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초언니들'이 잊혀 '박근혜' 괴물이 자랐다

[인터뷰] <영초언니> 저자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태곳적부터 여성이 있었다. '세상의 절반'이기에 세상 어디에나 있었다. 하지만 여성들이 그 모습 그대로 기억되는 경우는 드물다. 남성들의 눈에 왜곡된 모습으로 기억되고, 기록되어 왔다. '그들의 역사(History)'가 아닌 '그녀들의 역사(Herstory)'가 필요한 이유다.

대한민국에서 19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던 운동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운동권 내에는 아들의 제적, 구속, 죽음으로 가슴 치는 어머니들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청춘을 바쳐 싸운 여성 투사들도 있었다. 남성들의 보조적인 역할만 한 것도 아니다. 책의 주인공 천영초 씨, '고려대 9.14 시위 사건'을 일으킨 이혜자 씨 등 여대생들도 앞장서 싸웠다. 여성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YH 무역 농성 사건'은 영원할 것 같던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타국에서 불의의 사고로 시력과 기억을 잃어버린 영초언니는 그녀와 함께한 많은 이들의 젊은 시절의 기록인 한 권의 책으로 '사회적 스승'이자 '지식인의 모델'로 우리 앞에 다시 섰다. 이 책의 필자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뜨거운 '자매애'로 40여년 전 '바람이 몹시 불던 어떤 날'로 돌아가 공포와 고통, 번민을 헤집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70, 80년대 독재정치를 겪었든, 겪지 않았든, 스스로의 젊은 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책 <영초언니>(문학동네 펴냄)에 얽힌 얘기를 지난 12일 제주에서 서명숙 이사장을 만나 들었다.

▲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프레시안(이명선)

고려대 72학번 천영초, <영초언니>는 100% 실화다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에서 20대를 보낸 70년대 학번은 아니지만, 책 <영초언니>를 감명 깊게 봤다. "독재 타도"를 외치던 당시 대학가 이야기인데, 마치 소설을 읽듯 등장인물과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서명숙 : 한 매체에서는 책을 소개하며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의 첫 소설"(6월 1일 자 <오마이뉴스>)이라고 보도했다.(웃음)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도 "소설"이라고 소개하더라. 하지만 <영초언니>는 정말 100% 완벽 실화다. 구성과 문장에 글을 쓴 내 체취가 실릴 수는 있지만, 사실관계에 보탠 내용이 하나도 없다. 영초언니(고려대 신문방송학과 72학번 천영초)를 비롯한 등장인물 모두 실명 그대로다. 다만, 영초언니의 아들과 교도관, 형사만 가명이다.

프레시안 : 책 서문에 2006년 겨울 "후배들의 기약 없는 싸움", 일명 '<시사저널> 사태'를 지켜보며 "어처구니없게도 30여 년 전 대학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책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서명숙 : <시사저널>을 그만둔 상태였는데, 삼성을 비판하는 기사를 싣지 못하게 한 경영진과 그에 저항하는 후배 기자들이 첨예한 갈등을 빚으며 사태가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당시 <시사저널> 동료와 후배를 만나고 오면, 늘 영초언니 꿈을 꿨다.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두 눈의 시력을 잃고 뇌의 6, 70%가 손상"된 영초언니도 사느라 바빠 잊고 있던 때다. 그런데 대학시절 영초언니와 함께했던 일이 꿈에 자꾸 나왔다.

현실과 과거가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오죽하면, 정혜신 박사에게 '내가 왜 이런 거냐'고 물었다. 정 박사는 심리학의 '주둔군 이론'에 따르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했다. "군인이 전투를 하다가 밀릴 때 통상 가장 어려운 전투를 치렀던 고지로 후퇴하는 건 그곳에 가장 많은 주둔군을 두고 왔기 때문이라"며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했다. "바람이 몹시 불던 어떤 날"로.

'내 인생의 가장 충격적인 겨울이 그때였구나. 그때 심리적으로 주둔군을 그곳에 남겨놓고 왔구나' 싶어서 어떻게든 해원굿(解怨-)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글쓰기로 나를 치유하는 동시에, 1970년대 독재 정권에 맞선 수많은 영초언니를 잊고 사는 우리를 위해서라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시절에도 쓰지 않던 블로그에 글을 연재했다. 그마저도 제주 올레길 찾기라는 새로운 일에 빠져 중단됐다.

