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기사 : 슬그머니 살아난 '시간 내 배달제'…20대 알바의 죽음) 여러 사회단체의 노력과 시민의 지지가 피자 업체의 '30분 배달제' 폐지를 끌어낸 지 5년이 지난 지금, 배달 노동자의 안전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지가 오히려 쇠퇴한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관련 기사 : "사람 잡는 '피자 30분 배달제', 한국에만 있는 비극")
인구 밀도가 높은 한국에서 배달 서비스는 중요한 산업이다. 최근에는 배달 음식 주문 앱과 배달 대행 서비스 시장이 빠른 속도로 확장 중이다. 배달 서비스의 품목과 지역 범위는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다. 혹자는 "배달 서비스의 진화"라고 말하지만, 편안한 시선으로 방관하기에는 수많은 배달 노동자의 안전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사건은 배달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이 소비자가 누리는 편리함, 업체의 수익과 어떻게 맞교환되고 있는지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반복해서 발생하는 배달 노동자의 사고와 사망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5년 전 피자업 '30분 배달제' 폐지의 경험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박지은(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과 김명희(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 팀이 지난달 <국제 보건의료 서비스>에 게재한 논문은 2011년 한국에서 있었던 피자업 '30분 배달제' 폐지 운동에서 사회운동 단체들의 역할에 주목했다. (☞관련 자료 : Roles of Social Movement Organizations for Securing Worker's Safety in Korea : A Case Study of Abolition of the 30-Minute Delivery Guarantee Program in Pizza Delivery Service) 논문은 사회운동 단체들이 시민들의 집합적 사회운동을 끌어내는 과정을 '프레이밍 이론(framing theory)'에 입각하여 설명하면서, 운동의 성공 요인과 한계를 분석하고 있다. 연구진이 분석한 성공 요인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운동을 조직했던 세 개의 사회운동 단체(청년유니온, 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30분 배달제 폐지"라는 공통된 목표가 있었다. 목표는 간단하고 명확했으며, 그 성취를 쉽게 평가할 수 있었다.
둘째, 세 단체는 배달 노동자의 죽음에 대하여 소비자와 시민의 '공동의 책임(shared responsibility)'이라는 프레임을 고안하였고, 이 프레임은 시민들이 배달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한국 사회에서 '30분 배달제'가 20년 가까이 이어져 온 데에는 소비자의 지지가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소비자의 책임', '시민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프레임은 대중에게 쉽게 채택될 수 있었다. 배달 노동자를 길거리나 집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점 역시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요인이었다.
셋째, 시민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개인적으로 품고 있었던 문제의식을 사회운동으로 표출할 수 있었다. '소비자'들은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어려웠고, 사회운동 단체들은 집회, 파업, 주요 언론 매체를 통한 홍보와 같은 '전통적' 전략을 취하기에 자원이 부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 단체는 대안적 방법으로 소셜 미디어를 이용했다.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어 활동을 홍보하고, 페이스북, 트위터, 다음 아고라를 통해 온라인 탄원서 운동을 조직하는 한편, 도미노피자 본사 앞에서 '트위터 시위'를 진행하였다. 소셜 미디어를 통한 이러한 활동들은 시민들이 거주 지역과 무관하게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고, 피자 업체들은 '30분 배달제'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2011년 피자업 '30분 배달제' 폐지 운동 사례는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이 노동자 자신의 힘만으로는 보장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대부분의 배달 노동자는 젊은 연령대의 시간제 노동자로, 근무 기간이 짧은 불안정 노동자다. 이러한 취약성 때문에 산재 보험과 같은 사회 보장 제도에서 대부분 배제되고, 노동조합이 조직되기 어려워 근무 환경 개선을 위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저자들은 취약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 보장을 위해 제3자인 사회운동 단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회운동 단체들은 시민의 집합적 사회운동을 끌어내기 위하여 프레임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서비스업이 세계화되고 불안정 고용이 보편화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그런데도 지난 1일 또다시 발생한 배달 노동자의 죽음은, 지금까지의 사회운동이 갖는 한계 또한 돌아보게 한다. 저자들은 크게 두 가지 한계를 지적한다.
첫째, 당사자인 배달 노동자의 참여가 배제되어 있었다. 둘째, 사회운동의 성공이 전체 배달 부문을 포괄하는 효과적인 규제나 정부 정책으로 발전되지 못했다. '시간 내 배달제 폐지'가 유지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제도는 부재하고, 고용주들이 예방적 조치를 하도록 하는 규제도 없다. 안전장비를 '착용할 의무'가 배달 노동자들에게 부과될 뿐,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에게 안전장비를 '제공할 법적 책임'은 없다.
제3자인 사회운동 단체를 주축으로 한 소비자와 시민의 사회운동은 여전히 유효하다. '공동의 책임'을 자각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배달 노동자의 안전을 대가로 한 뜨거운 햄버거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알려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만으로는 배달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위협이 피자가 아닌 햄버거, 햄버거가 아닌 다른 상품 영역으로 이전될 뿐이다. 한 대표적 배달 대행 서비스 업체는 배달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오토바이 안전 교육 프로그램을 실행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개별 기업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 프로그램이 장기적으로 지속하거나 산업 전반으로 스며들기란 매우 어렵다.
이제는 정당과 정부로 책임의 화살을 돌릴 때다. 건강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회운동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의제가 선거 제도를 통해 정당의 정책, 나아가 정부 정책으로 제도화된다. 배달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전이 보장될 수 있도록, 정당과 정부는 사회운동을 통해 표출된 시민들의 목소리를 실질적인 정부 정책으로 구현해야 한다.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소비자와 시민의 공동의 책임'을 넘어선 새로운 프레임 또한 필요하다. 기업의 배달 시간 보장제와 청년 배달 알바생의 죽음은 '취약 노동자를 대하는 기업과 사회의 태도'라는 넓은 렌즈를 통해 보아야 한다.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기본권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법과 정책을 통한 규제는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11년, 소비자의 책임, 시민의 사회적 책임으로 뭉쳤던 시민들이 다시 한 번 결집할 수 있길 바란다. 배달 음식 주문 앱과 배달 대행 서비스가 무서운 속도로 시장을 확장해나가는 상황에서, 이번 사건이 배달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의 창(policy window)을 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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