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밥 먹을 텨?"

[함께 사는 길] 그 도토리가 묵밥이 되려면…

365일 중 300일을 야근하는 터라, 하루걸러 하루는 심야의 라면을 끓여 '후루륵' 마셔버리는 야식 생활에, 결국 위산이 역류하는 식도염이 생겼다. '신물이 난다'는 말의 뜻을 제대로 알게 된 뒤, 의사가 권하는 식습관을 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밤늦게 먹지 말 것! 간이 센 음식도 먹지 말 것! 그 두 가지 요구는 간이 안 맞는 음식을 참고 먹어야 하고, 새벽의 공복을 견뎌야 하는 인내를 요구했다. 먹을 것을 가려야 하는 '맛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점차 간보다 재료가 주는 맛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가 알게 된 사실은 우선 나는 육(肉)고기거나 해물이거나 두 발 달린 가금(嘉禽)이거나 간에, 육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탄수화물을 충분하게 못 먹으면, 우울해지는 사람이었다. 남들이 쓰다는 산채와 채마(菜麻)를 맛있다고 먹는 사람이기도 했다. 생전 처음으로 내가 어떤 음식을 달게 먹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면서 나는 내가 소백산맥 줄기의 산지에서 유소년기를 보낸 산골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서울의 달을 30년 동안 봐오면서 '아부지와 엄니'도 안 계신 고향을 기억하는 일이 쉽진 않다. 그래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내 입맛의 본향이 여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 입맛의 정체를 알게 되자,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직장 나가는 엄니 대신 날 기른 외할미는 아흔둘에 고향 가까운 곳에서 돌아가셨다. 노환이 깊어지기 전까지 뵈러 갈 때마다 그이는 흙 밭을 기며 딴 머위잎으로 담근 장아찌를 밥 위에 올려놓아 주거나 노각으로 냉채를 만들어 주곤 했다. 그이가 가시고, 내가 마음이 헛헛했다는 것의 반 이상이 입이 헛헛했다는 것과 같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이제 아무도 심장이 헛헛할 때 그걸 가시게 해줄 먹을거리를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지금 먹고 싶은 것은 그래, 묵사발이다. 묵밥이다.

기상 관측이 시작된 지 130여 년 이래 가장 더웠던 여름 한낮과 폭염의 밤이 저물자, 밤 바람이 '제법이다' 싶게 차다. 요즘은 한 여름 음식으로 먹는 게 당연하다 여기지만, 사실 묵사발은 가을이 깊어갈 때부터 먹는 음식이다. 묵사발은 우리 산골에서는 얼음 동동 띄운 여름 음식이 아니라, 뜨끈한 멸치국물을 끼얹어 찬밥을 한 술 넣어 알알이 풀어진 밥알과 미끄덩거리며 숟가락에서 빠져나가는 새끼손가락 굵기의 묵채를 함께 떠먹는 국밥에 가까웠다. 짜기만 해서 짠지라 부르던 김치도 채를 썰어 넣었다. 그 외 어떤 것도 없었다. 요즘이야 김 가루를 뿌린다, 깨를 갈아 올린다 하지만, 우리 할미는 그런 게 없었다. 그저 밥상머리에서 "더 머거어!" 하며 국물을 한 국자 부어주고 당신 자시던 밥을 덜어 주실 뿐이었다.

ⓒ연합뉴스

묵밥을 할미한테 얻어먹던 그때는 곱돌광산 광부가 된 할배를 따라 할미가 우리 집을 떠났을 때다. 할미가 보고 싶으면 완행버스 요금을 받는 이름만 시내버스를 타고 '목벌'에 갔다. 우리 동네서 곱돌광산이 있던 목벌을 가려면 '마즈막재'를 넘어야 한다. 그 재를 넘고도 단양을 거쳐 흘러내려 온 남한강을 끼고 우거진 산봉우리들 사이를 오래도록 휘돌아가야 했다. 지금이야 길이 좋아졌지만, 근 40년 전 그때는 경기도 초입으로 가는 시간이나 '계명산'과 '남산'의 골 사이를 돌아 목벌까지 가는 시간이나 비슷했다.

중학교 1학년 때의 가을이었을까 싶다. 굴피를 얹은 지붕이 반, 부엌 쪽은 함석지붕이었던 할미와 할배의 집 위쪽은 밤이면 '으슬'한 느낌이 드는 깊은 산이었다. 할미와 나는 그 숲에 가서 도토리를 한 광주리 넘게 주어왔는데, 할미는 내가 주어온 도토리 중 어떤 것은 골라내 버리고 내가 보기엔 작아서 볼품없이 길쭉한 도토리와 동글동글 알도 굵은 도토리만 남겼다. 말하자면, 졸참나무와 상수리나무 도토리만 골라낸 것인데 그렇게 가을 서너 주 동안 도토리를 걷으러 다녔다. 그 도토리가 묵밥이 되려면, 지난한 시간이 필요했다.

