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를 미개인 취급한 독립운동가, 왜?

[유라시아 견문] 민족 해방의 역설 : 혼/백의 분단 체제

민족주의의 역설

인도 모디 내각 인사 가운데 꼴불견이 없지 않다. 대개 민족봉사단 출신이다. 나라 경영에 주력하기보다는 엉뚱한 짓에 더 공을 쏟는다. 교육부 장관은 성탄절에 학교가 쉬어야 할 이유가 없다 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기독교를 배타한 것이다. 내무부 장관은 모든 주에서 쇠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무슬림을 겨냥한 것이다.

힌두 대서사시 <라마야나>를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며 우기는 인물까지 있다. 모디는 이들을 경질시켰다. 국사(國事)를 그르치는 힌두 근본주의와는 일선을 그은 것이다. 아무래도 시행착오, 통과의례로 보인다. 덜 세련되고 덜 정련되었다. 힌두 국가 만들기는 이제야 걸음마를 뗐다.

역사관도 거칠기 짝이 없다. 지나친 힌두 민족주의가 제 발등을 찍는다. 가령 1947년 인도 독립으로 '1200년' 외세 통치가 끝났다는 식이다. 어찌하여 100년(대영제국)도 200년(동인도회사)도 아니고 1200년인가? 8세기 서북에서 이슬람이 침입해왔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무굴제국까지 장장 1000년을 무슬림 국가가 득세했다는 것이다.

대영제국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한다. 바다에서 틈입한 또 다른 외세였다. 고로 1947년은 1200년 만에 힌두 국가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한다. 이 호기를 놓친 것이 국민회의이다. 대영제국의 계승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세속주의를 표방했을 뿐더러, 무슬림들에게 특권을 베풀었다.

결국 외세의 침략 이전, 즉 7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고대사 나아가 상고사를 탐닉한다. 인도는 고대부터 하나의 민족, '힌두인'이었음을 자랑스러워한다. 일종의 자만사관이다. 그러나 자학사관의 자충수가 되고 만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중부 유럽에서 아대륙으로 진출한 아라얀 족마저도 외세이다. 힌두교 역시도 외래 종교가 된다. 베다를 유일한 경전으로, 산스크리트어를 유일한 보편어로 삼자는 정치적 기획 또한 차질을 빚게 된다.

생활 세계의 실감과도 한참 거리가 멀다. 인도인들이 가장 친근하게 여기는 비슈누, 시나, 칼리 등은 베다 이후 약 1000년 이후에나 등장하는 신들이다. 팔리어와 불교 문명이 인도에 미친 지대한 영향 또한 삭제해버리고 만다. 천 년의 불교, 천 년의 이슬람을 지우는 지독한 자폐사관에 봉착하는 것이다.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와의 촘촘하고 긴밀했던 연결망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힌두교만 섬겨서는 인도의 장구한 문명사를 도저히 담아낼 수가 없는 법이다.

이들의 인도사 인식은 네루가 <인도의 발견>에서 구축한 인도사보다 더 앙상하고 빈약하다. 힌두 문명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도리어 축소시킨다. 게다가 양쪽 모두 북인도 중심이다. 델리를 중심으로 인도사 전체를 규정하려 든다. 무슬림이 인도에 온 것이 8세기이고, 12세기 델리에 술탄 국가를 세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무슬림 권력은 데칸고원 이남까지 침투하지 못했다. 남인도는 별세계, 별천지였다. 가장 강성했던 무굴제국 아래서도 힌두 소왕국들이 고도의 자율성을 누리며 무슬림과 공존했다. 심지어 아삼 지방을 비롯한 동북 지역은 무슬림 지배 아래 들어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국지의 경험을 '민족사'로 과장하는 것이다.

외부인인 나로서는 힌두 문명의 저력에 바탕을 둔 독자적인 역사관을 제출해주기를 바란다. 제국사가 유력한 방편이 되어줄 것이다. 인도는 예외적으로 불교제국과 이슬람제국을 두루 겪은 장소이다. 아소카 황제와 아우랑제브 대제의 전성기를 공히 경험했다. 무굴제국에서는 인도-페르시아 문명의 대융합을 일구었고, 대영제국에서는 무굴제국의 성취에 유럽 문명까지 보태어 '벵갈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인도만이 보유한 독보적인 유산이다. 인류사에 길이 빛난다.

