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다녀왔다. <유라시아 견문>(서해문집 펴냄) 1권이 나왔다. 책 팔러 다녔다. 처음에는 성정에 맞지 않다고 여겼다. 사람들 앞에 서고, 얼굴 팔리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다. 국회에서 열린 첫 토크쇼부터 피로감이 몰려왔다. 역시 대학으로 돌아가서 교수나 해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재미가 늘었다. 말은 글과는 또 다른 소통 방식이었다. 직접적이고, 감정적이었다. 그래서 더 人間(인간)적이기도 했다. 글처럼 절차탁마, 조탁할 수가 없었다. 눌변을 고스란히 노출시켜야했다. 즉응적이고, 즉흥적이었다. '다른 백년'에서의 마지막 강연은 어느새 즐기고 있었다. 은근한 아쉬움마저 일었다. 이제 탄력이 붙었나 싶으니, 한국을 떠나야 할 시점이었다.
무척 많은 사람을 만났다. 매우 많은 술을 마셨다. 무진장 많은 말을 뱉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 평소에 말수도 극히 적은 편이다. 1년간 마실 술과 쏟을 말을 한 달 만에 해치우고 온듯하다. 탓에 글은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러나 미련은 조금도 없다. 기를 듬뿍 받았다. 힘을 한껏 얻었다. 방전되는 줄만 알았는데, 실은 충전되고 있던 것이다. 심기를 일전했다. 초심을 새기고 심호흡을 다지며, 견문의 후반기에 나서게 되었다. 지난 한 달, 나와 눈을 맞추고 말을 섞으며 기운을 나누었던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그 중에서도 네 번이나 만난 분이 있다. 사적으로 한 번, 공적인 자리에서 세 번. 윤여준이다. 흔히 "장관님"이라고 부른다. 나는 "선생님"이라고 한다.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도 있다. 특히 오래된 지인일수록 고개를 갸웃거린다. 뾰족한 화살이 날라 오기도 한다. 내가 이상해졌다는 것이다.
독재 정권에서도 공무를 수행했던 분이다. '부역자'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에도 내가 지지하던 진영의 반대편에 서 계셨던 분이다. 그냥 계신 것도 아니다. 맞은편에서 전략을 짜고 기획을 세우던 적수이고 적장이었다. 그래서 "보수의 책사"라고도 불린다. 더 고약한 수식어도 있다. "기회주의자"라는 꼬리표이다. 문재인과 안철수, 남경필 등 여러 인물들이 그와 함께 회자된다. 자신이 권력을 취한 적은 없으나, 항상 최고 실력자의 지근거리에 있었다. 혹은 최고 권력을 얻고자 하는 이들의 옆자리에 있었다. 노련하고 노회한 지략가일 것이다.
어찌 그러한 분과 설익은 서생이 어울리게 된 것일까. '時運(시운)' 때문이라 여긴다. 내가 한창 생각이 바뀌어가던 무렵이었다. 진보-보수, 좌-우라는 껍데기에서 벗어나고 있던 시기였다. 서구 좌파에서 동아시아 좌파를 경유하여 '東方之士(동방지사)'로 귀의하던 참이었다. 유학과 한학과 동학으로 선회하고 있을 때, 우연인 듯 필연인 듯 그분과 교신을 트게 되었다.
직접 뵈노라면 흥미로운바 적지 않다. 국가를 오래 경영해본 관록을 갖고 계신다. 청년 시절 내가 배우고 따랐던 분들에게는 결여되었던 점이다. 다른 방향으로 습득할 점이 컸던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었다면 흥미는 덜했을 것이다. 이쪽에서도 10년간 국가를 운영해본 사람들이 제법 있다.
남다르게 인상적인 점은 그 분의 '선친'이라는 존재였다. "선친이 말씀하시기를~" 하며 입버릇처럼 얘기하신다. 아버지를 꼭 '선친'이라고 표현하는 방식부터, 그 '선친'이 하셨다는 말씀의 내용까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과 만날 때면, 늘 그 분의 선친과도 함께 만나는 기분이었다.
선친의 존함이 윤석오(尹錫五)이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 역할을 하셨다. 얼핏 친미파로 오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반대였다. 정통 한학자였다. 위당 정인보의 제자이기도 했다. 공자 왈, 맹자 왈 하면서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를 가르치고 타이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끝내는 말이 통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리를 거두고 속세를 등진다. 한학자이자 서예가로 여생을 나셨던 모양이다. 친일파들의 모략으로 낙마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죽산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입각시키는 등 파격적인 인사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윤석오가 떠난 이후 이승만의 말로가 어떠했는지는 부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국민들이 국부를 끌어내렸다. 잘한 것보다 잘못한 것이 더 많아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윤석오가 이승만의 오류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미국식 민주주의와 교육 제도를 그대로 이식한 것이라며 탄식했다는 일화가 귓등을 때렸다. '유학의 근대화', '동학의 민주화' 등을 한창 궁리하고 있던 나로서는 몹시 인상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근대화', '다른 백 년'의 가능성을 그 방향에서 탐구하기 시작하던 차에 마침 윤여준 선생과 인연이 닿은 것이다. 혹은 윤여준 선생을 매개로 윤석오라는 잊혀 진 인물과도 연을 맺은 것이다.
