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왜 손발 묶어놓고 문제 풀라고 하나"

[기자의 눈] 양적 완화가 아니라 정책 금융이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인가. 박정희 정부가 내걸었던 '한국적 민주주의' 구호 안에 민주주의는 없었다. 유신 쿠데타를 분칠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한국판 양적 완화' 역시 비슷하다. 현 정부의 경제 정책 실패를 감추는 효과가 있다. '한국판 양적 완화' 논란을, 정부와 중앙은행의 갈등으로만 이해하는 건 위험하다. 한국은행 독립성을 둘러싼 갈등만 부각되면서, 다른 정책 수단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둬야 좋은 정책 수단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판 양적 완화' 한 가지로 정책 수단이 고정돼 있다. 훨훨 날아다니면서 답을 찾아도 풀기 힘든 문제를, 손발 묶어 놓고 해결해야 한다. 박 대통령의 돌출 발언, 그리고 고집 때문이다.


박근혜판 양적 완화는 목적이 다르다

"기업 구조 조정을 지원하기 위해서 필요한 재원은 미국, 일본, EU 등 선진국들이 펼친 무차별적인 돈 풀기 식의 양적 완화가 아닌 꼭 필요한 부분에 지원이 이뤄지는 선별적 양적 완화 방식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국무회의에서 한 말이다. 양적 완화 정책의 원조는 일본이다. 지독한 디플레이션(자산 가치 하락)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이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엔 미국, 유럽연합(EU) 등도 뒤따랐다.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목표는 비슷했다. 통화량을 늘려서 물가를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물가 폭등으로 고생한 기억이 생생한 입장에선, 물가가 낮은 게 왜 문제인가 싶다. 그렇지 않다. 물가가 계속 떨어지면, 사람들은 돈을 안 쓰고 버틴다. 내일이면 100원에 살 수 있는 걸, 왜 오늘 200원에 사느냐는 게다. 기업이 어려워지고, 일자리가 줄어든다. 이 늪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아주 힘들다.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 경제가 잘 보여준다. 따라서 각국 정부는 디플레이션 기미가 보이면, 중앙은행을 압박해서 자산(주로 채권)을 사들이게 한다. 사들인 자산의 가격 총액만큼, 돈이 시중에 풀려 나온다. 그게 양적 완화다.

반면, 박 대통령이 이야기한 '선별적 양적 완화'(한국판 양적 완화)는 목적이 다르다. 디플레이션 방지가 아니라 국책 은행 지원이 목적이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 은행이 해운 및 조선 업계에 약 20조 원을 빌려줬다. 이 가운데 일부를 떼일 수 있다. 이들 국책 은행도 함께 부실해진다. 문제는, 앞으로도 구조 조정 도마 위에 오를 산업이 많다는 점이다. 국책 은행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따라서 국책 은행의 자본을 더 쌓아야 한다. 그걸 '양적 완화' 방식으로 하자는 것이다.

"국책 은행에 필요한 건 유동성이 아니다"

정부 정책은 목적과 수단을 함께 봐야 한다. 한국판 양적 완화의 목적은 '국책 은행 지원'이다. 수단이 양적 완화다. 한국판 양적 완화를 둘러싼 온갖 논란은, 정책 수단을 둘러싼 것이다.

문제는 결국 자본 건전성이다. 수출입은행은 이미 자본 건전성이 최악이다. KDB산업은행은 그보다 낫지만, 곧 나빠질 전망이다. 그걸 개선하기 위한 수단을 찾아야 한다. '양적 완화'는 과연 적절한 수단인가, 혹은 유일한 수단인가. 질문은 이렇게 나와야 한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이미 답을 이야기했다. 지난달 26일 구조조정 관련 브리핑에서, 그는 "현재 논의 중인 국책 은행 자본 확충 방안은 새누리당이 총선 이전에 공약으로 들고 나온 한국판 양적 완화와 별개의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당의 공약은 산은채 등을 한은이 사줘서 산은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안이지만, 현재 국책 은행에 필요한 것은 유동성이 아니다"라고 했다.

산업은행채(산은채)를 한국은행이 사들이면, 즉 한국판 양적 완화를 실시하면, 분명히 산업은행으로 돈이 들어간다. 하지만 그건 부채 계정에 잡힌다. 자본 확충 수단은 아니라는 말이다. "국책 은행 자본 확충 방안은 (…) 한국판 양적 완화와 별개의 사안"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국책 은행에 필요한 것은 유동성이 아니"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부채가 아니라 자본 계정이 문제라는 것이다.

정책 수단을 못 박아두고 시작하는 논의

그런데 같은 날, 대통령이 다른 말을 했다. 그러면서 문제가 꼬였다. 이날 오후, 박 대통령은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간담회를 진행하며 '한국판 양적 완화'를 긍정적으로 검토한다고 말했다. '한국판 양적 완화'는 새누리당의 총선 패배와 함께 물 건너갔다는 게 당시 분위기였다. 현행 법을 고쳐야 가능한데, 여당이 과반 의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판 양적 완화'를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니,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하지만 이틀 뒤인 지난달 28일, 대통령은 분명히 못 박았다. 이 글 도입부에 소개한 발언이다. '한국판 양적 완화란, 선별적 양적 완화다. 그걸 추진하겠다.'

