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역사, 한무제와 시진핑

[최성흠의 문화로 읽는 중국 정치] 예사롭지 않은 시진핑 일인 지배체제

한나라 초창기의 지배사상은 황로(黃老)사상이었다. 황로란 세상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황제(黃帝)와 도가사상의 창시자 노자(老子)를 합한 말로서 무위(無爲)의 사상이다. 아마도 전국시대부터 한나라의 건국에 이르기까지 벌어졌던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진나라의 가혹한 형벌로부터 벗어나고픈 그 시대 모든 사람의 소망이 반영된 시대정신이었을 것이다. 한고조 유방도 "살인자는 죽이고, 상해죄와 절도죄는 그에 합당한 벌을 주며 모든 진나라 법은 폐지한다(史記 高祖本紀)"고 했으니 이미 그러한 민심을 헤아리고 있었던 듯하다.

한나라 건국 초기에 대부분 하층민 출신이었던 개국공신들이 황제 앞에서 칼을 들고 싸우기도 하는 등 궁중의 의례란 없었다. 이에 유학자인 숙손통(叔孫通)이 고조에게 건의하여 궁중의 의례를 정하고 황제의 권위를 세웠다. 황로사상은 역설적이게도 유방이 죽고, 그의 부인 여태후가 권력을 농단하며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있을 때 기틀을 잡았다. 그것은 재상이던 조참(曹參) 덕이었다. 조참은 유방의 측근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소하(蕭何)의 추천으로 고조의 아들 혜제(惠帝)의 재상이 되어 "정치가 고요하면 백성들이 알아서 한다"는 생각으로 정사를 보좌하면서 황로사상은 자리를 잡았다.

사기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능력 있는 부하를 두고, 스스로는 술만 마시고 정사를 돌보지 않는 조참에게 혜제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조참이 "폐하와 아버지 고조를 비교하면 누가 더 훌륭합니까?"라고 물으니 혜제는 당연히 "자신은 아버지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라고 답을 했다. 그러자 조참은 다시 "그럼 저와 소하를 비교하면 누가 더 현명합니까?"라고 물으니 혜제는 살짝 웃으며 "그대는 소하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라고 대답을 하니 조참이 "이미 선제와 소하가 천하를 평정하고, 법령을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으니 그것은 따르기만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혜제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그의 뜻에 따랐다.

혜제와 조참이 무위의 정치를 택한 데에는 고조의 부인 여태후가 한몫했다. 여태후는 고조가 총애했던 척(戚)부인을 고조가 죽자마자 사지를 절단하고, 이목구비를 뭉개어 똥통에 처박는 등 매우 잔인한 여자였다. 그런 여태후의 서슬 퍼런 권력이 살아있을 때이니 혜제도 조참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관례가 세워지자 후대에 뜻밖의 결과가 찾아왔다. 여태후가 죽고, 여 씨 일가가 몰살당한 후 한나라의 태평성대가 찾아왔다. 5대 황제 문제(文帝)와 그의 아들 경제(景帝)가 통치한 문경지치(文景之治)의 시대이다.

문제는 농지세와 인두세를 과감히 삭감하고, 요역의 부담도 대폭적으로 줄여서 농민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했다. 또한 원래 국가의 소유였던 산림과 하천을 개방하여 농민의 부업을 활성화하여 소금과 철의 생산이 크게 늘었으며 상품의 유통도 촉진하여 상업이 발전했다. 그러자 공상잡세가 토지세보다 많아져 토지세를 더욱 내릴 수 있게 됐다.

게다가 문제 본인은 매우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하여 국고의 낭비도 없앤 그야말로 성군이었다. 6대 황제 경제는 영지의 박탈에 불만을 품어 일어난 오초칠국의 난을 평정하여 지방 호족세력의 횡포를 막고 왕권을 강화하여 선친의 뜻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백성과 더불어 쉰다(與民休息)"는 문경지치의 정신은 바로 황로사상의 실천이었다.

문경지치의 뒤를 이어 한무제가 등장했다. 그는 흉노를 몰아내고, 영토를 넓혔으며 중앙권력을 강화하고 유가를 국교로 확립하여 이후 중국 왕조의 기틀을 정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선대 두 황제 문제와 경제의 치적 덕이었다. 그러나 한무제가 남긴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은 후대의 평가이지 당시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는 고통만 안겨준 전쟁광일 뿐이었다.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염철사업을 다시 전매사업으로 돌렸으며 이런 저런 잡세를 신설하여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 게다가 유가를 국교로 정했다는 것은 황로사상을 폐기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말년에 '윤대죄기조(輪臺罪己詔)'라는 반성문을 써서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조서를 내렸겠는가?

B.C. 202년 한나라가 건국되고, B.C. 180년 여태후가 사망할 때까지 22년간은 권력투쟁의 역사였고, 이후 한무제가 등장하는 B.C. 141년까지 40년은 문경지치의 태평성대였다. 그리고 무제는 그 성과를 바탕으로 업적을 이루었으나 사실은 그때부터 한나라는 쇠락의 길로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국고는 비었고, 강력한 황권에 기댄 환관들이 득세했으며 외척세력이 전횡을 일삼기 시작했다. 결국 한나라는 그렇게 멸망의 길을 향해 가게 됐다.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연합뉴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는 1949년 건국하여 덩샤오핑이 등장하는 1978년까지 30년간 권력투쟁의 기간이었다. 그리고 1979년부터 지금까지 사영기업 혹은 민영기업을 중심으로 우선 먼저 부자가 되자는 선부론(先富論)의 기치 아래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룬 개혁개방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국가의 간섭이 줄고 인민들 스스로 알아서 부를 쌓고, 그 결과 나라 전체의 부가 증대했다. G2라 불릴 정도로 국제적인 위상도 높아졌다.

역사를 곧이곧대로 대응한다면 이제 중국에서 한무제가 등장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당연히 역사를 그런 식으로 끌어다가 현실에 적용시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요즘 시진핑의 행보는 강력한 경제적 능력을 바탕으로 국제적 영향력을 확대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다. 더불어 그가 추진하고 있는 일인 지배체제의 모습도 예사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마오쩌둥은 1957년 6월 13일 인민일보와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들이 문경지치를 높게 평가하지만 그들은 구습에 얽매인 황제들이고, 한무제는 한고조 유방의 업적을 계승한 황제이다. 만년에 사치를 하고, 군사력을 남용했지만 융성한 시기를 이끌었다. (…) 중앙집권을 이루고 흉노를 퇴치하여 강성한 국가와 민족을 정초했다"며 높은 평가를 했다. 중국 사회주의혁명이라는 대업을 이룬 지도자로서 당연한 평가이겠다. 그런데 지금은 한반도의 북쪽을 점령하고 한사군을 설치했던 한무제에 대해 시진핑은 어떻게 평가하는지 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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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중국 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대륙연구소, 북방권교류협의회, 한림대학교 학술원 등에서 연구원을 역임했다. 중국의 관료 체제에 관한 연구로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중국의 정치 문화에 대한 연구로 건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 권으로 읽는 유교> 등의 번역서와 <중국 인민의 근대성 비판> 등 다수의 연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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