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문 라이트>라는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감독 배리 젠킨스가 '왕가위의 영화를 좋아하며 이 영화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아시아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은 흑인 감독이 흑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을지 궁금했다. 영화를 보면, 왕가위의 영화 가운데 특히 동성애를 다룬 <해피투게더>(1997)의 영향이 도드라진다. 그럼에도 흑인 게이 소년의 성장을 다룬 <문 라이트>는 한국 관객에게는 가장 마이너 한 영화로 분류될 것이다. 또 아카데미 작품상을 놓고 경합을 벌인 <라라 랜드>와는 완전히 상반된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리틀', '샤이론', '블랙',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주인공 샤이론을 지칭하는 말이며, 각 장에서 샤이론은 어린이, 청소년, 어른으로 등장한다. 샤이론이 어른이 될 때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은 세 사람이다. 먼저 샤이론의 대리 아버지가 되는 후안이 있다. 몸집이 작아 ‘리틀’이라고 놀림 받던 어린 시절, 샤이론은 미혼모인 엄마와 함께 마이애미의 빈민가에서 살아간다. 샤이론은 아이들의 괴롭힘을 피해 후안의 창고에 숨어들고, 거기서 후안을 처음 만난다. 후안이 문이 닫힌 창고로 들어오려고 창문의 판자를 뜯어낼 때 실내는 갑자기 밝아진다. 그렇게 후안은 어둠 속에서 떨고 있던 샤이론에게 빛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장면 1). 이후 그 동네에서 유복해 보이는 후안과 그의 애인 테레사는 대리 부모가 된다.
후안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샤이론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듯 수영을 가르쳐준다. 또 "달빛을 받으면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든지, "때가 되면 스스로 뭐가 될지 결정해야 한다. 그 결정을 다른 사람이 할 수는 없다"는 등의 교훈을 들려준다. 그럼에도 샤이론의 환경이 절망적인 이유는 그의 대리 아버지이자 롤 모델이 될 수 있는 어른 남성 후안이 마약판매상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첫 장면에서, 한 흑인 청년은 후안에게 "일(마약판매!)하게 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한다. 청년이 마약 거래를 놓고 늙은 흑인과 실랑이 할 때, 카메라는 그 주변을 빙빙 돌며 어지러운 환경을 은유한다. 엄마의 마약중독으로 고통 받는 샤이론은 후안의 직업을 알게 되자 실망한 채 떠나간다. 이후 후안은 죽었다는 사실만 전해지며 영화에서 사라진다. 샤이론이 아버지로서의 그를 버렸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는 후안의 죽음과 장례식 등은 재현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샤이론의 엄마 폴라가 있다. 영화 도입부에서 폴라는 후안을 경계하며 나름 아들을 잘 돌보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를 만나고 마약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녀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진다. 처음 그녀가 아들을 방치하고 애인과 함께 방으로 들어갈 때는 다소 눈치를 보면서 조용히 들어간다. 그러나 다음에 동일한 상황이 반복될 때는 "쳐다보지 말라"고 미친 듯이 소리친다. 이 영화에서 샤이론은 억압된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에 시점 쇼트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이 때 폴라의 쇼트는 샤이론의 시점 쇼트이다(장면2와 장면3). 나중에 폴라는 마약을 사려고 샤이론에게서 돈을 빼앗기까지 한다. 엄마에게 쫓겨날 때마다 샤이론은 테레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대리 엄마의 직업은 매춘부이다. 이 영화에서 특히 샤이론을 둘러싼 세상은 대부분 카메라의 초점이 나간 상태로 흐릿하게 보인다. 샤이론을 둘러싼 환경에 희망의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샤이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캐빈일 것이다. 샤이론의 청소년기에 캐빈은 '게이'로서의 성정체성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같은 반 친구 티렐이 샤이론을 구타하라고 주문하자, 캐빈은 그렇게 한다. 학교 선생이 구타에 가담한 학생들을 고발하라고 강권할 때, 샤이론은 티렐을 의자로 내리치고 소년원에 간다. 그는 후안의 가르침대로 캐빈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억압된 공격성을 표출한다. 이 순간이 그가 어른이 되는 계기였을 것이다.
이 영화의 1장과 2장의 마지막 장면은 동일하다. 전자는 샤이론이 실망하고 떠나는 모습을 보며, 후안이 고개를 숙이는 장면으로 끝난다. 후자는 경찰차에 실려 가는 샤이론을 보며, 캐빈이 자신의 배신을 부끄러워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3장의 제목, '블랙'은 캐빈이 샤이론을 부르는 별명이다. 이제 어른으로 자란 샤이론은 마약판매를 하며 후안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어느 날, 캐빈에게 전화가 걸려오자 샤이론은 그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이 때 <해피투게더>에서 그렇게 인상 깊었던 노래, 마카에타누 벨로주의 <쿠쿠루쿠쿠 팔로마>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샤이론을 둘러싼 세상이 선명하게 잡힌다. 샤이론이 교도소에서의 인연으로 마약판매상이 된 것처럼, 캐빈은 교도소에서 요리를 했던 경험으로 요리사가 되어있다. 빈민가의 흑인 소년들에게는 애초에 장래에 희망하는 직업 따위는 있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캐빈은 "정말 하고 싶던 걸 해본 적도 없고, 진짜 나인 적도 없었다"고 말한다.
샤이론이 캐빈을 만나고 아주 어렵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까지, 20분이 넘는 시간이 할애된다. 샤이론의 망설임과 고뇌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감정을 따라가며 나눠찍기와 투 쇼트, 그리고 클로즈업이 미묘하게 어우러진 연출을 보면, 이 장면을 위해 영화를 찍은 것 같기도 하다. 샤이론의 인생의 주요 인물들과 헤어지는 장면으로 끝났던 이전의 두 장에 비해, 마지막 3장은 재결합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결국 샤이론은 자신의 정체성(그가 캐빈을 만나기 직전, 바닷가 달빛 아래서 뛰어노는 흑인 소년소녀의 장면이 나온다)과 성정체성을 인정하고 확인하게 되지만, 시종일관 영화에 흐르는 억압된 분위기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는다. 심한 억압 속에서 샤이론은 어렸을 때부터 말수가 적고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법도 거의 없었다. 관객이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건 음악을 통해서이다. 예를 들어, 후안을 처음 만나 그의 차를 타고 갈 때 샤이론의 얼굴은 계속 무표정하지만, 흘러나오는 음악은 감미로운 느낌의 피아노곡이다. 수영을 처음 배울 때의 불안은 날카로운 바이올린 음악으로 전해진다. 그러므로 왕가위의 영향은 장면뿐만 아니라 음악을 사용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이제 샤이론은 정말 어른으로 성장한 것일까? 3장은 샤이론이 '폴라가 소리치는 악몽'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전히 그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고통 받고 있지만, 그가 마약치료 재활센터에 있는 엄마를 찾아가고 캐빈을 만나는 장면은 치유의 실마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바다를 바라보던 소년 샤이론이 고개를 돌려 관객을, 세상을 쳐다보고/마주하는 장면으로 끝난다(장면4와 장면5). 바다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사건이 모두 벌어졌던 공간이다. 샤이론의 내면에 웅크린 상처투성이의 소년을 위한 치유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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