올레길이 일차적으로 마무리될 즈음, 영초언니가 캐나다에서 영구 귀국했다. 하지만 사고 직후 모습보다 더 비참했다. 담배를 처음 소개해준 '나쁜 언니', 사회의 모순에 눈뜨게 해준 '사회적 스승', 행동하는 양심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준 '지식인의 모델'이었던 영초언니는 같은 말만 반복하며 먹을 것만 찾았다.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기록의 의무를 지닌 기자로 25년여를 살았는데, 가장 가까운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구나. 매일 정치인만 쫓아다녔지. 막상 내 인생의 거물인 영초언니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기자직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영초언니를 기록하는 것은 기록자의 마지막 책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영초언니는 기록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들어간 <고대신문>에서 만난 인연 아닌가.

조정래 선생님 덕에<영초언니> 출판 뒷이야기


▲ <영초언니>(서명숙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프레시안 : 70년대 후반 대학가 주변의 정치사회적 풍경을 기록했다. 말 그대로, 서슬이 퍼럴 때였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당시 대학가 풍경을 기록하는 데 부담은 없었는지?

서명숙 : 책 서문에 밝히지는 않았지만, <영초언니>는 4년 전에 출판될 뻔했다. 당시 조정래 선생님이 제주도에 올레길을 걸으러 오셨길래, 칭찬받을 생각으로 책 출판 계획을 알렸다. 그랬더니, '박근혜 정부에서 그런 책을 내면 절대 안 된다. 감옥 가려고 그러느냐'며 만류했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의 과오 일부에 대해 사과도 했는데 문제 될 게 없지 않아요?'라며 '감옥 가도 좋아요. <영초언니> 썼다고 잡혀가면, 책이 더 유명해질 것 아니에요'라고 농담을 했다.(웃음)

하지만 조 선생님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자신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일시하고 있다며 '딸 박근혜는 자신의 집권 자체를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정치적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봤다. 이어 '심리적으로 동일한 대상이자, 이데올로기적 선언 모델인 아버지를 비판하는 책을 어떻게든 문제 삼을 것'이라며 '박근혜를 위시한 세력은 음성적인 방법으로라도 보복할 것이다. 제주올레를 후원하던 사람들이 소리 없이 후원을 중단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과거인 선배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으로, 현재인 후배들에게 충격과 상처를 주면 안 된다'며 '현실을 직시해라. 책은 몇 년 뒤에 내면 된다. 박근혜 정부 말기에 내던지, 끝나면 내던지'라고 말했다.

나로서는 현실과 타협하는 것 같아 비겁하게 여겨졌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태백산맥>으로 고초를 많이 당한 선생님의 과한 우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시사인>과 연재를 약속한 상태였다. 선생님이 나와 제주올레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지만, '책 안 내겠다'라는 말도 딱히 하지 않은 채 넘겼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찌감치 사모님께서 조정래 선생님이 밤새 걱정하셨다며 전화를 했다. 그래서 '선생님의 판단이 옳든 그르든 존경하는 어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 생각에, 후배들에게 싹싹 빌며 연재 계획을 철회했다.

"'염병' 최순실이 방아쇠를 당겼다"

프레시안 : 지금 생각하면, 조정래 선생님의 우려가 맞았던 것 같다.(웃음)

서명숙 : 그렇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조 선생님의 분석이 정확했다.(웃음) 이사장의 책 한 권으로 제주올레가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에 포함돼 6~7년 동안 어렵게 구축한 올레길이 수포가 될 뻔했다. 당연히 후원도 끊기고.(웃음)

올레길 유명세에,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줄 안다. 그러나 올레길은 절반 이상이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상황이 이런데, 4년 전 <영초언니>가 나왔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상상만으로도 몸이 서늘해졌다. 그래서 '박근혜 탄핵' 촛불을 들면서도 책을 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1월 최순실 씨가 특검에 강제소환되는 장면을 생방송으로 보는데, 귀를 의심했다. 최 씨가 "민주주의"를 입에 올리며 "억울하다"고 하는 것 아닌가. 순간 40여 년 전 "민주주의를 쟁취하자"고 외치며 감옥에 수감된 영초언니 모습이 떠올랐다. 심지어 영초언니는 교도관이 입을 틀어막아 끝까지 외치지도 못했는데, 최 씨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더라. 나중에 청소 노동자가 최 씨를 향해 "염병하네"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졌지만, 생방송을 보면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죽음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를 최 씨가 누리고 있구나. 수세식 변기와 TV가 설치된 독방에서 책도 읽으며.'

