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은 '이상형 월드컵'이 아니다

[서리풀 논평] 다음 정권? '과정'이 더 중요하다!

무슨 유토피아를 바라지는 않는다. 탄핵이 된다고 뭐가 그리 갑자기 좋아지겠는가. 새 대통령 새 정권이라 해서 하루 아침에 아무런 갈등과 고통이 없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주리라 믿지 않는다.

그 때문인가, 주위를 돌아봐도 탄핵 이후와 대선 이후를 말하는 목소리에 힘이 없다. 장밋빛까지는 아니라도 뭔가 새로운 기운이 넘쳐야 할 텐데, 전망은 일상의 삶으로 힘 있게 들어오지 못하고 구경과 평론을 넘지 못한다. 정치적 효능감의 측면에서는 '합리적 무지'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 개인이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그래도 아쉬움은 크다.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 선거 이상의 정치적 기회는 드물다. 새로운,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발본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치열하게 논쟁할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가 아닌가. 그 기회가 지금 우리 눈앞을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다.

어떻게 몇몇 사람과 세력만 탓할 수 있을까. 그들(가장 좁게는 대선 주자와 정당을 말한다)과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그들은 점점 더 선거공학에 몰두하고, 우리는 점점 더 무력해진다. 상황을 반전시켜야 하지 않을까?

우선 야당에 큰 책임을 묻고 싶다. 여론 조사가 유리해서 그렇든 소위 대세론에 편승해 그렇든, 전망과 비전은 이미 집권한 정권의 분위기다. 우리가 집권하면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지난 10년 집권한 이른바 보수 정권과 무엇이 다른지 잘 모르겠다. 내가 더 경쟁력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무엇을 위한 경쟁인지 공허하기 짝이 없다.

미래를 말하고 교체를 내세우지만 몇몇 대선 후보의 약속은 내용조차 이해하기 어렵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말로 치장된 원리를 들어봐도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어서다. 공정, 투명, 협치, 권력 분산, 민주주의, 국민 행복. 하도 많아 무엇이 누구 이야기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가? 어떤 국가,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전망과 비전은 자괴감이 들 정도로 빈곤하고 초라하다. 아니, 잘 모르겠다. 경제성장, 사드 배치와 대북 정책, 재벌, 복지, 비정규 노동과 고용 유연화, 자유무역협정(FTA), 지식기반경제와 4차 산업혁명, 청년 일자리, 저출산, 국민연금, 건강보험, 갖가지 불평등. 온통 지금 그대로다. 왜 집권하려 하는지, 사람을 바꾸는 것 말고는 따로 이유가 없는가? 정권교체는 대통령과 장관, 공기관의 장 자리를 교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가?

정부조직 개편을 새로움으로 치장하지 말라.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아니라 겉모양을 바꾸는 것일 뿐이다. 무슨 위원회와 새로운 부처, 조직의 이합집산은 전망과 비전의 출발이 아니라 그 결과여야 한다.

어쨌든 정권이 바뀔 것이라는 대세에 안심하고 있다면, 지금 이대로는 야당이 집권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경고하고 싶다. 우리는 이번 대선에서도 '1987년 체제'(또는 '박정희 체제')의 약속이 상황을 압도한다고 판단한다. 집권하고자 하는 정치세력들의 책임만은 아니지만, 그에 편승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대선에 나선 사람들과 정치 세력에 묻는다. 성장률 몇 퍼센트, 일자리 몇십만 개, 수출 얼마 식의 약속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가? 소득을 얼마 더 올리고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얼마 더 좋게 한다는 것은 어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약속은 시대착오적이다. 구체적인 공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틀과 패러다임을 문제 삼는다. 구체제형 경제, 그리고 그에 기초한 사회경제 '성장'은 그 무엇이라도 불가능할 것이고, 그런 기준이라면 다음 정권도 실패할 것이 뻔하다.