물론 무굴제국과 대영제국은 제법 달랐다. 영국령 인도는 영국의 또 다른 식민지, 미국과 호주(오스트레일리아)가 아니었다. 원주민들을 박멸하고 신세계를 건설할 수 없었다. 아메리카 '인디언'과 유라시아 '인도인'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힌두교와 불교, 이슬람으로 단련된 인도인을 쓸어낼 수 없었다. 숫자에서도 단연 압도적이었다. 소수의 영국인이 다수의 인도인을 표면으로 다스렸을 뿐이다. 그리고 본국으로 떠나버렸다. 건축물은 남았지만, 사람은 거의 남지 않았다.

무굴제국은 그러하지 않다. 뿌리를 내렸다. 토착화되었다. 인구가 그 소산이다. 현재 파키스탄 인구는 2억, 방글라데시는 1억5000만이다.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가 분할되지 않았다면, 인도 총인구 16억 가운데 5억이 무슬림이었다는 말이 된다. 근 3할을 점한다. 단숨에 세계 최대의 국가이자, 세계 최대의 힌두교 국가이며,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라는 복합 제국적 성격을 자랑했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무슬림은 오래도록 인도 아대륙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것이다. 떠돌이가 아니라 토박이가 되어갔다. 뜨내기에 그쳤던 영국인과 토착화된 무슬림을 병렬로 '외세'라고 치는 것 또한 역사의 실상과 크게 어긋난다고 하겠다.

이처럼 아대륙을 순차적으로 통치한 불교제국-이슬람제국-유럽제국의 2000년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여전히 힌두 문명을 지속하고 있음이야말로 퍽이나 인상적이다. 이곳에서 역사는 '진보'를 향해 질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층층이 축적되고 켜켜이 누적되었다. 그 독특한 역사의 지층을 이룬 기저야말로 여러 종교를 크게 감싸 안는 힌두교의 다종교-다문명적 성격이라 하겠다. 즉 정치적 제국성과 종교적 관용성이야말로 힌두 문명의 백미이다. 그 넉넉했던 힌두교의 전통을 힌두 민족주의가 방기하거나 망각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부디 20세기형 민족주의를 답습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힌두뜨와'의 본성과 근성을 회복해 주기를 바란다.

▲ 인도 곳곳에 자리한 힌두교 사원(델리). ⓒ이병한

민주주의의 역설

교조적 민주화 이론에 따르면 성/속의 분리 과정, 즉 세속화는 민주화의 선결 조건이다. 처음에는 교황으로부터의 독립을, 다음에는 교회로부터의 단절을 추구했다. 인도의 국민회의 또한 그 이론에 충실했다. 헌법으로 세속주의를 명기하고, 힌두교에 가장 멀찍했다. 인도가 정체된 원인으로 힌두교를 지목하고, 발전에 뒤처지게 된 원흉이라 질타했다.

인도 민주주의의 커다란 역설은 민주주의의 확산과 심화로 말미암아 힌두교가 복권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대중에게 힘을 부여한다. 그 절대 다수 사람들의 생활 세계가 여전히 힌두 문명 아래 자리했던 것이다. 출생과 결혼, 장례까지 삶의 주요 마디마디마다, 또 각종 축제와 명절 같은 한 해의 리듬 역시도 힌두교의 영향이 물씬하다.

국민회의는 기층 사회와 유리된 상부 조직에 그쳤다. 식민 모국의 영향이 드센 엘리트 집단이었다. 그에 반해 인도인민당은 민간 사회에 뿌리박고 있는 토착적인 정당이다. 바람직한 정당의 이념형적 모습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아래로부터의 힘, 종교의 정치적 동원도 가능했다.