1979년 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성동구치소에 수감됐다. 당시 17명이 5.5평에서 지냈는데, '수감번호 4141' 신입으로 지정받은 잠자리가 푸세식(재래식) 화장실 입구였다. 사람들이 밤에 화장실을 들고 나며 두꺼운 비닐을 들출 때마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스물두 살, 창창한 나이에 양계장의 닭처럼 사방이 막힌 좁은 곳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최 씨는 헌정 사상 유례가 없는 국정농단을 하고도 최신식 감방에서 생활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과 영초언니, 최 씨와 나는 심지어 또래 아닌가. 정말이지, 너무 억울해서 그 감옥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웃음)

군사독재 정권의 조작으로 억울하게 수감된 사람들, 나와서도 평생 후유증으로 괴로워하며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천영초의 민주주의'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은 올레길로, 또 한 번은 조정래 선생님의 만류로 두 번이나 좌절된 영초언니의 이야기를 이번에는 꼭 세상에 내놔야겠다고 결심했다. 최 씨가 <영초언니> 출판의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동기 부여가 확실하게 됐다.

▲ 국정농단의 주범 최순실 씨는 지난 1월 특검에 강제소환되며 "더이상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라고 외쳤다. YTN 뉴스 화면 갈무리.

"대통령 박근혜? 귀싸대기 맞은 기분이었다"

프레시안 : 책에 고려대 여학생들끼리 책도 읽고 토론도 하는 '가라열'('가라! 여성 해방의 길로, 가라! 독재 타도의 길로, 가라! 노동자 해방의 길로!' 등의 의미를 함축해 지은 10명의 여학생 모임명) 이야기가 나온다. 자생적 페미니스트 조직으로, 당시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보면서 선구안(先驅眼)에 감탄하게 된다. 동시에 그만큼 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해 씁쓸하다.

서명숙 : 1978~79년 당시 일이다. 우리가 오히려 지금 세대를 보면 바뀐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이 담배를 피우면 지금도 안 좋게 보지 않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남녀 공히 같은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 '이건 아닌데?' 하는 문제의식은 있었지만, 자각하기까지 영초언니가 매개 역할을 해줬다.

나 같은 경우에는 제주도 여성인 어머니가 자생적 페미니스트와 같은 요소가 있었다. 딸인 나에게 어릴 때부터 최초의 여성 장관인 임영신 상공부 장관(이승만 정부),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황산성 변호사(11대 국회의원 및, 김영삼 정부 환경부 장관 역임) 등을 롤모델로 '전문직 여성으로 이왕이면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 후에 딸이 결혼한다고 하자, 남자의 직업 등 현실적 조건보다 '내 딸이?'라며 결혼 소식 자체에 놀랐다.

어머니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였지만, 집안에서도 딸과 아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제주에서 서울로 사립대를 보내면서도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런 나에게 <고대신문> 입사 첫 날, 한 선배가 남학생 책상을 걸레로 닦으라며 여비서 취급을 했다. 찬물에 걸레를 빨며 '집어 던지고 나가 버릴까'도 고민했지만, '나중에 편집국장이 되면 남자 후배들도 똑같이 느끼게 해줘야지'라며 참았다.(웃음)

프레시안 : 영초언니 삶이 여자 입장에서 무척 가슴이 아팠다. 민주 정부 이후 학생운동 출신들이 국회에 진출하기도 하고, 장·차관에 임명되는 등 명예회복과 사회적 보상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 운동권 출신의 여성 정치인들도 있지만, 남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것은 분명하다.

서명숙 : 책에 나오는 언니들, 천영초나 이혜자 모두 고려대 역사상 가장 큰 집회(데모)를 이끈 사람들이다. 영초언니와 혜자언니가 주도한 당시 집회는 국가적·제도적 폭력에 저항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였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이들의 운동 동기가 너무 순수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2013년 헌법재판소의 긴급조치 1, 2, 9호 위헌 결정에도 불구하고 정치적·경제적으로 보상받지 못했다.

