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번역가들이 제대로 대접받도록…

[살림이야기] 번역협동조합

통역과 번역을 하는 사람들은 일의 특성상 혼자 감당하는 게 많다. 기업의 계약직으로 근무하기도 하지만, 대개 독립사업자로 일감을 주는 사람과 혼자 거래한다. 그러다 보니 불공정한 일이 벌어져도 큰소리 내기가 쉽지 않다. 기업이 개인에게 일감을 주지 않아 시장도 상대적으로 좁다. 능력과 작업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환경을 해결하고자 통번역하는 사람들이 힘을 모았다. 통번역가들의 사회적 처우를 개선하고 공동으로 일감을 만들어 내며, 같은 처지의 삶을 보듬는 '번역협동조합'이다. 2013년 7월에 사업을 시작해 올해 3년째를 맞이했다.

통번역료 절반 이상 수수료로 내는 현실에 협동조합 시작

ⓒ번역협동조합
최재직 사무국장이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다. 한살림 월간지 <살림이야기>와 만나기로 한 날, 공공기관에 낸 입찰 결과가 나온다고 하더니 결과가 좋지 않은 모양이다. "최저 입찰가를 써내는 곳에 일감을 주겠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금액을 조금 더 낮췄으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며 아쉬워한다. 최 사무국장은 "우리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면서까지 가격을 흥정하기보다 제값을 받는 게 더 중요하다"며 아쉬운 표정을 접는다.

최 사무국장은 번역협동조합의 창립을 이끈 사람으로 처음부터 사무국장을 맡아 영업 업무를 해 왔다. 영업 능력이 출중한 덕분인지 해마다 매출이 성장세에 있다. "그동안 사무실 운영비와 인건비가 들지 않아 수익이 온전히 통번역가들에게 돌아갔다"며 알뜰한 살림살이가 매출 증가에 기여했다고 말한다. 올해 총회에서 처음으로 직원 한 명을 두기로 해 인건비가 예산에 책정됐다.

번역협동조합이 출발할 때 "뭐든지 우리끼리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어디든 기대지 않는다고 다짐하고, 지금도 잘 지켜 내고 있다. 서울혁신파크 입주도 가능하지만, 기댈 곳이 생길까 우려해 들어가지 않는다.

이렇게 사업이 성장한 데는 시장을 스스로 개척한 영향도 있다. 번역협동조합은 처음부터 일반 시장을 겨냥했다. 협동조합으로 사회적경제 품으로 들어왔지만, 가능하면 그 품에만 머무르지 않으려 한다. 처음엔 매출에서 사회적경제 영역 비중이 60%고, 일반 시장이 40%였다면, 지금은 일반 시장이 70%다. 일반 시장은 서울시나 법제처, 산업연구원 등 공공기관이 많고 그 외에 조합원들이 소속되어 있는 직업군이나 기업이다.

"통번역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대접받는 환경을 만들겠다"

혼자일 땐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조직을 구성해 힘을 가진다. 협상력과 구매력 같은 거다. 노동조합이나 협회도 그런 의미다. 통번역가들은 그들의 사회적인 처우와 경제적 안정을 동시에 해결하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협동조합을 선택했다.

초대 이사장을 맡은 이수경 씨는 남편인 최 사무국장과 함께 협동조합 창립을 이끈 발기인이다. 협동조합 설립 이전에 이수경 씨는 일반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다. 일반 기업에서 통번역사를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예는 드물다. 대체로 1~2년 계약직으로 채용하며 재계약 방식으로 근무를 연장한다. 이수경 씨도 해마다 재계약하여 6년간 일했다. 꼬박꼬박 나오는 급여와 안정적인 생활이 오히려 자신을 나태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자신의 능력을 좀 더 개발하고, 어린아이들을 돌보면서 일하고 싶었다.

소속에서 벗어난 독립 자유번역가의 삶이 생각만큼 자유롭지도 독립적이지도 않다는 현실을 금방 알았다. 번역 일은 주로 일감을 주선하는 대행사(에이전시)를 거치는데, 수수료가 번역료의 50%나 되었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을 땐 몰랐던 사실이다.

Ⓒ번역협동조합

불공정하다는 불만을 품고 있던 터에 남편과 함께 협동조합 교육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일감을 주선하는 대행사의 횡포에서 벗어나 일감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협동조합을 보고 솔깃했다.

