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 가느니 차라리 군대에 입대하라!"

[유라시아 견문] <힌두뜨와> : 정치적 힌두교

네루 대학교

델리에 입성한 것은 지난 2월이다. 학연 덕을 보았다. 단 두 번의 연결망이 필요했다. 학부 시절 인도사를 배웠던 이옥순 선생님께 자문을 구했다. 지금은 인도연구원 원장이시다.

곧장 연세대학교에서 박사 공부를 한 인도인 친구를 추천해 주신다. 사토시 쿠마르. 식민지 조선을 연구한다. 식민지 인도를 참조점으로 삼는다. 참신한 입각점이다. 나보다 나이도 어렸다. 이미 교수가 되었다. 최고 명문 네루 대학교에 자리를 잡았다. 네루 대학교 한국학과는 인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국학과이기도 하다. 그의 도움으로 장기 비자를 받을 수 있었고, 연구실까지 덤으로 얻었다. 나아가 개인 교사 노릇도 해주었다. 인도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기면 언제든 어디서든 카톡으로 질문을 날렸다. 모교 선배인양 한껏 부려 먹었다.

때가 공교로웠다. 델리에 도착한 무렵부터 네루 대학교가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 두 달 이상 지속되었다. '네루대 사태'라 할 만했다. 정문에는 늘 카메라와 마이크로 중무장한 보도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CNN부터 알자지라까지 해외 언론도 주목했다. 뜻하지 않게 당대 인도의 핵심 문제로 곧장 진입할 수 있었다. 집권 2년차 인도인민당(BJP)의 모디 정부와 직결된 사건이었다.

사단은 2월 9일에 났다. 네루 대학교의 총학생회장 쿠마르(Kanhaiya Kumar)가 체포되었다. 아프잘 구루(Afzal Guru)를 추모하는 행사에 참여하여 반국가적 행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아프잘은 9.11 직후인 2001년 12월 13일 발생한 인도 의회 테러 사건의 핵심 인물이다. 열 명이 죽었다. 파키스탄에 본거지를 둔 테러 단체의 지도자로, 카슈미르 출신이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대영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앙숙지간이다. 카슈미르는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의 모순이 응축된 핵심 장소이다.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국가보안법의 범주에 해당한다. 쿠마르는 아프잘을 기리며 반(反)인도적 언사를 했다는 혐의를 부인했다. 사형에 반대한다는 인도주의를 내세웠다. 도리어 인도인민당의 '힌두 국가 만들기'가 대학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고 응수했다. 스마트 폰으로 녹화된 그의 연설은 SNS를 통해 널리널리 퍼져갔다.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네루 대학교에서는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다른 대학들도 시위에 동참했다. 남인도의 첸나이 대학교에서는 학생들과 경찰이 충돌했다. 동인도의 콜카타 대학교에서는 좌/우파 학생들이 충돌했다. 좌파는 사상의 자유를 옹호했고, 우파는 매국적 사상을 규탄했다. 사태의 발원지인 네루 대학교에서는 교수들까지 힘을 보태었다. 학문의 자유를 옹호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그릇된 민족주의에 저항한다 했다.

네루 대학교의 성격을 잠시 짚을 필요가 있다. 콜카타 대학교, 뭄바이 대학교, 델리 대학교 등 각 지역의 주요 대학과는 꽤나 다르다. 전자가 대영제국 시기에 들어선 식민지 대학의 후신이라면, 네루 대학교는 그 이름이 상징하듯 독립한 이후에 만들어진 신생 대학이다. 1960년대에 설립되었다. 그만큼 독립 인도의 정신을 체현하고 있다.

대학원 중심, 연구 중심 대학이기도 하다. 기초 과학 분야가 발달했고, 인문 사회 분야는 '진보적' 색채가 뚜렷하다. 인도 좌파들의 거점 같은 곳이다. 모두가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다. 네루주의자, 사회주의자, 자유주의 좌파 등 다양하다. 인도의 건국 헌법, 세속주의와 사회주의를 양대 축으로 삼는다.

학생 선발 방식도 남다르다. 성적 못지않게 다계층(카스트), 다언어, 다종교, 다지역, 다문명을 십분 고려한다. 소수 종파와 하층 카스트를 우대한다. 1947년 입안된 인도 민족주의, 즉 '시민적 민족주의'의 보루이다.

그러나 섬처럼 고립되어 있다. 대학 밖에서는 '힌두 민족주의'의 물결이 도저하다.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심화될수록 침묵하던 다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근대적 가치가 아니라 힌두적 가치를 대변하는 인도인민당의 등장 때문이다. 이번에도 네루 대학교에 대한 비난과 성토가 그치지 않았다.

