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5월 9일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다. 하지만 이번 대통령 선거는 여느 선거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 천오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음을 외친 결과로 얻어낸 선거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로 이행하고 있다. 때문에 이번 대선은 단지 또 한명의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 각자가 바라는 새로운 대한민국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 토론하고 논쟁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필자 또한 한 사람의 국민이자 의료전문가로서 더 건강한 대한민국, 특히 더 건강한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한 제안을 하고자 한다.
이 제안은 필자가 속한 <베지닥터>(vegedoctor.org)에서 대선주자들에게 제안하는 정책이기도 하다.
식품선택권 외면하는 학교급식법
현재 학교급식법 시행규칙에는 식단 작성 시 "곡류 및 전분류, 채소류 및 과일류, 어육류 및 콩류, 우유 및 유제품 등 다양한 종류의 식품을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건강상의 이유 혹은 종교나 신념, 가치관에 따라 어육류나, 계란, 유제품 등을 먹을 수 없거나 먹지 않길 바라는 학생과 부모들은 매번 학교급식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음식에 어떤 재료나 성분이 들어갔는지 확인을 하느라 애를 먹는다.
그리고 같은 급식비를 지불하고도 이런 저런 반찬들이 제외된 단조롭고 부실한 급식을 하게 된다. 학교급식법은 학생들이 어육류와 계란, 유제품을 포함한 식사를 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의 경험과 의학 및 영양학 연구결과들은 오히려 동물성식품과 유제품 섭취가 증가함에 따라 청소년의 건강상태는 악화됐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이런 가정은 알레르기나 건강상의 이유로 철저하게 유제품 및 동물성 식품을 가려 먹어야 하는 경우 특히 치명적일 수 있다.
건강상태와 식단의 변화
지난 30~40년 사이 청소년 비만은 10배가량 증가했고, 아토피와 천식, 비염도 급격히 증가했다. 그 결과 20대 초반에 30% 이상이 비만이고, 20% 가까이가 당뇨병 전단계, 15% 이상이 고지혈증, 10% 가까이가 고혈압 상태에 이르게 됐다. 지난 1971년 이후 40년간 육류는 11.2배, 어패류는 3.2배, 계란은 2.7배, 유제품은 6.7배 섭취가 증가했고, 식용유는 14.5배, 설탕은 4.3배 섭취가 증가했다. 반면 쌀, 보리, 밀, 감자 고구마, 감자 등의 탄수화물 음식 섭취는 38.8% 감소했다.
동물성 식품과 식용유, 설탕 섭취가 급격히 증가하고, 탄수화물 음식 섭취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각종 건강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추세가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연구에서 청소년 비만과 아토피, 천식, 비염 등 청소년의 주요 건강문제가 식물성식품으로만 구성된 식단에 의해 개선된다는 것을 보고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미국의 영양식이요법학회(Academy of Nutrition and Dietetics)는 식단을 식물성 식품만으로 구성하는 것은 임신기, 수유기, 영아기, 유아기, 청소년기, 노년기 등 생애의 모든 단계에 적합하며, 운동선수들에게도 적합하다는 입장을 작년 12월에 재차 발표했다.(원문보기)
현미식물식 선택권
이런 이유로 베지닥터(vegedoctor.org)는 건강, 종교, 신념, 가치관에 따라 육류 및 유제품을 먹을 수 없거나 먹길 원치 않는 학생들이 안전하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선택적 식물식 식단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제안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미식물식(채식)을 원하는 학생들이 20명 이상인 경우 학교에서 현미식물식(채식) 급식을 제공한다.”
현미식물식: 현미밥과 자연상태의 식물성 식품으로만 식단을 구성하는 식사법을 뜻하며, 식용유와 설탕 등 고도로 가공된 식물성 식품의 사용은 최소한으로 제한한다.
이런 제안은 결코 과한 요구가 아니다. 현미식물식이 필요하거나 원하는 학생들이 현미식물식을 철저히 실천할 때 비만, 아토피, 천식, 비염, 여드름 등 청소년기의 주요 건강문제가 해결되고, 학업 집중도도 향상될 수 있다. 개인의 삶의 질과 학업능력 향상을 고려한다면 소극적으로 선택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하는 것이 교육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미식물식을 요구하는 학생들은 환자, 까다로운 사람 취급당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본인의 건강과 주변 사람들의 건강을 침해하고, 사회적 의료비를 증가시키는 흡연자들의 ‘흡연권’은 범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국민 건강의 관점에서 본다면 베지닥터의 제안은 이런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일 뿐이다.