1978년 생물학과 4학년이었던 혜자언니는 '고려대 9.14 시위 사건'('고려대 잔 다르크 사건', '78 민중 선언 사건'으로도 불린다)을 주도했다. 이 시위는 긴급조치 9호 발동 이후 3년 4개월 동안 이어진 대학가의 침묵을 깼다. 지금까지 기자로 수많은 역사적인 현장과 집회를 경험했지만, 내 인생의 가장 극적인 장면을 꼽으라고 하면 바로 이 날이다. 당시 1000여 명의 학생이 경찰과 대치하며 학내 정보원(일명 '짭새')이 사무실로 쓰던 정문 경비실을 부수었다. 그러나 국내 언론에는 이 같은 사실이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일본 <아사히신문>만 기사화했을 뿐이다.

혜자언니는 '당시 두렵고 힘들었지만, 이를 이겨내고 해냈다'는 자부심으로 개인적으로는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201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자신의 인생이 모욕을 당한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역사로부터, 국민으로부터 귀싸대기를 맞은 기분이었다'고. 하지만 촛불집회를 계기로, 혜자언니는 역사와 국민 앞에 미안함이 앞섰다고 말했다.

▲ 고려대 9.14 시위 당시 모습. 학생들이 강당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고대신문

"기상나팔 대신 장송곡이 울려 퍼졌다"

프레시안 : 70년대 대학가 풍경 하면,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표되는 낭만적인 모습이 떠오른다.

서명숙 : 사실 학생들이 정치적·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우민정책(愚民政策)'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시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내상 또는 심리적 스크레치로,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인생에 있어 가장 해맑은 시기에 방관자는 방관자대로, 참여자는 참여자대로, 평생을 트라우마 또는 외상후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영초언니>를 읽은 독자들이 감상평을 보내오는데 나와 동시대 사람들은 '도서관에만 있었다. 그게 효도하는 것인 줄 알았다'라며 때늦은 자기 고백을 하기도 하고, 젊은 친구들은 'YH 무역 농성 사건'에 놀라기도 한다. 연애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고.(웃음)

프레시안 : 책에 따르면, YH 무역 여성노동자 수감 소식에 재소자들이 "노조 빨갱이" "진짜 빨갱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얼마 뒤, "아침마다 우리를 깨우던 자발스러운 기상나팔 대신 구슬픈 트럼펫 장송곡이 울려 퍼"지며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이 전해졌다. 시간상으로 보면, 불과 두 달 만이다.

서명숙 : 절대권력이 무너지는 것은 외부의 충격이 아닌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 부장이나 차지철 전 대통령 경호실 실장 등 내부의 충격 때문이다. 겉으로 볼 때는 절대권력이 더욱 강화된 것 같지만, 안에서는 모순이 쌓일 대로 쌓여 폭발 직전이 된 것이다.

여기에 YH 무역 농성 사건이 스모킹 건(smoking gun)이 됐다. 기업주가 폐업 신고를 하고 해외로 도피하자 여성노동자들이 당시 유일 야당이었던 신민당사를 찾아 "배고파 못 살겠다"며 농성을 했고, 경찰 진압 과정에서 김경숙 씨가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의원직 제명을 당하자, 김 총재의 지지기반인 부산과 마산 시민들이 분노하며 '부마 민중 항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10.26 사태'로 이어졌다.

'박정희'라는 통치자가 '5.16쿠데타' 이후 근대화와 권위주의를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얼마나 지독한 절대권력을 휘둘렀는지 모른다. 기성세대 대부분은 박정희 전 대통령하면,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나라의 초석을 다진 사람이라고 한다. 이는 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데모한 사람들은 0.01%에 불과하다. 그 외에는 침묵하거나 방관했다.


▲ YH 무역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 점거 농성.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박정희 시대' 청산 못해 '박근혜'가 자랐다

프레시안 :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없었기 때문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된 2012년 당시 20대들은 70년대 독재정치의 실상을 모르고 투표를 했다.

