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혁명
100만이 아니었다. 200만도 훌쩍 넘었다. 자그마치 600만에 달했다. 테헤란의 도로를 가득 메운 600만 인파가 단 한 명의 귀환을 목 놓아, 손꼽아 기다렸다. 아야톨라 호메이니이다. 이맘이, '선생님'이 돌아오신 것이다. 1964년 추방 이래 15년만의 귀국이었다. 1979년 2월 1일의 일이다. 이란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세기적인 사건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1949년 중국 혁명에 필적한다. 아니 기왕의 20세기형 혁명과 일선을 긋는 21세기형 혁명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지난 백년, 반체제 이념을 대표했던 사회주의도, 민족주의도 내세우지 않았다. '이슬람 혁명'이었다. 진보(progress)가 아니라 복고(復古)를 앞세웠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래 200년만의 이슬람의 응전이었다. 그러나 반동이나 복벽만도 아니었다. 세계사 최초로 이슬람 문명(古)과 공화정치(今)를 결합시킨 '이슬람 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 이로써 2500년 장구히 지속된 페르시아의 군주정도 막을 내리게 된다. 샤가 '지배'하는 王國(왕국)이 아니라,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지도'하는 民國(민국)이 수립된 것이다.
누구도 혁명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망명지 파리에서 테헤란으로 향하는 비행기, 긴장어린 적막감이 흘렀다. 무사 착륙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란의 전투기가 호메이니가 탄 민항기를 격추시킬 것이라는 소문이 흉흉했다. 마침내 사제복을 갖추어 입은 그가 테헤란 공항에 모습을 드러내자, 600만 인파는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알라는 위대하다.', '국왕은 하야하라.', '호메이니야말로 지도자이다.' 계엄령에도 굴하지 않았던 반정부 외침들이 일시에 쏟아졌다. 구호에서 상징하는 바, 이란의 혁명은 68혁명과도 전혀 달랐다. 신좌파 이론가들이 아니라 종교학자들이 최전선에 섰다. 대학보다는 모스크가 반체제 운동의 거점이었다. 이라크와 프랑스를 전전하던 호메이니 역시도 그의 설법을 테이프로 녹음해서 방방곳곳 모스크에 뿌렸다. 1979년 당시 테헤란에만 1000개를 헤아리는 모스크가 있었다고 한다. 그 오래된 신성한 장소에서 근대화=세속화=서구화 일방으로 질주하던 팔라비 왕조에 대한 전복 운동이 싹을 틔운 것이다. 그리하여 호메이니는 레닌이나 마오쩌둥, 호치민과 카스트로와는 결이 다른 인물이다. '뉴에이지(New Age) 혁명가'였다.
이슬람 공화국으로의 개헌이 국민투표에 붙여진다. 9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로 가결된다. 그러나 국내정치와 국제정치는 불가분이다. 더군다나 이란은 유라시아 지정학의 요충지에 자리한다. 이란의 동쪽은 중국이고, 남쪽으로는 인도와 이어진다. 서쪽으로는 아랍/유럽과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소련과 접하고 있다. 그래서 냉전기 이란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페르시아 만의 헌병'이라고 불렸다. 중동 최대의 친미 국가가 이란이었다. 따라서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미국의 중동정책의 근간을 뒤흔드는 중차대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1975년 베트남전쟁 패배를 능가하는 충격이었다. 백악관 긴급비상회의를 소집한 이가 대통령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이다. '거대한 체스판'의 형세가 심대하게 동요했던 것이다.
이슬람 공화국 내부에서도 미국의 대응을 우려했다. 대학생 450명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여 52명의 외교관을 인질로 삼는다. 망명자 신세가 된 전 국왕이 암 치료를 위해서 미국에 입국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였다. 444일이나 이어진 이 사태로 양국은 국교를 단절한다. 복선이 없지 않았다. 1953년 CIA의 공작으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체제 전환"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이 바로 이란이었다.
1951년 수상으로 취임한 모사데크는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했다. 2년 뒤, 미국이 정권을 갈아엎었다. 자칫 산유국 전체로 자원 민족주의가 확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부와 정치권은 돈으로 매수하고, 언론을 움직여서 여론을 조작했다. 1979년 혁명만큼은 1951년처럼 죽 써서 개 주는 일을 허용할 수 없었다. 대학생들은 미 대사관의 각종 기밀문건들을 폭로한다. 군과 경찰, 정보기관, 행정부에 심어둔 미국의 스파이 명단이 낱낱이 드러났다.
