣골에 명성황후 바위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귀가 번쩍 뜨여 나는 명성황후 바위의 정확한 위치를 물으니, 도성암 건너편 으악새산장(현 화왕산장) 하도암씨를 찾아가면 안내해 줄 거라 귀띔을 해주었다.

며칠 후 하도암 선배님을 찾아가 물으니 웃으면서 나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숲을 헤쳐 길을 안내해 주며 설명까지 해주셨다.그렇게 나는 최송설당 바위를 만났다.

10여 년 전 귀향하여 해설사 활동을 하며 바위근처를 지날 때 마다 눈길을 주고, 동료가 있을 때는 명성황후바위에 얽힌 이야기와 어두운 을미사변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곤 한다.

이제는 잣골을 찾는 이들에게 불행한 근현대사에 숨겨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열어보고자 한다.

명성황후 바위는 배바우산장 100여 미터 아래 잣골 중턱에 있는 큰 바위를 말하며 바위 전면에는 세로로 崔松雪堂(최송설당)으로 새겨져 있다.

글자는 가로×세로 60cm정도로 크게 새겼는데 일제강점기인 大正4年(1915년)에 이동로(李東魯)라는 사람이 새겼다는 명문이 남아있다.(大正 乙卯春李東魯)

이동로라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왕가의 후손이라 짐작된다.

창녕 사람들은 이 바위를 명성황후바위, 최송설당바위라 부른다.

하도암선배님의 말씀에 의하면 최송설당은 고종황제에게 조선의 영험한 8대명산(백두산, 묘향산, 금강산, 속리산, 오대산, 지리산, 북한산, 화왕산)에서 명성황후의 혼(魂)을 위로하는 제(祭)를 모셨으면 하는 주청을 드려, 고종황제의 밀명으로 제를 모셨던 곳 중의 한곳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이곳을 알려 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화왕산은 비록 높은 산은 아니지만 예부터 음기(淫氣)가 강하고 영험(靈驗)이 있어 무당들이 많이 찾는 샤머니즘(Shamanism)의 성지(聖地)로 알려져 있다.

이곳 외에 최송설당 글자가 새겨진 바위는 속리산 법주사 복천암, 북한산 백운동계곡 근처(1915), 김천 청암사(1920년경)까지 3곳이 더 있어 모두 4곳이 확인되었다.

이 바위의 존재는 한민족 오천년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고종 32년(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된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고 불태워진 명성황후의 원혼을 달랜 피맺힌 장소다.

한편 고종(高宗, 1852.9.8~1919.1.21)은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1863~1897)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1897~1907)다.

불행히도 대한제국은 10년 만에 한일합방(1910년)으로 망하고 고종황제는 왕으로 격하되어 강제로 유폐되었고, 1919년 1월에 승하한 비운의 왕이었었다.

유럽에서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 인기다. 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을 일컫는 말이다.

대표적인 다크 투어리즘 장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약 400만 명이 학살당했던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이다.

훌륭했던 역사는 계승 발전시키고 불행했던 역사는 만천하에 드러내고 알려 대대손손 교훈을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행한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최송설당 여사

▲최송설당 여사
바위에 새겨진 최송설당(1855~1939)은 개화기 선각자 여성교육자이다.

1885년 경북 금릉에서 아버지 최창환과 어머니 경주 정씨 사이에서 무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나 1939년 84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본관은 화순(和順)이고 대대로 평안도 선천에서 세거하였는데 그의 증조부 대에 홍경래의 난을 만나 외가 쪽이 연루돼 증조부와 조부가 억울하게 죽고 아버지가 전라도 고부로 피해 전전하다가 김천으로 옮겨와 정착했다.

최송설당이 어떤 과정을 거쳐 궁으로 들어가 고종의 보모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여러 기록으로 유추해 보면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고 부를 어느 정도 이루어 지방에서는 제법 알려진 부자였을 때 어려웠던 엄비를 만난 것으로 짐작된다.

아버지가 죽고(1886) 이어 남편과도 사별하자 불교에 귀의했다고 하며, 이때쯤 최송설당이 엄비와 만났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1895) 후 1896년 엄비를 따라 상경해 궁에 들어가 영친왕의 보모가 됐고, 영친왕을 낳고 힘을 얻은 엄비의 도움으로 자기 조상의 누명을 벗기고, 조카들을 벼슬길에 나가게 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송설당은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한편 금릉학원에 기부금을 내는 등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그녀는 전 재산을 희사하여 재단법인 송설학원을 설립하고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개교하여 오늘날의 김천중학교와 김천고등학교로 발전되었다.

시문에 능하여 200여 수의 한시와 60여 수의 국문시가를 남기고 있으며, 저서로는 『최송설당문집』(1922년)이 있다.

■우장춘박사의 씨없는 수박 시배지


▲경남 합천군 덕곡면과 고령군 우곡면을 가르는 낙동강 회천 일원에 위치한 무심사 ⓒ프레시안 이철우
이방면 송곡리 무심사 앞에 경남 합천군 덕곡면과 경북 고령군 우곡면을 가르는 회천(會川)이 낙동강에 흘러드는 곳이다.

강 건너 고령군 우곡면 객기리 낙동강변은 을미사변때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에 가담한 훈련대장 우범선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우범선(禹範善)은 1895년의 을미사변 비극 때 '조선군 제2 훈련대대장'이었다.

