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흑인·게이 해방, 다음은 동물이다

[함께 사는 길] 동물을 먹는다는 것 ② 아직은 피터 싱어를 읽어야 할 시간

2017년 6월 2일 조류 인플루엔자(AI)가 재발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6월 15일)까지 단 10여일 만에 19만 마리에 이르는 닭과 오리가 살처분됐다는 뉴스를 보고 있습니다. 지난겨울 이른바 촛불이 뜨거웠던 시절에도 어마어마한 숫자(약 3600만 마리)의 가금류(닭, 오리, 메추리)가 살처분되었지요. 올해가 '닭의 해'인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아이러니한 사건입니다. 이것을 그저 살처분이라 부르면 안 됩니다. 이것은 '파울사이드(Fowlcide)'입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이런 소식을 전하는 TV 뉴스 화면에, 버젓이 공장식 사육 시설이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방송사고'가 아닌가 싶었지만, 그건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이것이 뭐가 문제냐는 식의 당연시가 지옥 같은 시설의 TV 노출이라는 사건의 배후에는 흐르고 있었던 것이죠. 촬영하고 방영한 방송국, 허가한 농장, 그리고 시청자 쪽으로부터의 당연시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라에서는 육식만이 아니라 공장식 밀집사육 시설조차도 당연시되어, 하나의 논의 거리로 떠오르지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왜 이런 당연시가 가능한 걸까요?

비윤리적 육식주의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첫째,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고기를 많이 써온 한반도의 식문화가 떠오릅니다.(그러나 나물 위주의 정갈한 사찰 음식이야말로 한국의 우수성이고 자랑거리이지요) 둘째, 심지어 곤충의 번데기까지도 잡아먹어야 살 수 있었던 궁핍한 시대를 거친 어느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전수한 식문화, 가축 취급문화도 있겠지요.(그러나 궁핍한 시대는 이제 갔고, 그 문화도 사라져야 합니다) 셋째, 스태미나 신화 같은 것도 한몫하지 않을까요?(단백질원, 인체 공부 좀 해야 합니다) 넷째, 한국에 유독 강고한 피어 컬쳐(Peer Culture, 동료 문화), 즉 다양성 질식 문화는 어떤가요? "다 같이 먹는 자린데, 너만 고기를 안 먹어?"(이런 집단주의 문화는 문화 적폐가 아닐까요?) 다섯째, 국내 인권 취약성이 낳은 인권 문제 우선시 풍토라는 요소도 있을 겁니다.(그러나 동물권 보장이 곧 인권 보장의 축소를 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 사회에 만연한 동물 경시 풍토입니다.(축생, 금수, 짐승, 개돼지라는 말을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이른바 하등동물은 상대적으로만 하등하고, 고등동물 역시 그러합니다)

육식의 당연시는, 가축을 오로지 필요 수단으로서만 인지하는 관점의 당연시로 이어지지요. 물론 윤리적 육식주의자도 얼마간 있겠지만, 대개는 자신의 비윤리적 육식주의를, 전혀 비윤리적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가축을 삶의 주체(Subject of a Life, 톰 리건)로, 권리의 주체로 전혀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 복날을 앞두고 한 닭오리 가공업체가 닭고기를 손질하고 있다. ⓒ연합뉴스

왜 동물복지인가

그래도 나라에 눈과 귀와 입은 아직 있어서, 동물보호법이 최근 개정된 바 있고 동물보호단체들도 목소리를 내고 있긴 합니다. 심지어 우리말로 된 비건(Vegan) 잡지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사실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해요. 지금 새 나라의 새 판이 짜이면서 개혁의 진동음이 들리는 듯도 하지만, 동물복지인증 농장 내 가축이 전체의 1.5퍼센트도 안 되는 부끄러운 현실도 분명 개혁 대상에 포함되어야 해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건 '왜 동물복지인가?'라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 쉽게 동물복지를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현행 동물보호법(법률 13023호)의 1조 목적에는, 왜 동물을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쏙 빠져 있습니다. 대체 왜 동물복지가 보장되어야 하나요? 이미 1970년대에 나와 세계를 뒤흔든 윤리철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 1946~)의 이야기는, 슬프게도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중요한 참조가 됩니다.