이에 브레진스키는 다른 수를 두었다. 중동의 말(馬)을 바꾸기로 한다. 바로 이웃나라가 이라크였다. 마침 그곳에서도 1979년 새 지도자가 들어섰다. 이름이 사담 후세인이라 했다. 그를 지원키로 결정한 것이다. 이라크를 군사 원조함으로써 이란 혁명을 분쇄하는 以夷制夷(이이제이)를 취한 것이다. 그리하여 발발한 것이 이란-이라크 전쟁이다. 장장 1988년까지 지속되는 중동 현대사 최장기전이었다. 양국 도합 100만이 희생된 처절한 전쟁이었다. 이라크는 이란에 비하여 인구는 절반, 영토는 1/4에 그치는 소국이었다.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장기전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 전쟁으로 이라크는 군부가 과대 성장하는 군사대국이 될 수 있었다. 걸프전쟁(1991)부터 이라크 전쟁(2003)까지 지속되는 '이라크 문제'의 씨앗이 이때 뿌려졌던 것이다.
사담 후세인이 바쓰당 출신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와 세속주의를 받드는 아랍 민족주의 정당의 후예였다. 이란-이라크 전쟁을 아랍과 페르시아의 대결이라고 선동했다. 호메이니는 후세인을 크게 꾸짖었다. 이슬람에서는 민족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이라크 인민들 또한 무슬림으로 한 형제일 뿐이라고 했다. 게다가 이라크에는 이란과 친근한 시아파가 다수였다. 이슬람을 기각하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바쓰당조차도 '서구적'이라며 비판한 것이다.
즉 호메이니는 이란-이라크 전쟁을 국가 대 국가의 전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수니파 대 시아파의 종교전쟁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무슬림 공동체, 움마의 대동단결을 수호하는 '성전'(지하드)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래서 전사자 또한 '순국자'가 아니라 '순교자'로 기렸다. 무슬림과 이교도 사이의 '이슬람 전쟁'으로 위치시킨 것이다.
나세르부터 후세인까지 '좌경화된 서구파'들을 교정하는 '문명의 충돌'로 이해한 것이다. 아랍 민족주의에서 이슬람주의로 반체제 이데올로기가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20세기와 21세기가 갈라지는 이행기였다. 이슬람 공화국이 출현함으로써 중동의 세력균형만이 아니라 담론구조 자체가 반전된 것이다. 과연 正名(정명)이야말로 혁명의 근간이다.
2. 독재
호메이니에 앞서 테헤란을 방문한 이가 있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다. 1978년 새해를 그곳에서 맞았다. 그만큼 미국과 이란은 돈독했다. 신년 만찬회에서 이란의 성취를 극찬했다. 중동에서 예외적인 '안정의 섬'을 이루었다고 칭송했다. 샤에 대한 상찬도 보태었다.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국왕'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카터가 떠나자 반정부 운동은 더욱 크게 일어났다. 그가 표방하는 '인권 외교'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1971년에는 세계 각국의 지도자와 귀빈들이 이란에 집결한다. 테헤란이 아니라 페르세폴리스였다. 북아프리카부터 중앙아시아까지 광활한 영역을 지배했던 아케메데스 제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곳에서 '건국 2500년'을 경축하는 성대한 행사가 열린 것이다. 전 세계의 최고급 포도주와 산해진미들이 페르세폴리스의 '만국(萬國)의 문'으로 운송되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영화를 20세기 이란의 발전에 포갠 것이다. 그만큼 샤는 자신만만했다. 근저에는 석유의 힘이 있었다. 이란산 석유가 유럽으로, 아시아로, 아메리카로 철철철 흘러나갔다. 반면으로 오일머니가 쏟아져 들어왔다. 1950~60년대 미국의 원조를 받던 이란은 1970년대 미국산 최첨단 무기를 가장 많이 구입하는 국가로 전변한다. 마침 시기도 절묘했다. 페르시아 만에서 영국이 물러나던 시점이었다. 바레인, 카타르, UAE 등이 독립했다. 영국의 공백을 이란이 메우기 시작한 것이다. 샤는 '페르시아 만의 헌병'으로 족하지 않았다. 1980년대 말까지 이란을 세계 5대 강대국의 반열에 올리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1976년 이슬람력도 폐지시킨다. 서력으로 바꾼 것도 아니다. 아케메네스 조에서 기산하여 1976년을 2505년으로 삼는 제왕력을 채택했다. 위대한 고대의 영광에 한껏 심취한 것이다. 1975년 출범시킨 새 정당의 이름도 '부흥당'이었다. 사실상 일당이 지배하는 이란 판 유신체제였다. 1975년 당시 40만 대군으로 성장한 군부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6만을 헤아리는 정보기관 요원들이 촘촘한 경찰국가를 지탱했다. 30만 관료들 또한 샤의 개발독재를 지지하고 수혜를 입는 부역자 노릇을 해주었다.