명성황후의 시해를 목숨 걸고 막아야 할 훈련대장이 길을 안내하고 불에 탄 황후의 시신을 수습하라고 지시했다.

그 사건 얼마 후 우범선은 조선왕실로 부터의 보복이 두려워서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여성과 결혼했다.

아들을 낳고 신혼생활을 한 것도 잠깐 큰 아들이 6살 되던 초겨울 밤에 독립협회 간부이자 개화파의 동지인 고영근의 집들이에 유인되어 암살당한다.

훈련대장 우범선이 남긴 6살짜리 아들은 일본인 홀어머니의 헌신으로 훗날 유명한 농학자 '우장춘(禹長春)'박사로 성장한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조용히 불러 을미사변에 가담한 아버지의 죄상을 밝히며 너는 아버지가 지은 죄를 조금이라도 속죄하는 마음에서 조선으로 돌아가서 나라에 헌신하라고 설득한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평생 아버지의 매국(賣國)을 속죄하는 마음 조국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우장춘 박사는 대한민국 육종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의 생애 62년간은 아버지 '우범선'에 대한 치욕을 속죄하는 듯 한 삶이었다고 한다.

조국에 건너온 우장춘박사는 제일먼저 '씨없는 수박'을 생산하여 자신을 알린다.

우장춘박사가 처음 씨없는 수박을 재배한 곳이 무심사(無心寺) 건너편 고령군 우곡면 객기리 옛 손터나루(객기진나루)가 있었던 낙동강변이다.

혹 무심사나 섬들(옛 고방장터)에 가시는 분들이 계시면 우장춘박사와 명성황후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요박골과 석불사(石佛寺)

요박골(禮拜谷)은 화왕산의 서편골짜기인 관주산과 성지산 아래의 계곡을 말한다.

요박골, 오박골, 여박골, 요배곡, 예배곡 등으로 변화되었다. 예배곡은 사람들이 조용히 예를 드리고 제사를 지냈던 곳을 말한다.

골짜기 안에 절이 있었다고 하며 오래전부터에 언덕배기에 돌로 만든 작은 석불을 있어 절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절을 찾는 신도들이 많아 골짜기 입구에서부터 예배를 올렸다고 전한다. 지금은 석불사에 부처를 옮겨 보시고 있고 골짜기 입구에 요박골못과 옛 동헌 터가 있었다.

석불사는 1930년경 창건하였고 석불입상(石佛立像)은 원래 예배골 언덕위에 있었던 석불을 법당에 옮겨 놓았는데 지금의 석불사 명칭도 이로 인한다고 전해진다.

석불입상은 천년 동안 찾아오는 중생들의 괴로움을 말없이 들으며 위안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석불입상에 관련된 정확한 자료나 유래가 없지만 불신 뒤에 있는 광배(光背)에 아무 무늬도 새겨 있지 않아 단순하면서도 소박함이 엿보여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얼굴 일부가 약간 훼손, 마모되었으나 전체 모양은 대체로 뚜렷한 편이다.

불상의 높이 1.0m, 너비 0.8m로 서있는 소박한 입상(立像)으로 경남 문화재자료 제20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신라 말 고려 초는 혼란기에 지키고 힘들었던 백성들을 위로했을 것이다.

예전 노천에 있던 석불을 찾아와 자식을 얻기 위해서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기도한 사람들은 모두가 아들을 얻게 되면서 득남 기도도량으로 유명해졌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동헌(東軒)터와 퇴장유구(退藏遺構)

요박골 입구 과수원 일대는 예전부터 동헌의 터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신라가 창녕지역을 정벌한 뒤 신라 비자화군, 통일신라 화왕군(500년)-고려 창녕군(500년)의 동헌이 1,000년간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과수원 지하에는 주춧돌로 추정되는 반듯한 돌들이 줄지어있고 또 인근에 동헌새미라 불리는 우물이 현존하고 있어 동헌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2003년 7월 경남고고학연구소(최종규소장)는 산복도로 공사로 한호아파트 일대를 구제발굴을 하고 마무리 하던 중 지름 70cm의 구덩이 안에 놓인 쇠솥이 나왔다.

쇳조각을 걷어내자 그 속에는 500여점에 달하는 통일신라시대 금빛 찬란한 불교 공예품이 들어 있었다.

쇠솥 맨 위쪽에는 길쭉한 손잡이를 갖춘 병향로(柄香爐), 다리가 셋 달린 솥, 자물통과 자물쇠, 귀면 장식 문고리가 쌓여 있었고 그 아래쪽으로는 다양한 무늬를 유려하게 새긴 금동 제품 수백 점이 차곡차곡 채워져 있었다.

구덩이와 쇠솥 사이 빈 공간에서도 건물 추녀 끝에 매달았던 금동제 풍경이 19점이나 출토되었다.

모두 안압지나 황룡사지 출토품에 필적하는 보물급 문화재였다.

당시 최종규소장은 사찰에서 사용하던 유물이 땅속에 묻히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전란(戰亂)을 지목했다. 약탈과 방화로 사찰의 존폐마저 걱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아 후일을 기약하며 사찰 보물 가운데 일부를 땅속에 묻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학계는 이를 퇴장유구(退藏遺構)라 부른다.

보물을 묻었던 사람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되었을까 ?

영영 사라진 줄만 알았던 그 보물은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들을 만나며 여전히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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