식물식할 권리는 세계적 추세
베지닥터의 요구와 비슷한 요구를 이미 법제화된 국가도 있다. 지난 3월 3일 포르투갈 의회는 모든 공공시설의 급식에 1가지 이상의 엄격한 식물식 메뉴를 의무적으로 포함시키도록 하는 법안을 승인했다. 2~6개월의 준비기간 후부터는 포르투갈의 모든 학교와 병원, 대학교, 교정시설에서 본인이 원하는 경우 영양학적으로 잘 구성된 동물성 식품이 전혀 없는 완전 식물식 식단을 제공받을 수 있게 될 예정이다. (원문보기)
이 법안은 2015년 시작된 포르투갈 채식인 연합 주도의 식품 선택권 보장 청원 운동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청원에 1만5000명이 서명을 했고, 이 청원을 바탕으로 포르투갈 의회에서 좌파블럭(Left Bloc), 녹색생태주의당(Ecologist party 'The Green'), 인간-동물-자연(People-Animal-Nature) 등의 3개 좌파 정당들이 다수당들의 동의를 얻어내 법제화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포르투갈의 시도는 전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공공시설에서의 식물식 제공 청원운동은 영국에서도 진행되고 있고, 이미 1만6000명이 서명을 했다.
미국에서도 급식에 식물성 식단을 의무적으로 포함시키는 법제화 운동은 없지만, 일부 캘리포니아 교육구에서는 윤리적 혹은 환경적 이유로 식물식을 원하는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해 급식에서 식물식 메뉴를 늘려나가고 있다. 포르투갈의 식물식 선택권 보장 법제화는 국민의 다양한 식품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 중 하나라는 인식을 전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에서도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길 기대한다.
식품 선택권 보장과 건강
사회의 건강한 정도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도로 판단할 수 있다. 심각한 우유 알레르기가 있는 학생들이 우유 없는 균형있는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을 때 우유 알레르기로 인한 사망을 예방할 수 있다. 우유뿐만 아니라 육류, 해산물, 계란, 대두 등에 알레르기가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건강을 위해 현미식물식을 철저하게 실천해야 하는 사람들은 매우 많다. 고혈압, 당뇨병, 심뇌혈관질환, 고도비만, 크론병, 각종 자가면역질환, 천식, 비염, 중이염, 아토피, 여드름, 만성피로 등 나열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학교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이들의 요구와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때 국민 개개인의 건강과 삶의 질이 향상되고, 국민 의료비도 획기적으로 감소할 수 있다.
한편 사람들의 음식 선택기준은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가격과 입에 감기는 맛만이 유일한 기준이 아니라 종교나 문화적 배경, 환경적, 윤리적 고려에서 자신이 먹는 음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직접적인 건강에 손상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본인이 원치 않는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을 때 정신적 스트레스와 소화불량 등 다양한 부작용이 발생하기 쉽다.
이뿐 아니라 학교급식과 공공시설에서 식물식 메뉴를 의무적으로 제공하게 되면 장기적으로 동물성 식품 섭취가 줄면서 밀집된 환경에서 사육되는 가축들의 수를 줄일 수 있고, 가축들의 분뇨와 가축에게 사용하는 항생제와 약물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가축의 사료 생산을 위한 GMO 작물과 제초제도 줄일 수 있어 환경오염과 생태 교란도 줄일 수 있다. 이 모든 변화의 시작은 아주 간단하다. 다양한 이유로 식물식을 원하는 국민들의 건강하고 정당한 식품 선택권을 온전히 보장하는 것이다. 식품 선택권 보장이라는 변화의 씨앗은 인간과 동물, 지구의 건강이라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먼저 학교에 씨를 뿌리고 포르투갈처럼 모든 공공시설 나아가 모든 식당에까지 변화의 씨앗이 퍼져나가길 바란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