샤의 근대화=세속화=서구화를 가장 강도 높게 비판한 인물이 바로 호메이니였다. 외부세력의 이익을 충실하게 대행하는 '괴뢰정권'이라며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중동에서 이스라엘을 때 이르게 승인한(1960) 나라도 이란이었다.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와도 적극 협력했다. 이란의 정보기관 설립에 CIA는 물론이요 모사드까지 합작했던 것이다. 호메이니는 미국을 '대악마', 이스라엘을 '소악마'에 빗대었다.
특히 1970년대 미국인들이 일시에 테헤란으로 몰려든다. 동남아시아, 그 중에서도 인도차이나 출신들이 많았다. 1975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가 적화되면서 '반공주의' 임무에 실패한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살 길이 마땅치 않은 이들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이란으로 대거 이주했다. 1970년 8000명이었던 숫자가 1978년에는 5만 명으로 늘어난다. 양의 변화는 질적 변화를 수반한다. 게다가 이전에 거주했던 고급 관료들과는 질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술과 마약, 섹스와 폭력 등 사회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진다. 이슬람의 '경건한 삶'을 침해하는 향락과 부패의 상징으로 '아메리카'가 환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 테헤란은 남과 북으로 뚜렷하게 갈라졌다. 경건한 이슬람 문화가 지속되는 남부에 반하여, 북쪽에서는 아메리카 문화로 흥청망청했다. 이 낙차를 묵인하는 샤 정권에 대한 불만이 기층에서 차곡차곡 쌓여갔다.
1964년 호메이니의 추방을 촉발시켰던 사안도 미군지위협정 문제였다. 미군에 부속하는 민간인들까지도 외교관에 준하는 특권을 인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슬람적 공정'에도 위배될뿐더러, 근대적인 의미에서도 불평등조약이 아닐 수 없었다. 이슬람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며 경종을 울리다 나라 밖으로 쫓겨난 것이다. 호메이니가 가장 먼저 망명한 곳은 시아파의 성지인 이라크의 나쟈프였다. 그곳에서 <이슬람 율법학자에 의한 통치>라는 회심의 저서를 집필한다. 13회에 걸친 강의를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이란의 개발독재체제를 무너뜨린 사상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改新(개신)이슬람'이었음이 각별하다. 이란 현대사의 모순을 '독재 대 민주'가 아니라 '탈이슬람화와 재이슬람화'의 길항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미국의 우산 아래 유라시아의 동서남북으로 번성했던 개발독재체제 가운데 가장 먼저 '민주화'를 이룬 나라가 이란이었다.
그 이란판 민주화를 상징하는 건물도 미 대사관이다. 이란에는 군대가 둘이다. 첫째가 일반적인 국군이요, 두 번째가 이슬람 체제를 수호하는 혁명방위대이다. 전자가 세속적인 군대라면, 후자는 종교적인 군사조직이다. 국군은 나라를 지키고, 혁명방위대는 이슬람을 수호한다. 그 혁명방위대가 옛 미 대사관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거리의 이름 또한 극적으로 바뀌었다. 이슬람 혁명 이전 테헤란에는 케네디 대로, 루즈벨트 대로, 엘리자베스 2세 대로 등 영미권 지도자의 이름을 딴 곳이 많았다. 지금은 단 하나도 없다. 역사적으로 명성이 높았던 이슬람세계의 사대부, 울라마들의 이름으로 죄다 바꾸었다. 샤의 독재체제 타도로 내부세력을 척결한 것이 제1혁명이었다면, 개발독재의 후견인 노릇을 했던 외부세력을 근절한 것이 제2혁명이었던 것이다. 이를 통하여 정권교체와 체제교체를 넘어 '시대교체'를 이룰 수 있었다.
