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차명계좌는 왜 1994년 이후 급증했나

"이건희 차명자산, 삼성증권·우리은행 불법계좌 분산 은닉"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4조4000억 원대 차명자산에 대해 세금을 물릴 길이 열렸다. 금융위원회가 30일 이 회장의 차명자산을 '비실명자산'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금융실명제법에 따르면, 1993년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의 비실명자산에 대해서는 '차등과세'를 해야 한다. 이자와 배당소득에 대해 90%의 세율로 소득세를 물린다는 뜻이다.

이와 별도로, 증여세를 물릴 길도 트였다. 이 회장은 1987년부터 2007년까지 삼성증권, 우리은행 등 금융기관 10곳에서 차명계좌를 운용했다. 이들 계좌로 자산을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한 증여세가 제대로 납부됐다는 기록은 없다. 현행 세법은 자산의 실제 소유자와 명의자가 다른 경우엔 명의자가 그 자산을 실제 소유자에게서 받은 것으로 간주해 증여세(최고세율 50%)를 부과하도록 한다. 명의신탁이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경우는, 매 회마다 증여세를 부과하도록 한다. 따라서 증여세 규모는 조 단위로 추정된다. 다만 증여세 부과는 올해 말일까지 가능하다.

아울러 이 회장이 삼성그룹을 승계한 1987년부터 20년에 걸쳐 꾸준히 차명계좌를 개설한 배경에도 관심이 쏠린다. 차명계좌에 담긴 돈의 출처에 대한 궁금증이다.

이건희 차명자산에서 발생한 소득에 세금 물릴 수 있다


이는 모두 30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를 통해 드러난 사실이다. 이날 국감에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검찰 수사나 금융감독원 검사 과정, 국세청 세무조사 결과 차명계좌로 확인된 경우 비실명자산으로 본다"며, 최종구 금융위원장에게 이에 동의하느냐고 물었다. 이 회장의 차명자산 역시 조준웅 특별검사팀의 수사 결과로 확인됐으므로, 이에 해당한다는 취지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동의한다"고 대답했다.


이는 금융위원회가 준비한 답변이었다. 최 위원장의 발언 직후, 금융위원회는 보도자료를 통해 "금융당국은 사후에 객관적 증거에 의해 확인된 차명계좌는 차등과세 대상이라는 원칙을 유지해 왔다. 위원장의 답변은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차등과세 대상이 되는 차명계좌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유권해석을 하겠다는 취지"라고 밝혔다.


이 회장의 차명자산에서 발생한 이자와 배당소득에 대해 소득세를 물리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다.

금융위의 말장난, 자체 입장과 달랐던 유권해석은 나몰라라


그러나 이런 입장은 금융위원회의 옛 행적과 상충한다. 이 회장이 1987년부터 2007년까지 차명으로 관리한 자산 가운데 약 4조5000억 원이 2008년 조준웅 특별검사팀에 의해 드러났다. 당시 이 회장은 이들 자산을 실명 전환하고 누락된 세금을 내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 회장은 당시 드러난 차명자산의 거의 전부인 약 4조4000억 원어치 계좌를 해지하고 돈을 인출했다. 이는 명의 변경이며, 금융실명제법에 따른 실명 전환과는 다르다. 아울러 이 회장은 낸다던 세금도 내지 않았다.

이 회장에게 길을 열어준 건, 금융위원회의 유권해석이었다. 당시 금융위원회는 이 회장의 차명 계좌에 대해 "금융실명제에 따른 실명전환 대상이 아니다"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금융위원회가 2008년에 발간한 <금융실명제 종합편람>에는 "차명계좌는 당연히 실명전환 대상"이라는 판례가 실려 있다. 요컨대 당시 금융위원회의 유권해석은 같은 시기에 내놓은 자체 입장과 배치된다.