사실 동물복지론은 꽤나 오래된 담론이에요. 영국에서는 이미 250년 전에 출현했습니다. 프리맷(Humphry Primatt), 벤담(Jeremy Bentham), 오스왈드(John Oswald), 테일러(Thomas Taylor), 영(Thomas Young) 등등 18세기 말에 동물복지를 의제 삼고 옹호한 분들입니다. 하지만 1975년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이 나온 데에는 그만의 곡절이 있었지요. 포드(Ford)식 축산 시설이라는 20세기의 비극에 대한 윤리적 응전이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동물 해방>. 제목 자체가 상징적으로 이야기하듯, 이 책은 여성 해방, 흑인 해방, 게이 해방 등 해방 운동의 연장선에서 쓰인 책입니다. 그러니까 도덕적 관심의 지평을 '우리 세계의 또 다른 약자들'인 동물들로 확대하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왜요? 왜 동물의 복지와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거죠? 우리는 싱어의 답변에서 공리주의를 만납니다. 공리주의는 '이익-소중한 것'(interest)을 중심에 놓고 윤리적 삶의 원칙을 생각하는 사상이랍니다. 공리주의의 한 가지 중대한 원칙은 '이익'에 대한 평등한 도덕적 고려 원칙이지요. 한 개별자의 이로움은 다른 개별자의 이로움과 평등하게 고려되어야(취급한다는 것이 아니라) 한다는 원칙입니다.

하지만 그 '이익'은 대체 무엇일까요? 피터 싱어는 이렇게 정리한 바 있어요. "고통을 피하고, 능력을 개발하고, 먹고 자는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다른 이들과 우정과 애정을 즐거이 교환하고, 타인들로부터 불필요한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삶의 계획을 자유로이 추구하는 데서 나오는 이익"(<실천 윤리학(Practical Ethics)> 중)

자, 그럼 군산의 어느 오골계에게는 이런 이익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가축에게 이런 이익이 없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싱어의 입장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고통을 피함으로써 얻는 이익입니다. 가축들의 이러한 이익을 평등하게 고려한다면, 그들이 겪을 고통을 최소화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지옥을 없애는 일

요컨대, 도덕적으로 평등하게 고려해야 하는 대상, 즉 '이익-소중한 것'을 가지는 누군가의 결정적 속성은 (지성도, 이성도 아니고) 바로 '고통을 느낌'이라는 것이 (벤담이 세운) 공리주의의 입장입니다. 싱어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지요. "고통과 즐거움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익-소중한 것을 가진다는 것의 선(先) 조건이다. 즉, 우리가 이익에 관해 의미 있게 말하려면, 반드시 사전에 충족해야만 하는 조건이다. (중략) 하지만 고통과 즐거움이 가능하다는 것은, 어떤 존재가 이익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필요조건만이 아니라 충분조건이기도 하다." (<동물해방> 중) 즉,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는 존재라면, 그 이익을 도덕적으로 평등하게 고려하기에, 이미 충분한 조건을 갖춘 존재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입장은 다른 의문점을 낳습니다. 중추신경계를 갖추지 못한 생물은 도덕적 고려 대상이 아니냐는 질문도 곧장 파생됩니다.

그러나 거창한 이상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지금의 지옥을 없애는 것이 우리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실효성도 없는 동물복지인증제를 만들어 구색 갖춘 티를 내는 것보다 가축의 고통을 중대한 도덕적 사안으로서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 나라에는 지금 훨씬 더 긴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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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길

월간 <함께 사는 길>은 '지구를 살리는 사람들의 잡지'라는 모토로 1993년 창간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를 위한 보도, 지구적 지속가능성을 지키기 위한 보도라는 보도중점을 가진 월간 환경잡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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