3. 유언
호메이니가 숨을 거둔 것은 1989년 6월 3일이다. 이맘의 장례식에는 900만 명이 참배하여 애도를 표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1983년에 미리 유서를 써두었다는 점이다. 맑은 정신이 유지되고 있을 때, 그의 사상과 이상을 압축시킨 문헌을 남겨둔 것이다. 나의 페르시아어 실력으로는 완독해낼 수가 없었다. 일본어 번역본을 참조하여 읽어보았다.
이슬람을 두 종류로 분류한다. '예언자의 이슬람'과 '아메리카의 이슬람'이다. '예언자의 이슬람'이란 본래의 이슬람, 진정한 이슬람이다. '아메리카의 이슬람'은 似而非(사이비) 이슬람이다. 혁명 이전의 이란 사회도 사이비 이슬람이었다. 사회 전 영역에서 이슬람법이 시행되지 않았다. 성장과 발전만 섬길 뿐 정의와 공정을 방기함으로써, 勸善懲惡(권선징악)이 흐려지고 말았다. 사우디아라비아도 사이비 이슬람으로 지목하고 있다. 억압자(사우드 왕가)와 식민지배자(미국)에 봉사하는 체제 이데올로기로 이슬람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도 일갈을 고한다. 처음에는 선교사를 보내 개종시키려고 하더니, 나중에는 사법제도와 정치제도 등을 통하여 이슬람을 무력화시킨다는 것이다. 십자군 전쟁의 연속으로 20세기를 파악했다.
그리하여 유언으로 재차 고수한 것이 이슬람 율법학자의 통치론이다. 울라마의 정치적 역할을 강조했다. 이슬람을 부정하는 세속화 세력만큼이나, 종교의 정치 불개입을 주장하는 종교학자들도 비판했다. 무릇 修己(수기)와 治人(치인)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自利(자리)와 利他(이타)도 불가분이다. 본디 사회적 종교이자 정치적 종교로서 대승적 성격이 농후했던 이슬람이 20세기 서구화의 영향 아래 소승화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세속을 경건하게 만들어가는 책무를 國是(국시)로 삼는 이슬람 공화국을 옹호했다.
그 이슬람 공화국의 청사진이 전혀 새로운 것만도 아니다. 16세기 사파비드 제국에서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받아들인 이래 일관된 것이었다. 교계 내부의 '세속화'가 일어난다. 시험을 보게 한 것이다. 울라마의 능력과 자질을 평가하는 수험체계가 도입되었다. 송나라의 과거 제도가 몽골제국의 우산 아래 페르시아세계까지 확산된 것이다. 그 객관적 지표를 바탕으로 왕권으로부터 독립한 권위를 누릴 수 있었다. 군주가 혈통을 이었다면, 율법학자들은 도통을 쥐고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던 것이다. 교육과 결혼, 상속 및 상거래 등 일상생활의 거개를 울라마들이 관할했다. 건전하고 건강한 이슬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성과 속의 상호보완이 필요함이 '사회계약'으로 확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반천 년 누적되었기에, 1979년 이슬람 혁명도 가능했다고 하겠다.
호메이니는 근대 정치의 병폐 또한 좌와 우의 대결에서 구하지 않았다. 성과 속의 균형이 깨진 것이야말로 병통이라고 여겼다. 우파는 가진 자의 욕심을 더욱 채우려는 세력이다. 좌파는 못가진 자들의 욕심을 대변하려는 세력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 편중되고 편향된 것이다. 어느 쪽도 양심을 충족시키는 일에는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다. 양심을 일깨우고 만족시킨다면 좌와 우의 분별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국민들이 욕심(이익)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을 선출하여 의회를 구성하는 만큼이나, 보편적 양심을 수호하는 율법학자들의 역할 또한 지속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이란은 성과 속의 이원집정제 국가이다. 의회와 대통령은 민심을 대의하고,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천심을 대변한다. 중세의 종교국가도 아니고, 근대의 세속국가도 아니다. 이슬람문명 독자의 공화국일 뿐이다.
