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한복 사랑'이 모독한 것

[함께 사는 길] '한복 체험'과 '체험 한복'은 도치된 같은 단어가 아니다

경복궁 서문과 코를 맞대고 있는 서촌 거리는 세 개의 큰 집단이 상권을 떠받치고 있다. 하나는 적선현대빌딩 등의 기업 사무실 직원들이다. 다른 하나는 정부서울청사, 서울경찰청, 금융감독연수원 등 관공서의 공무원들이다. 마지막은 경복궁과 궁내의 민속박물관, 미국대사관 옆의 역사박물관 등지를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이다. 직장을 이곳에 둔 사람들은 주로 이 거리 밥집들의 경기를 좌우한다. 그러나 이름난 식당들 외에도 각종 기념품점과 작은 옷가게, 화장품 가게, 편의점과 슈퍼 등 자하문로와 효자로의 상권을 지탱하는 것은 주로 관광객들이다. 시각적으로 그 사실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것이 한복이다.

한복의 부활과 '체험 한복' 대여점 난립

최근 서촌 일대에 가장 많이 늘어난 가게들은 한복을 빌려주는 대여점들이다. 효자로와 자하문로, 그리고 그사이의 작은 길을 한복을 입은 관광객들이 물결처럼 흘러 다닌다. 서울의 일반적인 동 하나 면적에 거의 10개가 넘는 동이 들어있을 정도로 오래된 작은 동네들이 모여 있는 터라 관광객들이 많지만, 그들의 길거리 한복 퍼포먼스는 단연 눈에 띈다. 경복궁 등 궁궐들은 한복을 입은 사람들을 무료입장을 시킨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관광객들에게는 궁궐과 한복 등 이른바 전통 체험을 한복 대여비용만으로 즐길 수 있으니, 한복을 빌려 입는 이들이 늘 수밖에 없다. 청소년들이 일으킨 '한복 입고 명소에서 인증 사진 남기기' 유행도 한복 대여점들을 도와줬다. 한복 대여점들은 4시간에 대략 1만5000원 정도의 결코 비싸다 할 수 없는 비용에 한복 한 벌을 빌려주는데, 최근 늘어난 대여점들은 경쟁적으로 값을 깎아준다. 한복 대여는 난립이 우려될 정도로 늘어난 대여점 자신들의 과당경쟁만 빼면 시대가 밀어주는 장사일 수밖에 없다.

ⓒ함께사는길(박현철)

시대가 한복을 밀어주기 시작한 최초의 사회적인 사건은 '88올림픽' 때였다.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의 성공으로 정권의 부족한 정당성을 메우고 싶었다. 올림픽을 치장할 수 있는 전통문화가 올림픽 퍼포먼스의 한 축으로 이용됐다. 한복은 중심 요소였다. 2017년의 한복 산업은 1988년 전후의 그것에 비해 절반에 불과할 정도로 한복 산업의 경기는 그때 정점을 찍었다. 이후로 한복 산업은 다시 혼례나 돌잔치 등 의례에 기댄 전통적인 매출 구조로 돌아갔다.

한복은 그사이 민간에 의한 자발적 유행을 두 번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다. 처음은 '개량한복'의 유행이었다. 90년대에 유행한 개량한복은 점차 사회운동을 하는 이들이거나 그들에게 동조하는 이들의 자기표현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굳어졌다. 패션은 입는 이의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지만, 주장을 위한 패션으로 전후가 바뀌었다고 대중들은 생각했다. 개량한복은 오늘날에도 살아남았지만, 한복의 주류가 되거나 그 옷을 입는 이들이 사회적 주류가 되지는 못했다.

그다음 2010년대에 유행하는 것이 바로 여행지나 명소에 한복을 입고 가는 '한복 체험' 유행이다. 이 유행을 일으킨 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이르는 청소년들이었다. 그들에게 한복은 다른 사람이 잘 입지 않는 '튀는 옷'으로 입으면 바로 군중으로부터 자기를 차별화시킬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청소년들은 SNS에 자신들의 한복 체험 인증 사진을 올리며 유행을 선도했다. 한복은 근대 이후 처음으로 자발적인 애호가들을 탄생시킨 것이다.

적폐들에게 납치된 한복 세계화

문화재청이 한복을 입은 이들에 대한 전면적인 무료입장을 결정한 건 2013년 10월이었다. 문화재청으로서는 과거 명절 등 특정한 날에 실시하던 프로그램을 연중 확장시킨 것이었지만, 청소년들이 일으킨 한복 체험 유행과 만나고, MBC <대장금>에서 시작된 일련의 한류 드라마 인기에 기댄 외국인 관광객들의 수요까지 겹쳐 이른바 '체험 한복' 유행을 확대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2013년은 저 1988년의 한복 관제 유행에 비길 만한 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식에 300만 원이 넘는 고가의 맞춤 한복을 입고 나왔고, 이후 해외순방길마다 다양한 한복 패션을 선보였다. 제도언론은 '전통문화를 세일즈하는 대통령'이라며 옷맵시를 칭찬하기 바빴다. 2013년 국회에 올라온 '2014 정부 예산안'에는 '한복진흥센터' 지원과 '한스타일' 육성지원 예산이 담겨있었다. 박근혜의 한복이 정책 사업의 일환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한복진흥센터는 2014년 3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부설기관으로 출범했다. 그리고 2014년 8월 박근혜 정부 문화 정책의 황태자로 유명한 차은택 감독이 대통령 소속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됐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그는 창조경제추진단장이자 문화창조융합본부장이 됐다. 그가 주도한 것이 적폐 몸통의 하나인 최순실의 '미르재단'과 연계된 문화창조융합벨트 조성과 운영이었다. 문화창조융합벨트의 2016년 예산은 7000억 원대에 이르렀다. 만일 박근혜-최순실-차은택 등 적폐 라인의 준동이 촛불에 의해 제지되지 않았다면, 그 예산 가운데 큰 몫이 이른바 '창조경제'라는 신기루를 따라 적폐 라인의 사복을 채울 눈먼 돈이 될 수도 있었다. 한복 관련 아이템은 문화창조융합벨트 사업 중에서도 'VIP 관심사업'이었다.