대체로 IT 개발자나 퀵서비스 기사, 대리기사, 통번역가, 작가 등 개인 독립사업자들이 일감을 중개하는 곳을 통해 일감을 받는다. 요즘 일감을 중개하는 플랫폼 사이트가 번성하면서 독립사업자들이 자신의 노동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대행사를 통하지 않고 수요자와 통번역가가 직거래를 하여, 통번역가는 수수료를 덜 내고 수요자는 좀 더 저렴한 번역료로 서비스를 제공받는 협동조합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외국어를 전공한 이수경·최재직 부부는 평소에 교류해 온 대학 동문 21명을 모았다. 한 사람당 10만 원의 출자금을 내고 월 1만 원의 조합비를 내는 방식으로 협동조합을 시작했다.

통번역가와 통번역의 꿈을 가진 사람들의 만남

번역협동조합은 생산자협동조합이다. 조합원 76명 가운데 통번역을 하는 사람은 40명 정도. 그 외 조합원은 조합 행사에 참여하고 의견을 내고 일감을 주선하는 역할을 한다.

수입 배분은 번역의 경우 번역가에게 번역료의 70%, 일감을 주선한 이에게 10%, 사무국장 급여로 10%, 조합비 10%로 나눈다. 통역은 통역자에게 85%, 나머지는 사무국장 급여와 조합비로 배분한다. 그동안 이뤄 낸 번역협동조합 매출의 70%는 조합원들이 주선한 일감에서 나왔다.

통번역을 하지 않는 조합원들은 일반 기업에 근무하거나 법률 관련 전문가나 디자이너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대부분이다. 대체로 외국어를 전공한 동문들이 중심이다 보니 협력이 아주 잘 되는 편이다. 두 해에 걸쳐 치른 '동네국제포럼'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 지난 7월 2~4일 사흘간 서울무용센터(구 홍은예술창작센터)에서 열린 '2회 동네국제포럼-세계경제위기와 사회적경제 그리고 골목경제'. 통번역의 특성상 각자 다른 장소에서 개별적으로 작업하던 조합원들이 예산편성과 행사 일정에 관해 의견을 내고 의결하고 직접 참여하며, 조합원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행사하는 모처럼의 기회였다. Ⓒ번역협동조합

동네국제포럼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협동조합과 주민들이 함께 사회적인 의제로 토론하고 문화적으로 교류하는 자리였는데, 협동조합 활동에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단순히 통번역 일감을 중개하고 통번역가의 사회적 처우를 개선하는 활동에서 나아가 협동조합이 직접 사업을 개척하는 의미가 컸다.

조합원이 예산 편성과 행사 일정에 관해 의견을 내고, 의결하고, 직접 참여함으로써 조합원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행사하는 기회였다. 전국에 흩어져서 일하고 그 일이 특성상 개별 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조직의 일원으로 협력하는 경험을 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많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조합의 사업에 참여하기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올해 열린 동네국제포럼에는 예산 지출과 관련한 투표에 3분의 2가 참여했으며, 준비 과정에 10여 명이 참여했다.

"협동조합은 성급하게 가도 안 되고 욕심을 내서도 안 된다. 서울에 사는 조합원 50여 명 중에서 10명이 동네국제포럼에 참여한 것은 대단한 성과다."

최 사무국장은 협동조합이라고 하여 100% 같은 의견으로 행동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 해 한 해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만족하며, 내년 동네국제포럼에서 또 다른 경험을 할 것이라 믿는다.

이 기운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준비한 것이 있다. 번역협동조합 조합원을 포함하여 일반 통번역가들까지 한자리에 모여 통번역의 품질을 진단하고 수준을 높이는 방안을 논의하는 '통번역가들의 오픈 포럼'이다. 통번역의 품질은 이들에게 큰 숙제이기도 하다. 이는 통번역가의 경쟁력을 키우는 일이고, 사회적 가치를 올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 번역협동조합 http://transcoop.net/wp/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8길 28-49, 302호(02-388-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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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이야기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우리나라 대표 생협 한살림과 함께 '생명 존중, 인간 중심'의 정신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살림은 1986년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면서 싹을 틔워, 1988년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1989년 '한살림모임'을 결성하고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생명의 세계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은 계간지 <모심과 살림>과 월간지 <살림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인간의 소중함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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