할배는 군화보다 밑창이 우둑한 작업화로 강가에서 주어온 넓적한 돌판 위에 잘 마른 도토리를 올려 잘근잘근 밟아 껍질을 깼다. 잔 정리는 내가 했다. 할미는 알을 다듬고 씻어 다시 말리고, 그 말린 것을 찧어 가루를 만들고, 가루에 물을 부어 가라앉혀 앙금을 냈다. 그 앙금을 걷어 베주머니에 넣고 물을 부어 짜내 전분 내기를 수차례 한 뒤 중솥에 넣어, 그제야 묵을 쒔다. 눌어붙지 말라고, 긴 나무주걱으로 쉬지 않고 2시간 이상 저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한 20분 저어보다가 그만 짜증을 내고, 수석을 줍겠다며 강변으로 달아났다.

종일 강변과 산을 휘돌며 놀다 들어올 적에 집으로 올라가는 비탈길 중간부터 슬쩍 비리고, 또 많이 구수한 국물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할무니, 나 밥!" 다짜고짜 배고프다 성화하면, 할배는 벽에 걸린 작은 밥상을 내려 다리를 폈고 할미는 묵채를 내 대접에 앉히고 짠지를 썰어 올리고 산나물 찐 것도 한둘 잘게 썰어 넣은 뒤 멸치국물을 부어줬다. 거기다 정말이지, 참새 눈물만큼 들기름을 똑 떨어뜨렸는데, 찬밥과 말아먹는 그 묵밥은 달고 달았다. 이 사이 낄 것도 없는 밥을 먹고 할배는 습관처럼 이를 쑤시며 라디오를 켜 흘러간 노래를 듣거나, 오직 하루하루 숫자만 인쇄된 습자지처럼 얇은 종이로 엮은 달력에 그날의 일기를 적었다. 어떤 날의 일기는 '큰놈 와씀'. 또 어떤 날은 '묵을 쑤엇씀'이라고 적혔다. 밤이 깊어 단칸방의 윗목에서 할배가 담배를 물면 할미는 "애 자는데 나가 펴유" 하시고, 나는 잠이 들락 말락 하다 그 소리에 깨어 "배 고퍼" 했다. 할미는 암말도 않고 나가 솥을 긁어 꼬들꼬들한 묵 누룽지를 조금 가져다주고, 내가 미처 한 입을 씹어 삼키기도 전에 도로 잠이 들 때 라디오는 느릿한 옛 유행가를 불렀다.

묵사발이다, 묵밥이다, 간판을 내건 집이 많다. 도토리도 묵 가루도 죄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고 아궁이에 불을 때 제집 식구 입에 들어가는 묵을 직접 쒀먹는 집도 없는 세상이라, 먹으면 마음이 가득 차는 묵밥을 먹을 데가 없다. 이상한 묵들이 '나도 묵'이라 하지만, '참 묵'은 별미가 아니라 자식과 손주들 입에 넣어줄 게 산이 준 도토리밖에 없는 사람들이 품을 팔고 수고를 다해 만든 그런 묵이다.

따로 철도 없는 음식들이 고향과 나라도 없이 붐비는 시대에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일까마는, 편히 자주 먹게 된 게 잘 먹게 된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제철에 제값을 치르고 먹어야 제대로 된 음식이다. 그런 음식이라야 먹고 나서 헛배 부르지 않고 마음도 찬다. 적게, 그러나 제대로 먹을 궁리해야 산짐승 먹이를 사람이 다 쓸어 먹는다는 비난도, 중국산 도토리를 국산으로 속인다는 밥집 사기에 대한 험구(險口)도 줄 것이다.

올해 아직 한 번도 안 먹은 묵밥을 이 가을이 지나기 전, 어디 가서 먹어봐야 할 텐데…. "묵밥 먹을 텨?" 누가 물어봐 줬으면 싶다. 그가 마음이 허하다면, 우리는 서로 응원하는 기운으로 속이 차오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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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함께 사는 길>은 '지구를 살리는 사람들의 잡지'라는 모토로 1993년 창간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를 위한 보도, 지구적 지속가능성을 지키기 위한 보도라는 보도중점을 가진 월간 환경잡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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