더 공교로운 점은 그 선친과 나의 어머니가 이름을 두 자나 공유한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성함은 윤석희이다. 아주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멀지도 않은 친인척 사이였다. 어머니에게 그 분에 대한 얘기를 청해 들을 수도 있었다. 혈연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혈연, 지연, 학연 따지는 것, 질색이다. 다만 내 핏줄 속에서, 내 의식 속에서 조선의 '文流(문류)'가 흐르고 있던 것이로구나 뒤늦게 자각하게 되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공부하며 신좌파임을 과시하던 '신청년'이 동학파로 귀환하기까지 언 20년의 공부 과정에도 수백 년의 문명 유산이 작동하고 있던 것이구나 의식하게 된 것이다. 일백년이 못되는 나의 일생을 일천년의 지평에서 바라보는 입체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공부의 방향 전회와 시대의 반전이 오묘하게 겹쳐지는 듯한 기막힌 경험이었다.
윤여준이 한학자의 아들로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최전선에서 살아낸 인물이라고 해서, 무게를 잡거나 근엄한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의 교육 방식이 톡톡하게 한 몫 한듯하다. 시장에 나가 장을 함께 보면서 보통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늘상 보여주었다고 한다. 아버지로부터 서물(書物)을 가까이 두는 습관을 들이고, 어머니로부터 실물(實物)을 다루는 기술을 익힌 셈이다.
그런 탓인지 양반가의 귀족적인 권위의식 또한 터럭만큼도 없었다. 한식집이나 일식집에서 문 걸어두고 뵌 적이 한 번도 없다. 늘 피자와 파스타를 시키고 독일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한다. 날렵한 몸매만큼이나 사고 또한 유연하고 경쾌하셨다. '진보'라는 도그마에 고착되어 있는 내 또래의 젊은이들보다 머리가 더 말랑말랑한 듯 보였다.
사상가가 아니었기에 경직되지 않을 수 있었고, 이론가가 아니었기에 관념적이지 않을 수 있었다. 晝耕夜讀(주경야독)을 실천했기에 한쪽으로 기울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낮에는 온갖 욕망들이 복마전으로 펼쳐지는 정치 현장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밤에는 조용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색의 시간을 확보했다. 그래서 '주독야독'하는 비판적 지식인들 특유의 공허를 피할 수도 있었고, '주경야경'하는 현실적 정치인들의 비루한 처세술에서도 빗겨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사사로움이 덜했을 것이다. 사사로운 사람이었다면 세월이 바뀌고 사람이 달라지는 데도 거듭 부름을 받을 수가 없었을 터이다. 하나의 권력이 지면 그 권력과 더불어 사라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런데 여든 줄에도 여전히 그를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함은 간단치 않은 인생이라 하겠다. 그것만으로도 과거에 고착되지 않고 부단히 진화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합당할 것이다.
실제로 변화하는 세상의 리듬을 타면서 항상 동시대와 호흡하고 계셨다. '청춘 콘서트'라는 히트 상품을 낳았고, 잘나가던 20대 논객과 팟캐스트 방송을 한 적도 있다. 지금은 경기도에서 디지털 콘텐츠 사업을 맡고 계신다. 아마도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손자뻘은 될 것이다. 日日新 又日新(일일신 우일신), 거듭 새로워지고 있다. 이 분의 삶의 모습이야말로 도리어 '진보적'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보수 진영에 윤여준 같은 분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 여기게 되었다. 그마저도 없었더라면 어찌되었을 것인가. 더 형편없는, 더 염치없는, 더 실력없는 이들이 나라를 이끌어왔을 것이다. 지난 두 번의 정권이 노정하고 있는 저 지긋지긋한 후안무치를 보라. 천박하고 저열하기 짝이 없는 상놈들의 정치이다. 나라 전체가 바로 서기 위해서라도 격조 있고 덕성을 갖춘 보수 세력의 존재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의 삶 또한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게 되었다. 권력을 좇은 것이 아니라, 본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다니신 듯하다. 혹은 본인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사람을 얻고자 하셨던 것 같다. 끝내 성공하지는 못했지 싶다.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돌아섰을 것이고, 그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이들은 그를 내쳤을 것이다. 문득 저 오래전 옛날, 난세에 천하를 주유했던 초기 유자들의 풍파가 떠오르기도 한다. 부디 당신의 삶을 가감 없는 춘추필법으로 진솔하게 회감하는 묵직한 회고록을 남겨주시면 좋겠다.
그 분과의 대담을 아예 '한국 견문'의 한 꼭지로 삼기로 했다. 언뜻 '유라시아 견문'을 통하여 내가 만나온 경세가형 지식인, 실학자들과도 포개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형식은 기존과 전혀 다르다. 원로가 묻고, 내가 답했다. 완숙한 베테랑이 질문하고, 새파란 서생이 응답했다. 이런 구도를 선뜻 수용할 수 있는 어르신 또한 결코 많지가 않을 것이다. 열려 있고, 깨어 있는 청년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유라시아 견문> 1권을 두고 나눈 긴 대화를 소개한다. (계속)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