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은 들떠서 혼자 마음이 바빴다. '생명권 보호 의무와 직책 성실 의무 위반'으로 대통령이 파면되면 다시 불러내야 할 자들의 이름만 떠올리고 있었다. 용산참사 당시 "무전기를 꺼놓았다"던 김석기,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질 때 "상황을 몰랐다"던 강신명. '몰랐다'는 말은 책임을 모면하려는 뻔뻔함의 탈출구가 되었다. 이제 그런 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알아도 잘못, 몰라도 잘못이라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듣다가 맥이 빠졌다. 파면의 사유가 아니라니…….
서러웠다. 광화문 분향소를 들러 사진 속 얼굴들을 찬찬히 다시 보았다. 죄스러웠다. 헌재 결정문은 '당신들은 나중에'라고 말하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다른 사회를 만들자며 싸워온 힘이 여기까지밖에 미치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고백했다. 그러나 한편에서 다른 기억이 차올랐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다부지게 주먹을 쥐며 말하던 세월호 유가족의 모습이 떠올랐다. "세상은 변하지 않은 듯하지만 우리가 변하고 있어요."
박근혜 파면이 시민의 승리라는 점에 이견이 없고, 박근혜 파면만으로 촛불의 열망이 실현됐다고 여기는 사람도 없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권력의 부패를 단죄했으나 인권의 경시를 벌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정의 한계는 헌재의 한계다. 그간 인권에 반하는 결정을 해온 헌법재판소가 스스로를 넘어설 기회를 놓쳤을 뿐이다.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면 가장 소중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스스로의 변화다. 박근혜가 파면돼서 시민이 승리한 것이 아니다. 시민이 이겼으므로 박근혜가 파면되었다.
모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집회와 행진은 경이로웠다. 몇 달 전만 해도 집회는 얼마나 불순한 것이었나. 정부와 언론은 집회를 늘 폭력과 등치시키며 공세적으로 진압했다. 경찰 폭력에 맞서 물러서지 않는 것은 법질서 위반이었고 집회를 여는 세력은 사회 불안과 국론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으로 내몰렸다. 제 잇속만 챙기는 '귀족 노조'나 오로지 반(反)정부 투쟁만 부르짖는 '전문 시위꾼'들이 문제라고 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집회를 하고 행진을 할 때 정부와 언론의 행태도 다르지 않았다. 백남기 농민이 쓰러지고 나서도 죽음의 책임을 집회 자체에 돌리려고 했다.
경찰 폭력 감시단 활동을 할수록 보였다. 탄압당하는 것은 집회가 아니다. 우리들의 삶이었다. 정리해고는 경영상의 이유로 어쩔 수 없고 비정규직은 경쟁에서 탈락한 자의 운명이고 차별은 능력 부족에 대한 핑계라며,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렸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조차 범죄가 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숨죽이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목소리를 내려면 혐오의 화살을 감수해야 했다. 억울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들로 빼곡한 광장은 외로운 곳이기도 했다.
'최순실'이 사람들을 광장으로 불러내긴 했다. 그러나 촛불이 거침없이 들불이 된 것은 최순실이나 박근혜 덕분이 아니다. 광장에서 우리가 함께 변화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시끌벅적한 광장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자유발언대에서 분노를 모았고 서러움을 나누었고 외로움을 다독였다. 평범한 이웃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비춰주었다. 세월호 참사를 다시 기억해냈고 억울해도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이제야 광장에 나온 미안함을 고백하면 이제라도 나와 반갑다며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서로에게 용기가 되어주었다.
모이면 비로소 보인다. 넉 달여의 광장도 그랬다. 모여서 함께 외칠수록 문제는 우리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우리를 문제로 지목했던 세상이 문제였다. 바꾸고 싶어지고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함께이므로. 서로를 조직하고 권력을 구성해가는 만큼 우리는 주권자가 되어간다. 집회는 특정한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모이고 모이는 그 자리가 직접민주주의의 장이다. 우리가 어떻게 민주주의의 주체가 되어갔는지, 주권자가 되어갔는지 기억할 때 한걸음 더 나아갈 길이 보인다.