동시에 종교의 근대화도 자극했다. '해방된 개인'들을 묶어주고 엮어주는 접촉제로 힌두 문명의 전통이 환기되었다. 1990년대 이래 인도 역시 급변하고 있다. 나날이 세계화되고 있는 인도에서 안정감과 소속감 등 정체성을 제공해주는 것이 힌두교이다. 민주화와 세계화, 힌두화가 공진화한다. 성과 속이 따로 놀지 않는다.

20세기의 최첨단을 달렸던 국민회의와 인도공산당으로서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현상이다. 무엇보다 1990년대 이후 태어난 21세기의 신청년들이 힌두뜨와에 가장 열렬하게 호응하고 있다. 20세기 후반 유력지였던 신문과 잡지 또한 이제는 극소수만 읽는 매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살펴보자니 그들만의 은어로 푸념을 늘어놓는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전통적 복고주의에 세속적 민주주의가 납치당했다고 한다. 신중간층들이 경건하고 정갈한 브라만식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것 또한 '뿌띠 부르주아의 허의위식'이라며 어깃장을 놓는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문장을 재차 읊어대는 대목에서는 하품이 나왔다.

국민회의의 세속주의는 중산층 이데올로기이고, 인도인민당의 힌두 국가 만들기는 반동적 수구파의 기획이라며, 인도의 장래를 '노동자 국가'에서 구하는 글은 차마 끝까지 읽어줄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하자면 '진보는 20세기의 아편이고, 근대의 허위의식'이라고 되받아치는 힌두뜨와 논객들이 훨씬 더 참신해 보였다.

이러한 역설적 풍경은 비단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 인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도에 있다 보면 동아시아보다는 서아시아에 더 자주 눈을 돌리게 된다. 북부에 자리한 델리에서 석 달을 지내니 더더욱 그러했다. 비슷한 현상이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일대에도 만연하다.

인도와 더불어 탈식민주의 이론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국가로 알제리가 있다. 프란츠 파농이 널리 인용된다. 그가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가담했던 집단이 민족해방전선(NFL)이다. 프랑스를 물리친 후 알제리에서 오래 집권했다. 그 NFL 역시 세속주의와 사회주의,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인도의 국민회의와 유사한 노선이었다. 사실상의 1당 체제를 오래 누렸다는 점에서도 엇비슷했다.

알제리서도 변화는 1980년대 말부터 전개된다. 다당제가 도입되자 곧장 이슬람 정당이 대약진했다. 종교에 뿌리내린 정치 문화가 (재)부상한 것이다. 이들은 세계를 좌/우의 시각으로 살피지 않는다. 성/속의 관계로 접근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자유민주(시민민주)와 사회민주(인민민주)는 오십보백보이다. 공히 영성을 배제한 세속 정치, 이성의 독재 체제이다. 그들의 실감으로는 이성이 영성을, 과학이 종교를 억압하는 20세기야말로 '암흑시대'이다. 그리하여 교조적 민주주의에 맞서 전통과 문명을 수호하는 전투적인 종교 운동이 정치적으로 분출한 것이다.

첫 물꼬를 틔운 것은 1979년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이었을 것이다. 그 후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실로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가히 시민 민주주의와 인민 민주주의를 대체해가는 '제3의 물결'이라 할만하다. 기어이 21세기 유라시아사의 대세를 형성해가고 있다. 최근에는 아랍 세계의 세속화를 가장 먼저 견인했던 터키마저도 탈세속화와 재이슬람화에 합류하고 있을 정도이다. 근대 정치에 대한 반혁명, 대항 혁명이 한창이다. 비근대적 정치가 만개하고 있다.

당장은 이 '새 정치'를 일방으로 편들기가 힘듦이 솔직한 고백이다. 실제로 민족봉사단 출신의 관료들이 노정하는 작태처럼 반동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왕년의 신정 정치를 반복하고 있는 것만도 아닐 것이다.

정교 일치와 정교 분리를 물과 기름처럼 맞세우는 이분법 자체가 근대의 편견일지 모른다. 본디 정치는 도덕과 불가분이었다. 단순히 자원의 분배 과정, 이해득실의 조정 과정에 그치지 않았다. 도덕의 구현이자 양심의 실현을 지향했다. 허나 근대 정치는 자유 민주와 사회 민주를 막론하고 도덕과 영성을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하고 말았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들의 이해타산을 조정하는 소인들의 정치가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이곳 인도에서, 또 유라시아의 동과 서에서 정치과 종교, 정치와 도덕이 다시 합류해가고 있다. 장차 민주주의의 대전환, 대반전을 예감하는 까닭이다.

