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기 지식인의 일갈 "정치개혁으로 혁명을!"

[장현근의 중국 사상 오디세이] '미치광이 혁명가' 장타이옌의 분노

중국 저장(浙江) 성은 오늘날 대학입시 성적이 전국 최상위권인 공부 잘하는 지역이다. 역사적으로도 과거 시험에서 장원이 많이 나왔으며 근대에도 뛰어난 지식인이 여럿 출현했다. 근대 중국에서 창조적인 학문성과를 많이 낸 두 명의 국학대사 장빙린(章炳麟)과 왕궈웨이(王國維)도 저장성이 낸 대표적 인재들이다. 그들은 가까운 이웃 동네 사람이었으나 평생 만남이 없었다고 한다. 장빙린의 괴팍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겠으나, 같은 길을 걷는 지식인으로 살면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의외로 많다.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 줄은 모르겠으나, 부부 싸움을 한 집을 방문하면 부부의 학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지식인일수록 전혀 싸우지 않은 듯 잘 가장하더라는 얘기다. 요즘 딱 몇 사람 때문에 온 나라가 엉망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를 보면서 한편으로 대변혁의 큰 걸음을 내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그동안 미묘하게만 느꼈던 남편 혹은 아내의 정치(?) 성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그 때문에 나이든 지식인 부부가 갈라서게 됐다는 충격적인 얘기도 들었다. 무서운 얘기지만 갈라짐은 또 다른 시작이기도 하다. 장빙린은 평생 사람과 사귀다 싸우고 갈라서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새로 시작했다.

미치광이 지식인?

장빙린은 "천하의 흥망엔 필부도 책임이 있다"라고 말한 명말청초의 참 지식인 고염무(顧炎武)를 너무 좋아하여 이름을 타이옌(太炎)으로 바꾸었다. 중국 근대 지식인 가운데 글이 가장 난해하기로 유명한 그는 장풍자(章瘋子), 즉 '미치광이'로 불렸고 본인도 그것을 즐겼다. 심지어 스스로를 '정신병자'라고 자처할 정도였다.

나도 장타이옌의 첫 논문집인 <구서(訄書)>와 중기 저작인 <국고논형(國故論衡)>을 읽다가 내려놓기 일쑤였다. 천재적인 아이디어에 감동하다 지식권력의 횡포에 짜증이 나곤했다. <광인일기(狂人日記)>를 쓴 루쉰(魯迅)도 장타이옌의 제자였는데, 루쉰은 자신의 스승을 사랑하기도 미워하기도 했으며 스승을 기념하는 어떤 행사에도 가지 않았다. 혼돈의 시대, 광기의 시대, 전통과 현대가 충돌하고 온갖 이념을 지닌 정치인들이 권력과 재물을 '우국충정'이란 이름으로 탐하던 시대에 스승과 제자는 왜 광인을 자처했을까.

▲ 1906년 일본 도쿄에서 출판된 장타이옌의 <구서(訄書)>에 실린 그의 사진. ⓒwikimedia.org

장타이옌은 글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말이 어눌하고 사투리가 심해서 강의 때면 제자가 통역을 해야 할 정도였다. 글씨도 고대 문자로 어렵게 써서 그의 주문서를 든 하인이 시장에서 물건을 사오지 못했다. 기억력이 약해 일본에선 지척에 있는 쑨원(孫文)의 집을 갈 때마다 헷갈려 했으며 상하이에서든 우한에서든 인력거꾼들이 매번 곤욕을 치르곤 했다. 그럼에도 음운학, 문헌학, 의학, 불교학, 정치학, 전통유학, 문학, 역사학 등 수많은 영역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뤄냈고 해당 분야 연구자들이 반드시 중요하게 참고해야 할 저명한 지식인이었다.


예컨대 장타이옌은 철저한 중국문화 우월주의자였는데, 표준발음을 얘기하는 제자뻘인 북경대학 교수를 향해 한(漢)대 음으로 사부를 줄줄 외우며 면박을 주었다. 그는 "오늘날 고려(한국) 말은 주로 한대 음이고 당나라 음과 조선의 토착어 및 외래어가 더하여져 이뤄졌다"는 말도 남겼다. 그는 당시의 한국어와 일본어도 연구했던 것이다.

지식인은 과거의 성취를 바탕에 깔고 있으므로 태생은 보수지만 새로운 미래에게 앎을 전달하기 때문에 끝내는 진보적이다. 중국역사상 최대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아파하던 장타이옌은 진정한 혁명으로 중국이 거듭나기를 바랐다.

"국호를 바꾸고 사직을 불태워버림을 혁명이라 한다. 우수한 백성을 예우하고 뛰어난 인재를 모음을 혁정(革政), 즉 정치개혁이라 한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혁정으로 혁명을 이끄는 것이다."

분노를 어찌할 것인가?