대통령의 복색에 대한 관심과 취향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될 순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정부의 사업과 정책이 될 경우는 그럴만한 시장의 유인과 사회적 명분이 있어야 정당하다. 박근혜의 한복 사랑이 모독한 것은 다름 아닌 자발적 한복 애호가로 역사상 최초로 한복을 스스로의 패션 언어로 선택했던 청소년들과 한복이라는 민족의 옷 그 자체였다. 청소년들의 자발적 한복 사랑이, 한복이라는 전통문화가 적폐세력에 의해 국가 예산의 사적 전유를 위한 수단 중 하나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적폐세력의 과두들은 촛불로 저지되어 구속됐지만, 그들이 남긴 사업은 이미 무고한 시장의 이해당사자들을 참여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일소될 수 없었다. 한복 사업의 경우도 적폐세력의 기획에 포함돼 있었을 뿐 한복 산업의 성장 그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성장을 지원해야 할 대상이 맞다.

촛불이 절정으로 타오르던 2016년 12월 문화창조융합벨트 사업들은 콘텐츠팩토리, 콘텐트인재캠퍼스로 개편됐고 지금도 콘텐츠기업 지원사업은 지속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적폐세력이 기획한 눈먼 돈 집행사업들이 얼마나 추려졌고 진짜 필요한 사업들만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검증은 아직 되지 않았다. 지금 시행되는 그 사업들이 결과를 내는 미래에나 평가는 가능할 것이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3년 2월 25일 취임식 당시 광화문에서 한복을 입고 '오방낭' 행사를 가졌다. 비선실세 최순실 씨가 행사를 기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거리 풍경 속 한복의 미래

한복은 여전히 생활의례의 중심 의복이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입을 수 있는 현대적인 해석을 가한 새로운 한복 디자인이 많다. 한복 산업 중흥의 씨앗은 있지만, 꽃 피울 사회적 계기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계기가 과거의 경험처럼 관(官)과 대통령의 관심 사업이기 때문일 수는 없다. 반대로 서촌 거리 풍경 속의 한복을 입은 이들은 진짜 계기의 하나일 수도 있다.

현재 경복궁이 있는 서촌과 창경궁이 있는 북촌, 덕수궁이 있는 서울시청 일대의 한복 대여점은 30곳 이상이며 전국적으로는 100곳 이상이다. 그들이 한복 산업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진 않지만 상징성은 매우 크다. 대여점 한복은 한복 유행을 일으킨 자발적 애호가들이 입었던 한복과는 다른 체험 한복일 뿐인 것도 사실이다. '한복 체험'과 '체험 한복'은 도치된 같은 단어가 아니다. 체험 한복은 전통적 복색에서 자유로운 상품이다. 전통을 빙자한 상품으로 한복에 대한 이해가 없는 내국인과 특히 외국인들에게 한복에 대한 편견만 키울 뿐이라는 비판에서부터 그조차 한복의 현대적 해석이자 변용이라는 옹호까지 체험 한복에 대한 입장과 의견은 다양하다. 그럴지라도 서촌 거리 풍경 속의 한복에는 그 모든 것이 들어있을 터이니, 구태여 체험한복의 한계만 꼬집어 낼 필요는 없다. 다만 체험 한복이 상품으로서의 자유로움을 가진다고 인정한다 해도 그 자유의 방향에 대한 언급만은 필요하다.

'파니에'라는 의복 장치가 있다. 서양 치마에서 볼륨감을 키우려고 치마 속에 받쳐 입는 구조물이다. 한복에서는 속옷과 속바지 등으로 자연스러운 볼륨감을 줄 뿐 마치 건물의 뼈대 노릇을 하듯이 파니에 따위 구조물을 입진 않는다. 한복을 선의 예술이라고 부르는 가장 큰 이유는 자연스러운 풍성함을 보여주는 선의 미학 때문이다. 철사와 플라스틱으로 만든 변형된 파니에가 부착된 체험 한복을 입고 빵빵하게 펴진 그 상태 그대로 흔들리는 한복 치마를 볼 때마다 꼴불견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 옷을 입고 한복 체험을 했다고 하긴 어렵다. 차라리 전통 한복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 궁궐 무료체험을 못 하더라도 한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한복 아닌 옷을 입는 것만 못하다. 파니에 한복은 한복이 발전하는 길이 아니다. 그것은 유행이라기보다 체험 한복 대여점들이 치마가 땅에 끌려 더러워지지 않도록 상품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에 더 가깝다.

한복이라는 전통 복색의 상품화도 그 전통의 미학적 정수를 해치는 방식으로 행해져서는 곤란하다. 서촌과 북촌 등 궁궐이 있는 거리를 스프링 인형처럼 흔들리는 파니에 한복들이 걸어간다. 풍경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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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함께 사는 길>은 '지구를 살리는 사람들의 잡지'라는 모토로 1993년 창간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를 위한 보도, 지구적 지속가능성을 지키기 위한 보도라는 보도중점을 가진 월간 환경잡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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