지하철역에서 캠퍼스로 가고자 했던 한 네루 대학교 교수가 오토릭샤 기사에게 구타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 소식에 나 또한 한동안 뙤약볕을 걸어 다녔다. 지레 겁을 먹었다. 낯선 환경이 공포심을 배가시켰다. 탓에 캠퍼스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네루 대학교 규탄 시위 현장도 지켜볼 수 있었다. 학생 시위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인터넷 댓글이나 소셜 미디어를 보아도 1:9의 비율로 네루 대학교에 대한 반감이 압도적으로 심했다.

▲ 석방된 네루 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설 장면. ⓒ이병한

네루 대학교와 인도인민당 간 갈등은 오래된 것이다. 1980년에 창당했으니, 30년을 넘는 세월이다. 네루 대학교야말로 반(反)힌두 국가의 허브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급진 좌파라는 색깔론에 반(反)애국적이라는 마타도어를 보탠다. '힌두 민족주의'의 대척점에 네루 대학교를 놓는 것이다. '세속주의 인도'를 고수하는 세력의 마지막 근거지라고 한다. 그들이 보기에 세속주의, 즉 정교 분리란 인도의 이념이 아니다. 영국의 이념이다.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었던 외세의 사상이다. 네루 대학교를 '내면화된 외세'의 표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열흘을 캠퍼스 안에서 지내보았다. 네루 대학교가 자랑하는 한밤의 자유 강연과 노천 토론회도 직접 참여해 보았다. 예민한 감성과 드높은 이상으로 푸르른 20대 청년들과 말도 섞을 수 있었다. 이 나라 저 나라 여러 대학을 다녀봤지만 이처럼 활력 넘치는 장소를 본 적이 드물다. 아카데미아의 이상이 살아 숨 쉬는 장소였다.

그럼에도 마냥 찬탄하기에는 어딘가 모자랐다. 공허함이 없지 않았다. 모디 정부를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결합이라고 비판하는 그들의 주장에 흔쾌히 동의하기 힘들었다. 너무 나이브하다. 파시즘이라는 말도 지나치게 남발한다. 그래서 상투적이다. 표면만 살핀다. 마치 10여 년 전의 나를 보는듯했다.

뭄바이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 참여한 적이 있다.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사회주의 국제주의'에 부르르 떨던 시절이다.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사람들이 하나의 이상을 공유하고 있음에 전율하던 때이다. 그런데 지금은 퍽이나 다르다. 각자의 문명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는 이론의 향연에 질색팔색한다. 뿌리가 약한 사상은 머지않아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回心(회심)이 아니라 轉向(전향)이 번다한 까닭이다. 좌-우의 도식은 피상적인 허울이라고도 여긴다. 根本(근본)을 튼튼히 갖추었다면 좌도 우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놈 촘스키의 네루 대학교 지지 성명에 한참 고무되어 있던 그들에게 나는 사바르카르를, 오로빈도를 물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100년 전 힌두교 사상가들을 따져 묻는 이방인이 이상하다는 눈빛이었다. 따분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한국으로 치면 東學(동학)의 후신이라 할법한 대종교나 천도교, 원불교 사상가에 해당할 것이다.

역시나 그들의 텍스트는 첨단을 달렸다. 영국의 버소(Verso) 출판사에서 나온 슬라보예 지젝과 조르조 아감벤과 아룬다티 로이 등을 읊조렸다. (영어 중심의) 글로벌 공론장에 편입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라면 내가 구태여 인도까지 올 이유도 없었다. 나와 그들 사이에 단단한 벽을 확인했다. 新舊(신구) 사이의 아득한 분단 체제를 실감했다.

터벅터벅 숙소로 돌아와 이메일로 허한 마음을 나누었던 분이 경희대학교의 김상준 선생이다. 그 분이 일독을 권한 책이 바로 <힌두뜨와(Hindutva)>였다. 잠을 아껴가며 읽었다. 빠져들었다.

▲ 네루 대학교. ⓒ이병한

ⓒ이병한

ⓒ이병한

힌두뜨와(Hindutva)

힌두뜨와의 창시자는 사바르카르(Vinayak Damodar Savarkar)이다. 사상의 정립에 앞서 역사부터 재인식했다. 1907년, 독자적인 역사관을 제출한다. 1857년으로부터 반세기가 되는 해였다. 그는 1857년에 正名(정명)을 부여했다. 대영제국이 일컫는 '세포이 항쟁'이라는 이름을 버렸다. '제1차 인도 독립 전쟁'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단박에 그 의의를 격상시킨 것이다.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영국에서 독립한 최초의 국가, 미국 독립 전쟁을 의식했을 법하다. '인도 독립 전쟁'이라는 말도 의미심장하지만, '제1차'라는 수사는 더더욱 비상하다. 제2차, 제3차를 내다보는 예언가로서의 발언이다. 혹은 무장 독립 투쟁을 격려하는 선동가로서의 발언이다.