말하기를, 모이기를 멈추지 말자
집회가 그렇듯 민주주의란 언제나 시끄럽고 불편하다. 질서에 순치되지 않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부딪치고 어울리는 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위기이니 안정을 찾아야 한다, 분열을 넘어서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등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박근혜 체제의 유산인 황교안이나 적폐 청산을 주장하는 유력 대권 주자 문재인이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라는 헌법기관이나 한결같다. 정치는 내게 맡기라며 다시 '가만히 있으라' 한다.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가만히 있는다면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순식간임을 모를 수 없다.
최순실이 국정을 농단하고 박근혜가 헌정을 내버리기 전에도 헌정은 중단되고 있었다. 헌법이 보장하는 일할 권리, 뭉칠 권리, 함께 싸울 권리,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평등권 같은 것들은 흔적도 찾기 어려웠다. 정치권에서는 분권형 개헌 논의가 한창이지만 권력이 투명하고 민주적인들 인권이 저절로 보장되지 않는다. 헌법의 기본권 조항을 강화하자는 주장들도 있지만 헌법이 부족해서 인권이 경시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인권의 주체가 되기를 멈추지 않을 때 인권이 실현된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체제는 이제 겨우 흔들리기 시작했다. 뿌리까지 흔들리려면 멀었다. 지배 세력이 체제를 유지해온 비결은 약한 자에게 위기를 떠넘기는 것이었다. 먹고살기가 왜 이리 힘겨워졌는가. 재벌은 노동자들을 정리 해고하고 비정규직으로 신규 고용을 채웠다. 기업은 쥐어짜기만 하니 정부가 등허리 펴주는 일을 맡아야 했다. 돈을 쓸어간 기업이 세금도 내놓지 않으니 복지는 말만 나부꼈다. 시중에 돈이 돌지 않으니 집집마다 빚을 지게 했다.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한국 경제가 휘청거릴까 전전긍긍하는 와중에 사드 배치 강행으로 중국의 경제 제재가 또 하나의 위기로 등장했다. 위안부 합의라는 굴욕 협상까지 하면서 한미일 동맹에 매달린 보수세력이 우리에게 안보위기까지 떠넘겼다. 우리의 삶을 탈탈탈 털어가 배를 불렸던 권력은 여전히 가진 것이 많다. 우리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었던 세력에 온전히 책임을 다 물을 때까지 우리 스스로 강해지기를 멈추지 말자.
"인간의 존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협력하며 살아갈 때 지켜질 수 있다"는 4.16인권선언은 광장에서도 다시 확인되었다. 당장의 대선에 광장의 기억을 모두 헌납하지 말고 우리의 이야기를 이어갈 작은 모임들을 만들자. 박근혜 정권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기억을 지우려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진실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힘은 곳곳에 만들어진 작은 노란리본모임들에 있었다. 노동조합에 가입하거나 시민단체의 회원이 되거나 인권단체에서 자원활동을 하거나, 광장에서 다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 이어질 수 있도록 어딘가에 모여서 변화를 이어가자. 광장에서 너끈하게 스스로를 넘어서온 우리 자신을 기억하자.
새로운 사회로의 초대장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란 무엇인가' 질문했던 사람들이 '이게 나라냐'며 광장으로 나왔다. 박근혜 퇴진 요구는 세월호 참사 이전과 끝내 단절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박근혜의 파면은 끝의 시작일 뿐이다. 박근혜의 구속과 처벌 등 '적폐 청산'이 끝내야 할 것들을 끝내는 과정이라면 새로운 사회도 동시에 시작되어야 한다.
대선에서 우리는 '유권자'가 된다. 투표할 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 가져도 쓸 수 없는 사람들은 구경꾼으로 밀려난다. 선거는 늘 그랬다. '표'가 되어야 움직인다. 인권의 목소리들은 표가 되지 않아 사라지기 십상이다. 표를 주고 초대장을 받으려면 '나중에'라는 답밖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큰 기업이 먼저 성장해야, 나라가 먼저 안정돼야, 국민이 먼저 통합해야, 사회가 먼저 합의해야……. 이런 말들은 초대받지 못할 사람들을 축출하는 말이었다. 나중은 없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초대장을 보내야 한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며 광장에 모여들었지만 그 힘이 아직 충분히 세력화하지 못했다. 개혁 과제나 정책 대안의 나열이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대체할 수도 없다.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 규합하는 세력이 구성되는 만큼 인권도 살아 숨 쉰다. 존엄과 안전, 생명과 평등의 시대를 여는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어야 한다. 지금 당장, 인권의 초대장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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