박 대통령의 의지가 분명히 확인됐다. 결국 임 위원장도 자기 말을 뒤집어야 했다. 지난달 29일, 임 위원장은 기자 간담회에서 "한국은행이 국가적 위험 요인 해소를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 위해 한국판 양적완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적 완화를 통한) 유동성 확보의 경우, 기획재정부와 한은 등 관계 기관이 매크로 차원에서 논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획재정부로 공을 떠넘긴 모양새다.

오는 4일 '구조조정 지원을 위한 국책 은행 자본 확충 정부 태스크포스(TF)' 첫 회의 역시 최상목 기획재정부 1차관이 주재한다.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한국은행, 산업은행, 수출입은행이 각각 실무자를 파견한다.

기획재정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까. 정책은 대개 목적이 정해져 있고, 수단이 가변적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목적과 수단이 모두 고정돼 있다. 둘을 연결하는 게 과제다.

일단 나온 아이디어가 '코코본드(CoCo bond, contingent convertible bond)' 활용이다. 의무 전환 사채, 조건부 자본 증권 등으로 번역된다.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채권이라서, 부채가 아니라 자본으로 인정된다. 산업은행이 발행한 코코본드를 한국은행이 사들이면, 앞서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언급한 문제가 풀린다. 한국은행이 공급한 유동성으로 산업은행의 자본을 쌓게 된다. 현행법을 바꾸지 않아도, 정부가 보증하기만 하면 즉시 가능하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산업은행은 구조조정 재원 마련을 위해 5월 중 5000억 원 이상 규모의 코코본드를 발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금융계에선 산업은행이 향후 추가적으로 확보해야 할 자본금 규모를 최대 4조 원으로 추산한다. 코코본드 발행만으로는 안 된다. 나머지 돈은 어쩔 건가. 그 문제에 대한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한국판 양적완화는 양적 완화가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 한국판 양적완화는, 정책 수단을 정책의 브랜드로 삼은 경우다. 만약 정책의 목적을 브랜드로 삼았다면 어땠을까. 예컨대 지금 필요한 정책은 국책 은행 지원이다. 정부 TF 이름을 빌자면, "구조조정 지원을 위한 국책 은행 자본 확충"이 목적이다. 이런 목적에 맞춰 정책 명칭을 정하면, '정책 금융' 또는 '구제 금융'이 된다.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경제학자들이 있다. 한국판 양적 완화보다 그게 더 적절한 표현이라는 게다. 성태윤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최근 <조선일보> 기고에서 이렇게 밝혔다.

"'한국판 양적 완화'는 '양적 완화'라기보다는 중소기업 대출용으로 한국은행이 저금리 자금을 공급하던 기존의 '금융 중개 지원 대출'이라는 정책 금융이 대기업과 주택담보 대출까지 확대된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특정 부분에 자금 지원을 대규모로 지속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평성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이 상황에서 경기 회복을 위한 과감하고 지속적인 통화 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형성되기는 어렵다."

예컨대 "국책 은행에 대한 구제 금융이 필요하다"라고 대통령이 말했다면, 어떤 효과가 있었을까.

한국은행 독립성을 둘러싼 갈등도 덜했을 게다. 어떤 면에선 한국은행의 위상이 높아지는 효과도 있다. 모든 금융기관이 마지막에 기댈 곳은 한국은행뿐이라는 걸 보여주니까 말이다. 금융위원장의 민망한 말 뒤집기도 없었을 게다. 동원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의 폭도 넓어진다.

그런데 왜 대통령은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집권 초기였다면, 달랐을 게다. "국책 은행의 건전성이 엉망이다. 자본 확충을 위한 구제 금융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다. 책임은 이명박 정부에게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집권 4년차다. 국책 은행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책임에서 현 정부도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까 국책 은행의 부실, 정부의 책임 등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은 꺼리게 된다. 대신, 경기 부양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는 양적 완화라는 표현을 썼다. 성태윤 교수의 지적처럼, 실제로는 '양적 완화'보다 정책 금융에 가까우므로, '한국판'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정말 양적 완화 맞느냐'라는 지적을 피할 길을 열어둔 것이다.

책임도, 사과도, 대화도 싫다는 대통령

여기에 몇 가지 족쇄가 더 겹쳤다. '증세'에 대한 대통령의 강한 거부감이 있다. 실제로는 국민에게 사과하고 머리 숙이는 게 싫은 것일 게다. '어쩔 수 없이 나랏돈을 예상보다 더 쓰게 됐다. 죄송하지만 세금을 더 내달라'라는 말은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정부 재정을 쓸 생각은 아예 못한다. '양적 완화'를 한다지만, 관련 법 개정 역시 어렵다. 대통령은 야당과 대화할 마음이 없다.

책임은 지기 싫고, 국민에게 머리 숙일 마음도 없으며, 야당과 대화할 줄은 모르는 대통령. 그 까다로운 조건에 맞추느라 관료들이 고생한다. 코코본드 발행과 같은 아이디어를 몇 번은 더 내야 한다. 부처 수장이 말을 바꾸는 망신을 더 겪을 수도 있다. 관료가 진땀 빼도 답이 안 나오면, 그때는 국민이 눈물을 흘린다. 대통령의 고집 때문에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이 더 흘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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