장타이옌은 사상가, 혁명가, 국학자로 칭송받았다. 짧은 인생에 한 가지도 힘든데 세 분야에서 성취를 이뤘고 생전에 인정을 받았다. 루쉰은 그 중 혁명가로서의 업적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장타이옌은 7번 체포되고 3번 감옥살이를 했으나 혁명의 의지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가 일삼은 기행을 불굴의 혁명의지와 연결시켜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부당함을 알면서도 사회혼란이 염려스럽다며 기존의 권력과 타협하는 것은 지식인 혁명가의 태도가 아니다. 그리하여 캉유웨이에게서 돌아섰다. 만주 왕조는 객제(客帝), 즉 손님 황제이므로 몰아내고 주인인 중화민족이 권력을 잡아야 하는데, 혁명을 비통해하며 헌법을 운운하고 있다면서 량치차오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오랑캐를 몰아내고 민국을 건립하자"는 쑨원의 구호는 장타이옌의 창작이다.

혁명으로 등장한 '중화민국'이란 국호도 그가 처음 썼다. 베이징을 수도로 삼아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민국 수립 후 혁명당을 해산하고 쑨원에게 퇴위하라고 주장하면서 '오랑캐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고 욕을 해대다 정말 미친놈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장타이옌에게 욕을 먹지 않은 정치인과 학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공부는 그렇다 치고 그가 정말 정치를 잘 이해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그가 말한 혁명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혁명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중국은 본디 옛 것에 따르는 나라이지 새롭게 열리는 나라가 아니다. 좋은 법제나 아름다운 풍속은 응당 보존하고 존치시켜야지 사사건건 다 바꾸어선 안 된다."

그의 분노가 중국다움을 살리는 혁명을 하자는 데 모아진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무조건 서양의 정치제도만 좋다고 주장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전제주의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고 공화라고 다 좋은 정치는 아니다'라고 생각한 점은 민주정치의 요체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는지.

전통이 잔뜩 묻어나는 후베이 방언에 심취해 있던 그는 사십 가까이에 <순천시보>에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신부 모집 광고를 냈다. '첫째로 후베이 여자일 것, 둘째로 문리가 트여 단편의 글이라도 지을 수 있어야 함, 셋째로 대가집 규수일 것, 넷째로 학교에서 배운 평등과 자유의 악습에 젖어있지 않은 사람일 것, 다섯째로 남편을 따르는 미덕을 갖춘 사람'.

비난이 일자 그는 네 번째 조건을 '학교를 다녀 쌍방이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서로를 존경할 사람', 다섯째 조건을 '전족에 반대하는 여자로 남편이 죽으면 재가할 수 있고 불화하면 이혼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었다. 1913년 우여곡절 끝에 45살의 그와 30살의 탕궈리(湯國黎)가 상하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쑨원, 황싱, 차이위안페이 등 2백여 명의 쟁쟁한 중화민국 인사들이 하객으로 참석했다.

대의민주제에 반대하며 욕을 먹던 장타이옌은 한 번의 분노로 지식인 혁명가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의회를 무력화하고 독재 권력을 휘두르려는 위안스카이를 찾아갔다. 아직 신혼 때였다. 부채에 커다란 훈장을 매달고 총통부 문 앞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렇게 원세개의 나쁜 마음을 온 세상에 알렸다. 그 결과 베이징의 용천사에 2년간 연금을 당했다. 그리고 위안스카이가 주는 생활비로 만행을 일삼다가 반성문을 올리라는 요구에 "야심에 가득한 당신은 민국의 반역도이고 청 왕실의 죄인이니 나를 극형에 처해주면 영광스럽겠다"고 써서 위안스카이의 치를 떨게 만들었다.

장타이옌은 그 후로도 기행을 거듭했다. 두 번의 대총통, 세 번의 부총통을 역임한 정치가 리위안훙(黎元洪)과 가까이 지냈다. 만년 가난한 시절엔 흑사회의 대부 두위에성(杜月笙)과 두터운 교분을 가지기도 했다. 쑨원과 헤어져 공산당에 반대하고 항일운동도 열심히 했다. 그가 일본과 중국에서 키운 여러 제자들은 중국 근대를 이끈 뛰어난 학자가 되었다. 정치개혁을 꿈꾸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민보(民報)>에 실린 그의 글을 읽고 용기를 얻었다. 그들은 스승의 모습에서 지식인 혁명가의 모범을 찾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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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근

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 길림 대학교 문학원 및 한단 대학교 등의 겸임교수이다. 중국문화대학에서 '상군서' 연구로 석사 학위를, '순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가 사상의 현대화, 자유-자본-민주에 대한 동양 사상적 대안 찾기에 몰두하고 있다. <중국 사상의 뿌리>, <맹자 : 이익에 반대한 경세가>, <순자 : 예의로 세상을 바로잡는다>, <성왕 : 동양 리더십의 원형>, <중국의 정치 사상 : 관념의 변천사>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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