재차 1907년이라는 시점을 간과할 수 없겠다. 1905년 러일 전쟁이 있었다. 아시아의 일본이 유럽의 러시아를 격파시켰다.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그는 고무되었을 것이다. 국민회의의 출범 이후 사그라졌던 독립'혁명'의 불씨를 다시 지피고자 했다.

힌두뜨와는 힌두(Hindu)와 따뜨와(Tattva)의 합성어이다. 따뜨와란 본질, 원리 등을 뜻한다. 즉 힌두뜨와는 힌두 원리, 힌두성(性)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영어 문헌을 보면 힌두 민족주의 혹은 힌두 근본주의로 번역한 경우가 많다. '힌두 지하드'라고까지 과장하는 경우도 있다. 번역이 반역이 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 사바르카르. ⓒwikipedia.org
사바르카르는 힌두교에 헌신하는 종교 근본주의자가 아니었다. 종교 개혁파, '힌두교의 근대화'를 꾀한 인물이다. 설령 무슬림일지라도 그들이 태어난 이 땅을 소중히 여긴다면 힌두뜨와에 속할 수 있다며 배타하지 않았다.

그가 겨냥한 것은 유럽식 민족주의였다. 여러 이론가들이 있다. 어니스트 겔너, 앤서니 스미스, 에릭 홉스봄 등 다양하다. 종합 요약하면 근대 민족주의란 문명(종교)과의 단절을 통한 인위적인 공동체 의식 만들기이다. 국민 국가라는 인공적인 정치체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응당 교회보다 학교가 강조된다. 천주교인, 개신교인이 아니라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이탈리아인으로 정체성을 개조시킨다.

아침마다 읽는 신문으로 형성되는 '상상된 공동체'가 구약과 신약에 기반을 둔 '문명적 정체성'보다 우위에 서는 체제이다. 그래서 세속주의, 즉 성과 속의 분리 운동이기도 했다. 사바르카르는 이러한 속성을 인도 독립 혁명이 따라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유럽형 국민 국가를 답습할 것이 아니라, 힌두형 문명 국가를 재건할 것을 도모했다.

유럽, 특히 식민 모국 영국만 겨냥했던 것도 아니다. 국민회의의 간디와도 대척점에 섰다. <힌두뜨와>(1923년)는 명백하게 그에 앞서 출판된 <힌두 스와라지>(1910년)에 도전한다. 간디는 결단코 무장 투쟁에 반대했다. 자치(home rule)의 핵심은 수양(self-rule)에 있다고 했다. 그 신념을 접기보다는 투옥과 단식을 선택했다.

사바르카르는 네루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간디가 시대착오라고 여겼다. 그들이 살아가던 20세기는 亂世(난세)였다. 남아시아 식으로 말하면 '아수라(Asura)장'이었다. 도(Dharma)가 실현되지 않는 아수라판에서는 다르마와 인드라의 반대편에 서 있는 세력, 즉 영국과 적대해야 했다. 그래야 영적 진화(self-rule)도 가능한 治世(치세)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비폭력을 주장하며 감옥에 갈 것을 요구하는 간디에 맞서, 감옥에 가느니 차라리 군대에 입대할 것을 권했던 것이다.

특히 카스트의 두 번째 계급인 크샤트리아의 尙武(상무) 정신을 강조했다. 동시대는 성자, 즉 브라만이 존경받는 태평성대가 아니다. 난세와 아수라는 무사와 전사들, 크샤트리아의 전성기이다. 간디와 같은 절대적 아힘사의 고수야말로 비도덕적이라는 것이다. 시공간적 특수성에 대한 고려가 없는 비폭력은 성스러움(saintliness)의 소산이 아니라 제정신이 아닌 것(insanity)이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사바르카르가 보기에 근대 국가의 핵심은 군사 국가이며, 그 주체는 모름지기 군대였기 때문이다. 즉 그는 변호사 출신의 간디와 달리 영국의 정신 문명에 대한 콤플렉스가 적었다. 오히려 크샤트리아의 상무 정신을 계승하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우자고 했다. 그 실현태가 바로 민족봉사단(RSS)이다. 지금도 오로지 남성만이 가입할 수 있다.

간디가 끊임없이 영국과 인도 사이에서 사고했다면, 사바르카르는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서 사고했음도 흥미로운 차이이다. 그는 동시대의 어떤 힌두교 사상가들보다 이슬람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힌두교에 부족한 점을 이슬람이 가지고 있다고도 여겼다. 성/속을 분리하지 않는 '근대적 이슬람' 사상에 심취했다.

