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케이블카, 박정희 정권의 초법적 유물

[함께 사는 길] 가을 설악산을 바라보는 몇 가지 단상

10월 첫 주말, 설악산 오색지구 만경대가 46년 만에 개방되었다. 설악산이 국립공원이 되고 난 후 처음이라고 한다. 그날 TV에 비친 흘림골 입구의 등산객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연휴 사흘 동안 전국 각지에서 1만 8000여 명에 이르는 등산객이 몰렸다니, 가을 설악의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그들은 수십 년 비장(備藏)되었던 설악의 내밀한 비경(祕境)을 먼저 보는 흥분과 함께 그곳에서 저 혼자 피고 지던 단풍을 만나는 기쁨을 누렸을 것이다. 반면, 마흔 해가 넘도록 조용하게 살았던 나무와 바위와 짐승들은 밀려오는 인간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또 얼마나 놀랐을까, 나는 그런 걱정을 했다.

ⓒ이상국

직장과 집을 놔두고

설악은 험한 산이다. 깊은 골짜기와 치솟은 봉우리들이 곳곳에서 절경을 연출하며 모든 길과 능선은 주봉인 대청봉에 가 닿는다. 그리고 단풍은 그곳에서 발화하여 한반도의 남쪽으로 내달리는 것이다. 어느 시인은 설악에 한 번 오르면 적어도 한 달 이상은 산의 기를 간직할 수 있다고 한다. 산의 기운과 육체성이 사람의 정신에 깃드는 것일 게다.

설악산의 진경은 아무래도 가을이다. 주전골이나 천화대, 그리고 마치 하늘의 동굴 같은 천불동의 뛰어난 경관과 단풍은 삶의 시름과 세간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에 충분한 자연의 선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회만 되면 자동차나 컴퓨터를 버리고, 직장과 집을 놔두고 산을 찾는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소진된 기운을 되살리고 위로받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산은 거대한 기운의 저장고이고 자연은 또 다른 피안(彼岸)이다.

무박이일(無泊二日)

모든 산은 신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 조상은 그 신성을 산신령으로 구체화하여 삶 속으로 끌어들였다. 곳곳에 있는 산신각에 가면 지금은 한반도에서 사라진 호랑이를 데리고 다니는 산신령을 만날 수 있다. 우환(憂患)을 피하거나 액을 풀고자 하면, 명산대천에 치성을 드려 그 영험한 기운을 빌리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산을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소비재쯤으로 여기는 경향도 없는 게 아니다. '무박이일' 등산이라는 게 있다. 랜턴을 머리에 붙이고 한밤에 오색을 출발해 대청봉을 경유하여 아침에 설악동에 도착하는 깜깜히 등반이 그것이다.

해가 지면 나무나 짐승도 쉬게 마련이다. 바위나 미물도 잠을 자야 한다. 잠든 그들의 몸을 밟고 가는 산행은 산에 대한 모독이고 폭력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도대체 캄캄한 밤에 도둑처럼 산을 넘어 무엇이 남을까?

산신령은 산의 주인이다. 무엇이든 주인이 불편해하거나 귀찮게 여기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은 것이다.

봉정암과 헬기

지난해 여름 대청봉 가는 길에 봉정암에서 일박하며 산속의 산으로 해지는 풍경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장엄했다. 마치 국토의 신성함과 지구별의 평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어디선가 헬기가 날아와 절 마당에 쌓아놓은 생활쓰레기들을 그 아래 어디쯤 실어 나르는 걸 지켜보며 그야말로 별걱정을 다했다. 알다시피 봉정암은 아슬아슬한 바위 봉우리들로 병풍처럼 에워싸인 곳이다. 그런데 헬기의 프로펠러가 휘젓는 엄청난 소용돌이가 그곳에 조금씩 균열을 내 언젠가는 그 바위들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던 것이다.

나의 상상력은 자유이고 그런 상상이야말로 기우에 불과할지 몰라도 초록의 수해 속에 잠겨 있는 천년의 암자 위로 폭발적인 기계음과 함께 거대한 숲을 소용돌이치게 하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그리고 불길하게 보이기도 했다. 해발 1000여 미터, 암자, 등산객, 쓰레기, 헬기 이런 것들이 상상력을 자극했고 나는 경이로우나 반자연적인 그 광경을 오래 지켜보았다.