호메이니는 성과 속의 균형이라는 점에서 테헤란이 워싱턴이나 모스크바, 바티칸보다도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슬람의 세기'가 머지않았음을 의심치 않았다. 숨을 거두기 직전인 1989년 1월,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에게 편지를 보냈음이 흥미롭다. 장차 공산주의는 고고학 박물관에서나 보게 될 것이라며 소련의 해체를 당돌하게 예견했다. 무엇보다 과학적 유물론의 폐해가 지나쳐 영성이 부재함이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했다. 소련의 미국화(=세계화)도 미리 걱정해 주었다. 아메리카의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의 늪에 빠져들기 전에 서둘러 이슬람을 공부할 것을 권장했다. 이슬람을 대표하는 철학자와 사상가들의 저서를 선물로 보냈다.
말로만 그치지도 않았다. 삶으로 본을 보였다. 호메이니는 그 파란만장한 일생만큼이나 반듯했던 일상으로도 유명하다. 단단한 일상이 있었기에 굴곡진 일생을 지탱할 수 있었다. 그의 일상이 널리 알려진 계기 또한 망명생활 탓이었다. 파리 교외에서 지내던 4개월 간,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방문자들과 담소하는 시간마다 카메라들이 진을 쳤다. 그 가운데는 당대를 주름잡던 철학자 미셸 푸코도 있었다. 근대성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에서 푸코는 호메이니와 통하는 바가 있었다. 푸코가 말년에 집필한 <성의 역사>의 제3권 '자기에의 배려' 또한 호메이니와의 교감 속에서 착상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호메이니의 일상이야말로 '자기 수양'으로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같이 새벽 3시에 일어났다. 이른 시각에 원고를 집필하고, 편지를 쓰고 읽었다. 외국어 신문 읽기도 새벽의 주요 일과였다. 그리고는 아침 기도를 올린다. 식사 시간은 7시였다. 9시까지는 이란의 신문을 읽고 뉴스를 들었다. 10시까지 휴식을 취한다. 다시 기도를 드리고 12시에 점심을 들었다. 2시부터 3시까지는 낮잠을 취했다. 한숨 자고 일어난 3시부터 정무에 종사했다. 망명지에서 이란의 혁명을 진두지휘했다. 와중에도 기도는 빼뜨리지 않았다. 세속의 업무 중간 중간 기도를 올리며, 正心(정심)을 흩트리지 않았다. 경전에 거하면서 경세에 임한 것이다. 저녁은 9시가 되어서야 간단하게 들었다. 밤 11시 취침 전까지는 외국의 페르시아어 방송, 특히 BBC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 가끔은 TV 방송을 통하여 축구 경기를 보는 것이 소소한 낙이었다.
예배와 강의는 귀국 이후에도 이어졌다. 특히 청년들을 위한 철학 강좌를 열었다. 여기서 설파한 것이 '有德(유덕)도시'론이다. 유덕한 지도자와 깨어있는 민중들이 공동선을 향하여 협동하는 아름다운 도시를 일구자고 했다. 그 내용을 살피노라니 플라톤의 <국가>가 떠오른다. 철학적 이상도시이다. 희랍어 고전이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번역되어 이슬람 세계에서 천 년간 널리 읽혀왔음을 재차 확인케 된다. <국가>에서 묘사되었던 철인왕국의 근대화로서 이슬람 공화국을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플라톤과의 차이라면 '대(大) 지하드'라는 어휘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자기정화에 이르는 자신과의 싸움을 지칭한다. 세상을 바꾸는 첩경은 나를 바꾸는 것이었다. 내 안의 인성을 갈고 닦아 신성에 이르는 길, 나의 본성을 연마하고 조탁하여 천성을 발휘함으로써 성자에 달하는 것을 대지하드라고 일컬은 것이다. 공맹 식으로 옮기자면 內聖外王(내성외왕)이 아니었을까 싶다. 서쪽의 철인정치와 동쪽의 성인정치가 유덕도시에서 합류했다. 文史哲(문사철)에만 달통했던 것도 아니다. 詩書畵(시서화)에도 능했다. 특히 시 짓기를 좋아했다. 공개 발표한 적은 없다. 다만 편지를 보낼 때마다 시 한 수씩 지어서 정감을 나누었다. 사후에 그의 시편을 모아서 편찬한 책이 <사랑의 와인>이다.