특히 인도의 독립 혁명은 오스만제국의 해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동시대 터키를 개창한 케말 파샤의 실험을 주시하고 있었다. 터키는 오스만제국의 아랍 문화를 뿌리 뽑고 유럽식 세속주의로 기울었다. 그 결과 민족 간, 종족 간, 종교 간 핵분열을 초래했다. 유럽식 민족주의를 도입함으로써 중동과 북아프리카 일대가 수많은 국가들로 쪼개지고 만 것이다. 만국이 만국에 투쟁하는 또 하나의 아수라장이었다.

독립 인도가 이런 오류를 반복하면 안 될 것이라고 여겼다. 서둘러 민족과 종족과 종교를 초월하여 군림했던 무굴제국의 역사적 유산을 비판적으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굴제국은 이슬람제국이었다. 그 제국적 관용성과 공공성을 힌두뜨와 역시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를 이슬람과 적대하는 힌두 근본주의의 원조로만 간주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독이다. 오히려 이슬람의 유산을 완전히 흡수함으로써 힌두 문명을 갱신하고 경장하고자 했다. 즉 그의 힌두뜨와는 무굴제국이 구현했던 '인도-페르시아 문명의 근대화'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종교를 버린 정치 혁명이 아니라, 종교 혁명과 정치 혁명을 겸장하는 또 다른 근대 혁명이었다.

이 활활 타오르는 정치적 힌두교, 혹은 전투적 힌두교 문헌을 읽어가면서 나는 어쩐지 기시감이 일었다. 신채호였다. 단재의 글이 떠올랐다. 그 역시 '강도 일본'에 분개하여 조선의 역사를 재인식했던 바 있다. 我(아)와 非我(비아)의 투쟁이라는 독자적 독법을 내세웠다. 그러나 평생을 투쟁 사관으로 시종하지 않았다.

말년에 득의의 경지에 오른다. 아와 비아의 투쟁을 '小我'(소아)와 '大我'(대아)의 투쟁으로 진화시키고 격상시켰다. 사상적으로 도약하고 비상한 것이다. 소아적 발상을 버리고 대아에 귀의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말기 사상을 유럽의 '무정부주의'에 빗대는 것 또한 심각한 오독이다. 민족과 국가보다 보편 문명을 더 높이 섬겼던 동아시아 특유의 기제에 재접속한 것이다. '대동 세계의 현대화'로 접근하는 편이 한층 적절하다고 본다.

물론 신채호만큼이나 사바르카르의 이상 또한 실현되지 못했다. 초대 수상 네루는 철저한 세속주의자이고 사회주의자였다. 국민회의가 오래 집권했다. 사바르카르는 그 독립 인도에서 19년을 더 살았다. 발언권은 이미 사라졌다. 고드세가 간디를 암살하기 직전에 그의 사무실에 들렀다고 한다.

사바르카르는 고드세의 멘토였다. 다만 암살을 지시했다는 직접적인 물증은 없었다. 그래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두 인물 간의 사상적 연결만은 명백한 것이었다. 1948년 11월 8일, 장장 5시간이나 이어졌던 고드세의 법정 최종 진술은 그가 사바르카르의 제자였음을 잘 보여준다. 간디와 네루, 국민회의 비판에서 판박이의 내용이었다.

1950년 1월 26일 인도공화국 출범(헌법 선포) 하루 전, 사바르카르는 짤막한 성명서 하나를 발표한다. 공인으로서 마지막 역할이었다. 여전히 인도 헌법에 명시된 세속주의를 비판했다. 영국식 정치가 독립된 인도에서도 지속됨을 통탄했다. 영성이 부재한 정치가 인도에서 결코 오래갈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결국 그렇게 숨을 거둔다.

그의 <힌두뜨와>가 21세기에 와서야 인도의 영감이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몽상가로서 끝났던 그의 삶이 예언가로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세계힌두협회(VHP), 민족봉사단(RSS), 인도인민당(BJP)이 삼위일체가 되어 힌두 국가 만들기가 한창이다.

이 동향을 흔히 '우경화'라고 한다. 그런 구석이 분명히 있다. 위태한 측면이, 아슬아슬한 지점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어떤 돌파구를 열고 있음 또한 분명하다고 하겠다. 20세기 민족 해방 운동의 어떤 곤경을 해결해가는 통과 의례, 시행착오처럼 보인다. 민족 해방의 결정적 역설, 즉 '혼/백의 분단 체제'를 극복해가는 과정으로 접수되는 것이다. 다음 주에 이어가기로 한다.

▲ 사바르카르에게 절하는 모디.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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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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