▲ 홀리(Holi). 3월의 봄맞이 축제. 형형색색의 물감으로 색의 향연을 펼친다. ⓒ이병한

민족 해방의 역설

민족 해방의 역설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커다란 도착이 일어났다. 외세로부터의 해방과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이 착종되고 말았다. 민족 해방 운동의 대국을 쥔 쪽은 '자강파'보다는 '개조파'들이었다. 급진적 변혁을 추구했다. 이들의 민족 해방은 야심찬 반면으로 모호한 것이기도 했다.

전통을 배척하면 할수록 식민 모국과 닮아가는 자가당착이 일어났다. 개인의 자유, 정치적 독립, 시민권, 민주적인 정부, 과학적인 교육, 경제적인 발전 등등, 식민 모국의 '문명화 사업'을 흉내 내고 내면화한 것이다. 일급의 사상가와 운동가들마저 '민족 개조론'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장기간의 문화 내전을 초래했다. 결국은 영국 같은 인도가 되는 것이, 프랑스 같은 알제리가 되는 민족 해방의 목표처럼 되고 말았다. 말미암아 서구화된, 혹은 식민화된 엘리트들과 토착적 민중 사이의 심대한 분단 체제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민족의 이름으로 민족과 싸우는 혼과 백의 분단 체제였다.

그러나 인도의 국민회의나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이 보여주는 것처럼 문화적 헤게모니를 틀어쥐지는 못했다. 재생산에도 실패했다. 탈냉전이 시작되기 무섭게 전통과 종교와 문명이 귀환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추진했던 '새 것 프로젝트'가 가능한 곳은 따로 있었다.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같은 '신대륙'이다. 원주민의 옛 문화를 완전히 제거하고 새 사람과 새 문화를 이식할 수 있었다. 즉 신대륙의 신문화는 정치적 운동의 산물만이 아니었다. 더 결정적으로는 지리적 이동의 산물이었다. 이민 국가의 탄생, 즉 이민을 통한 혁명이었다. 이주민들이 원주민들을 지워버림으로써 인문 지리의 전면적 개조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라시아는 아메리카가 될 수 없었다. '아메리칸 아담'을 창조할 수가 없었다. 인류의 4대 문명, 기축 문명의 근거지이기 때문이다. 200년 새파란 근대 문명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장구한 문명적 유산이 민중의 생활 세계에 존속하고 있었다. 그 거대한 뿌리가 민주주의의 장착과 더불어 도저하게 재귀하고 있는 것이다. 제2의 민족 해방 운동이 기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근본주의와 정통주의로 삐뚤어지고 있다. 또 다른 쪽에서는 탈근대적 정치로 새 물결을 만들어가고 있다. 반동과 반전이 커다랗게 교차한다. 어느 쪽이 대세가 될지 장담하기는 아직 힘들다. 다만 정/교 분리, 성/속 분리의 '근대 정치'가 영영 지속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혼과 백을 재결합하는 제2의 민족 해방 운동이 유라시아 도처에서 굴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신생 국가들이 건국기를 지나 수성기와 중흥기로 진입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주체성 확립(독립)에 이어 정체성 재건(중흥)이 시대정신이 되어간다.

진중한 얘기를 오래 했다. 글을 쓰는데도 어깨가 굳는다. 목이 딱딱해진다. 조금 느슨해지기로 한다. 매주 일요일, 원고를 마치면 영화를 한 편씩 보았다. 춤과 노래가 일품인 인도 영화는 흥에 겨웠다. 태평양에 할리우드가 있다면, 인도양에는 발리우드가 있다. 또 하나의 글로벌 문화지리를 구축해가고 있다. 발리우드의 도시, 뭄바이로 간다.

▲ 힌두식 마을 결혼식. 브라만이 주례를 한다.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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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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