테헤란 북부 쟈마란에는 그가 말년을 보냈던 집이 보존되어 있다. 10평 남짓한 방에는 코란과 예배용 용기, 그리고 몇몇 신문과 라디오가 보인다. 테라스에는 긴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책도 읽고 사색하고 담소도 나누었을 것이다. 책장에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프랑스어로 된 장서들이 꽂혀 있고, 조그마한 침상 옆에는 낡은 고무 샌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평생토록 청빈한 삶을 고수했던 인물이 호메이니이다. 지도자일수록 생활은 서민처럼, 혹은 그보다 더 소박하고 검약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기 때문이다. 아니 아랫물은 조금은 흐리고 탁해도 된다. 그래야 피라미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윗물이 썩으면 만물이 썩기 마련이다. 이슬람 세계의 경건한 지도자, 이맘의 전범을 보이고 돌아가신 것이다. 그의 시신을 안치한 영묘조차도 검소하다 못해 초라해보였다. 그간 내가 보아왔던 마오쩌둥, 호치민, 부토의 영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종종 그를 절대적 권력자나 종교의 화신으로 묘사하는 글을 접한다. 혹은 '악의 축'이나 독재자라는 상투적인 수사도 잇따른다. 하나만 설피 알고, 열은 모르는 뚱딴지 같은 소리다. '무지의 시대'(자할리야), 눈먼 자들의 무엄한 망발이다.
4. 파문
육신은 가셨지만, 말씀은 남았다. 이슬람 혁명의 파문은 이란으로 그치지 않았다. 국경 밖으로도 파장이 일어났다. 일파가 백파 천파, 만파가 되었다. 아라비아 반도, 메카에 있는 대모스크를 100여 명의 이슬람주의자들이 점거한 사건이 1979년 11월에 일어난다. 사우드 일가의 통치 이념으로 전락한 이슬람을 처분하고 진정한 이슬람을 회복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이 역할 모델로 삼은 것 역시 이란이었다. 특공부대 투입으로 체포된 이들 가운데서 호메이니의 사진이 나왔다. 동쪽으로 이웃한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무자헤딘이 봉기한다. '좌파 세속주의'를 강요하는 소련의 속국 상태를 거두고 이슬람 혁명을 이루고자 했다. 이란이 미국의 '자유주의 제국주의'에 맞서서 이슬람 혁명을 쟁취했듯이,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사회주의 제국주의'에 떨쳐 일어나 이슬람 혁명을 성취코자 한 것이다. 백색도 적색도 아닌 녹색 깃발을 들자, 수많은 무슬림들이 의용병으로 참전했다. 그곳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소련은 침몰되어 갔다(1991). 그리고 10년 후 그 무자헤딘의 후예들(알카에다)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상징적 건물인 뉴욕의 세계무역빌딩도 폭파시킨다(2001). 1979년 이란 혁명의 파문이 탈냉전을 촉발시키고 21세기를 격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중동의 지정학도 요동치고 있다. 이슬람에 공화정을 접속시킨 혁명국가의 등장은 나세르 시절의 세속주의 공화정보다 더욱 큰 위협이었다. 서방의 획책으로 분할된 영토에서 영주처럼 군림하던 인공국가들의 지배자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었다. 1981년 9월 쿠웨이트,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오만, UAE가 서둘러 걸프협력기구(GCC)를 형성한다. 왕정국가들이 연합하여 공화혁명의 확산을 저지코자 했다. 그럼에도 35년이 지난 2016년 현재, 이란의 영향력은 아랍세계 전반으로 미치고 있다.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시라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예멘의 수도 사나까지 테헤란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도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에 정신분석학을 결합한 프란츠 파농을 읽지 않는다. 새천년 좌파 세속주의자들을 대체하여 이슬람주의자들이 집권한 것이다. 21세기의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알제리, 튀니지,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모로코, 파키스탄, 그리고 터키까지 이슬람 세계는 온통 1979년 이란 혁명으로부터 정치적 영감을 얻고 있다.
즉 어느새 이란은 근대국가의 울타리를 훌쩍 넘어서 페르시아 세계의 좌장 역할을 복원해가고 있다. 동쪽으로는 인도의 펀자브 지방부터 서쪽으로는 이집트까지,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반도부터 북쪽으로는 흑해 연안까지를 폭넓게 아울렀던 것이 페르시아 세계였다. 이란의 21세기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지난 백년의 이란사만이 아니라 누천년 페르시아 문명사를 겹쳐 보아야 하는 까닭이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떠나 향한 곳은 사파비드 제국의 황도 이스파한이다. 한때는 '세계의 절반'이라고 불리었던 찬란한 유덕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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