ⓒ이상국

터벅터벅 걷는 산길

설악산 아래서 나고 자란 나는 설악산을 대상화하거나 타자화하기 어렵다. 나는 높고 험한 곳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좀체 가지 않는다.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내 산이기 때문이다.

울산바위나 권금성만 올라도 세상을 굽어볼 수 있으며 비선대쯤만 가도 단풍은 서늘하게 빛나고 폭포는 숨차게 떨어진다. 그러나 권금성은 요금을 내고 케이블카를 타야 한다. 설악산 등반길 중 비용을 지불하는 유일한 곳이다. 그래서 케이블카를 보는 마음은 불편한 게 사실이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그것은 박정희 정권이 특정인에게 준 초법적 특혜의 유물이다. 국립공원은 국민의 것이다. 거기서는 누구나 바위 덩어리 하나 나무 한 그루 맘대로 할 수 없다. 모든 게 공유인 까닭이다. 그 국립공원의 일부를 수십 년 독점적으로 이용하여 막대한 사적 이익을 챙긴다는 게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능한 일일까?

내가 불편하다는 것은, 일테면 '나의 산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이 돈을 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서다. 뿐만 아니다. 요즘 오색에서 끝청 간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에 대한 찬반 문제는 우리나라 환경문제의 초대형 이슈다. 나는 그 구체적 내용을 잘 모른다. 다만 수십 년 동안 불가하던 그 사안이 어느 날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허가로 돌아서는 이런 나라는 정상적인 나라는 아니다. 주민을 위한 사업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자본가들에게 설악산을 갖다 바치는 것 외에 아무 가치가 없는 일이다. 산은 터벅터벅 걸어서 가면 된다.

산속의 길, 산의 향기

설악산은 인제, 고성, 속초, 양양의 4개 시군에 걸쳐 있고 지역마다 이름난 등반 코스와 갖가지 설화와 전설들이 숨 쉬고 있는 곳이 많다. 등산 문화가 많이 변하긴 했지만, 몇 시간 만에 어느 능선을 주파하고 몇 번을 다녀왔다는 속도와 기록에 애쓸 필요가 없다. 올 가을에는 주전골, 내년 봄에는 천불동 계곡 이렇게 여유를 가지고 즐기는 게 산에게나 사람에게나 좋은 일이다. 그러면서 산의 몸만 보지 말고 산이 가진 역사와 그 자락이 안고 있는 인문적 향기 속에 들어가 보는 것도 유익한 일일 것이다. 가령 <삼국유사>를 남긴 일연스님이 열네 살에 출가하여 스물두 살까지 수도했다는 외설악 진전사와, 생육신이자 조선의 천재 시인이었던 매월당이 머물며 '세여불합(世與不合)의 한'을 삭혔다는 내설악 오세암, 그리고 근대문학 100년의 한 진경인 시 '님의 침묵'을 남긴 만해의 출가 사찰, 백담사와 백담계곡의 승경을 탐방하는 것도 설악산을 즐기는 한 방법일 것이다. 길은 어디로든 이어진다.

ⓒ이상국

물감 같은 눈물들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이다. 그리고 무엇하나 경외심 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게 자연이다. 몇십 년이나 우주를 날아 어느 별에 착륙선을 내려보낸 과학의 힘이나 거대한 도시 문명도 가을날 나무를 떠나는 한 장의 낙엽이나 바위틈에 뿌리내린 풀 한 포기가 갖는 생명의 경이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아무튼, 가을이다.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에 만산홍엽 속으로 들어가면 저절로 힘이 나고 즐겁다. 그리고 저 밖 세간의 일이야 거기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게 산행의 즐거움이다. 이 가을에도 화채봉이나 천화대 어디쯤에서 사람들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오묘한 산색에 매료되어 탄성을 울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단풍들은 다음 해를 기약하며 나무와 헤어지고 있을 것이다.

나무는 할 말이 많은 것이다 / 그래서 잎잎이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다 / 봄에 겨우 만났는데 / 가을에 헤어져야 한다니 / 슬픔으로 몸이 뜨거운 것이다/ 그래서 물감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계곡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 졸시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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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길

월간 <함께 사는 길>은 '지구를 살리는 사람들의 잡지'라는 모토로 1993년 창간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를 위한 보도, 지구적 지속가능성을 지키기 위한 보도라는 보도중점을 가진 월간 환경잡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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