서명숙 :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박정희의 딸'이라는 사실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시대에 대한 반성과 청산이 제대로 안 됐기 때문에 '박근혜'라는 싹이 자랄 수 있었다. 독일의 경우, 히틀러 치하였던 나치 시절(1933~1945년)을 끊임없이 반성하고 있다. 나치는 사회적·정치적·도덕적으로 매우 인종차별적이고 권위적이었지만, 오랜 기간 집단으로 세뇌됐기 때문에 향수를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끊임없는 반성으로, 나치 추종자라고 해도 쉬쉬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를 당당하게 여긴다. 처음에는 공(功)과 과(過) 모두 있다고 생각해도 차츰 공만 얘기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진다. 경제적인 성과는 계속 얘기되지만, '인혁당 사건'과 '동백림 사건'과 같은 간첩 조작 사건이나 절대권력에 희생돼 고문당하고 수감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잊힌다.

"폭력이 폭력을 낳고 평화가 평화를 낳는다"

프레시안 : 박정희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당사자들 입장에서 지난해 촛불집회에 대한 감회도 남다를 것 같다.

서명숙 : 지난해 촛불집회로 "박정희 정권을 향한 향수에 뿌리를 둔 박근혜 정권도 막을 내리고, 박근혜 본인은 구속되었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다. '6.10 민주항쟁' 이전, 긴급조치와 유신헌법으로 온 나라가 병영 같았던 시절에도 경제적으로는 약진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엄청난 탄압이 이뤄졌다.

무엇이든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없다. 젊은 세대도 이제는 과거의 이런 저항이 쌓여서 지금의 민주주의와 촛불집회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최루탄 대신 살수차와 차 벽이 등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폭력이 폭력을 낳고 평화가 평화를 낳는다.

프레시안 :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식을 보면서 '언론이 언제부터 저렇게 관심을 가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주의 투쟁 역사를 복원해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영초언니>는 그런 의미에서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서명숙 : 그렇다. 우리 사회에 수많은 영초언니가 있을 것이다. 책 한 권을 내세우며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또 과거의 행동을 보상받자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과거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반성할 줄 알아야 독일처럼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박근혜'와 같은 괴물은 또 나올 것이다. '모든 국가는 그 나라 국민의 수준에 맞는 정치인을 갖는다'고 하지 않나. '박근혜'는 대통령이 돼야 했던 게 아니라, 치료를 받았어야 한다.

ⓒ프레시안(이명선)

"길 찾는 일은 영원한 특종"

프레시안 : <영초언니>를 통해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서명숙 : 내가 청춘이었던 시절에는 정치적 민주화가, 지금 청춘들에게는 경제적 민주화가 시대정신이다. 과거는 독재권력이라는 하나의 대상과 싸워야 했지만, 지금은 금수저·흙수저와 같은 부의 양극화뿐 아니라 자영업자를 상대로 한 대기업의 횡포 등 전선이 다양하다. 책에 등장한 영초언니나, 혜자언니나 처음부터 투사였던 것이 아니다. 비틀거리며 두려움에 떨면서 독재정권에 맞섰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어떤 행동도 없이 자신을 경멸하는 것은 위험하다.

프레시안 : 평생을 기자로, 기록을 의무로 생각하고 살았다. 언론계 선배로 후배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서명숙 :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1, 2호로 유신에 반대하는 기사를 쓸 수 없게 되자, 선배들은 거리로 나왔다(일명 '동아투위'). 후배들에게 당시와 같은 '행동하는 양심'을 본받으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과 타협한 언론은 스스로 알 것이다.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들에게는 '언론인'이 가져야 하는 시대적 책무와 고민이 없었다. 그저 단순 직업인일 뿐이었다. YTN과 MBC 등 해직기자들의 고생이 많았다. 이들 모두 상식적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 제주올레가 어느새 10주년을 맞았다. 제주에 이어 일본에서도 '규슈올레'를 만들었다. 앞으로 계획은?

서명숙 : 오는 17일 몽골 울란바토르를 간다. 제주올레의 상징이 말('간세 인형'으로 상품화되어 있다)인데, 진짜 말의 나라인 몽골에 올레길을 찾으러 간다.

길을 찾는 일은 정말 즐겁다. 기자 시절에는 특종을 해도 몇 달 후면 다른 기사로 이슈가 덮였다. 그런데 길은 마치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하듯 걸어 다니며 찾아 놓으면, 사람들이 그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나로서는 '영원한 특종'을 한 셈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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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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