"위원장의 답변은 기존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라는, 금융위원회의 이날 발표는 옛 행적을 감추는 말장난에 가깝다. 최 위원장의 이날 답변이 <금융실명제 종합편람>에 드러난 2008년 당시 금융위원회의 입장과 통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2008년 당시 금융위원회가 자체 입장과 배치되는 유권해석을 해서, 이 회장에게 특혜를 준 사실은 감춘 발표였다.

"삼성생명 및 삼성전자 차명주식은 삼성증권 계좌에 있을 것"

금융위원회는 이 회장이 불법 운용한 차명계좌 1021개를 조사할 방침이다. 이 회장이 명의 변경만 하고 실명 전환하지 않았던 차명자산 약 4조4000억 원이 담겨있던 계좌다. 이들 계좌 내역 역시 이날 국정감사에서 드러났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들 차명계좌 1021개에 대한 금융감독원 자료를 이날 발표했다. 이 가운데 64개는 은행 계좌, 957개는 증권 계좌였다. 은행 계좌 가운데 대부분인 53개가 우리은행에 개설됐다. 삼성의 불법 차명계좌가 주로 우리은행에 개설된 사실은, 지난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 당시에도 알려졌다. 우리은행은 삼성의 주거래 은행이다. 증권 계좌는 대부분 삼성증권에 개설됐다. 그러나 금융실명제법 상의 비밀보장 조항 때문에 이들 계좌 잔액에 대한 구체적인 내역은 알 수 없다.

박 의원은 "2004년부터는 전적으로 삼성증권에만 차명주식 은닉이 집중됐다"며 "이건희 회장의 차명재산 중 삼성생명 차명주식과 삼성전자 차명주식은 삼성증권 내의 어떤 증권 계좌에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차명주식은 현행 법상 명의신탁 재산이며, 차명주식 실소유주가 명의인에게 이 주식을 증여한 것으로 봐서 증여세를 매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경우, "올해 말일까지 증여세 부과가 가능하다"라는 게 박 의원의 판단이다. 그는 공인회계사 출신 초선 의원이다.

이건희 상속 이후에도 차명계좌 만들어진 까닭?


이 회장이 차명으로 관리한 자산이 처음 공론화 된 건, 2007년 10월 김용철 변호사를 통해서였다. 삼성 구조조정본부에서 일했던 김 변호사는 삼성 수뇌부가 다양한 방식으로 회삿돈을 빼돌려 비자금을 만든다고 밝혔다. 이를 수사했던 조준웅 특별검사팀은 차명계좌의 존재만 밝혀냈을 뿐, 계좌에 담긴 자산의 출처는 밝히지 않았다. 회삿돈을 빼돌렸다면, 횡령 등에 해당한다.

박찬대 의원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이 회장의 차명계좌는 1987년부터 2007년까지 꾸준히 개설됐다. 이 회장이 삼성을 물려받은 1987년에만 개설된 게 아니라는 말이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는 매해 1~6개가 개설됐다. 그런데 이 회장이 신경영 선언과 함께 경영 전면에 나선 이듬해인 1994년에는 차명계좌 수가 42개로 늘었다. 그 뒤론 매년 두자리, 혹은 세자리 수였다. 가장 많이 개설된 해는 2004년이었다. 그 해에 삼성증권에만 141개가 개설됐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으로 삼성 비자금이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삼성 측이 흔히 했던 해명이 '차명자산의 정체는 상속자산'이라는 내용이었다. 적어도 회삿돈을 횡령해서 만든 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 회장의 상속 이후 십수 년이 지난 뒤에도 차명계좌가 계속 새로 개설된 사실은, 당시 삼성의 해명이 거짓일 가능성을 가리킨다. 상속자산을 관리하기 위해 차명계좌를 만들었다면, 이 회장이 삼성 그룹 장악력이 높아진 뒤에 차명계좌가 대폭 증가한 사실을 설명하기 어렵다.


차명계좌 속 자금이, 회삿돈을 횡령해서 만든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김 변호사의 양심고백, 그리고 당시 언론과 특별검사팀에 쏟아진 제보 내용과도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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