또 한 가지. 혹시 그런 외형의 목표를 달성한들 그것이 담고 있는 실제 내용, 즉 시민의 삶이 나아지고 좋아지는 목표와는 연결되지 않을 것이다. 경제성장률을 달성한 들, 또는 제4차 산업혁명의 깃발을 올린들, 의료비, 교육비, 전세 부담이 그대로면, 출산과 보육을 믿을 수 없으면, 노인은 그대로 가난하면, 그 정권이 잘했다고 할 것인가? 이 가혹한 불평등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다시, 정권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집권하고 좋은 정책을 잘 실행하면 충분한가? 다시 말하지만, 다음 정권이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정치, 경제, 사회의 새로운 전망을 내고 국가의 방향을 다시 잡는 일이다. 결과를 내지 못해도 실마리를 잡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니, 그렇게 주권자를 설득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 전 <서리풀 논평>에서 주장한 바를 되풀이해야 하겠다. (☞바로 가기 : 또 다시 '성장'을 말할 것인가)

"멀리 봐서 한국 사회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그것을 위해 다음 5년간 무엇을 어떻게 하려 하는지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시민을 '지도'할 비전과 이념, 철학을 내놓으라는 뜻이 아니다. 다시없는 기회에, 시민과 토론하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갈 초안을 제시하라는 것이다. () 주권자의 지금 생각이, 그 욕망이 어떻다고 핑계 삼지 말라. 정치 리더십이란 현실에 반걸음 앞서가면서 사람들의 삶 내면에 잠재된 의미를 끌어내는 것이 제 역할이다. 우리는 지금 한국 경제와 사회, 한국인의 삶이 대안 경제와 그 체제를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둘도 없는 정치적 기회를 놓치고 있는 사태에 대해서는 대선 주자와 정당에만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허약함과 빈약함의 결과 때문이겠지만, 지지와 선호는 좀처럼 '상품' 고르기를 넘어서지 못한다. 왜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 왜 그 정치 세력이 집권해야 하는지를 묻는 말에 전망과 비전, 정책, 정강,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능력 같은 판단 기준을 듣기 어렵다.

다음 정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요구와 바람도 희미하고 흩어져 있다. '크게' 바뀌어야 할 것이 차고 넘치지만, 누가 어떤 정부가 이 일들을 할 수 있는지 거론되지 않는다. 우리 연구소가 직접 참여한 건강보험료 체납 문제가 대표적 사례다. (☞관련 기사 : "건보료 장기체납, 200만가구 넘어…미성년자도 4000여 명")

문제 요약. 건강보험료를 6개월 이상 내지 않은 장기체납자가 200만 가구를 넘고, 장기체납자 중 과반수는 보험료 월 5만 원 이하의 '생계형 체납자'다. 장기체납자 중 만 24세 이하 청소년이 4만7000여 명, 미성년 장기체납자도 4000여 명에 이른다.

누구나 알 듯 이 문제는 건강보험제도를 열심히 잘 운용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 소득 파악을 더 잘하고 열심히 걷는 것은 정말 일부분일 뿐이다. 자세히 말할 겨를이 없지만, 건강보험료를 세금으로 바꾸거나, 건강보험과 의료급여를 통합하거나, 의료급여 대상자 수를 3~4배 이상으로 늘리거나 해야 한다.

모든 대안이 마찬가지. 실무와 기술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방향을 잡는 것이 먼저다. 정치의 문제, 정권의 문제, 대안 정책의 문제임이 명확하다. 대통령 선거는 이를 논의할 수 있는 기회이고, 주권자가 압박하여 그들이 방향을 잡게 해야 한다.

결국 우리의 힘이 중요하다. 우선, 여론조사와 이미지에 기초한 인기투표를 벗어나자. 대통령 선거가 '이상형 월드컵'이나 '연예대상'이 아닌 한, '공적' 고통과 문제를 해결할 전망과 실력을 들여다봐야 한다. 분위기에 휩쓸려 공허한 인기가 과학적 현실을 이기는, 이른바 '침묵의 나선'도 거부해야 한다.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견해는 실제보다 더 강해 보이고 그 반대의 의견은 약해 보였다. (…) 나선형으로 진행되는 그 과정에서 결국 하나의 견해는 공적 상황을 장악하는 반면, 다른 견해는 지지자들의 침묵으로 인해 대중의 인식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침묵의 나선> (엘리자베스 노엘레 노이만 지음, 김경숙 옮김, 사이 펴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모든 시민들이 스스로 비전과 요구를 말하고 집단으로 조직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지지를 드러낼 것이 아니라 할 일과 필요를 압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비전과 요구가 드러나고 커지며 공적 상황을 장악할 때, 그들은 결국 우리를 대표할 수밖에 없다. 대의 민주주의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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