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다가오자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설에 어디로 갈까. 그건 '누가 내 가족일까?' 하는 생각과 겹친다. 결혼 때 '내 가족'이라고 이름 붙은 곳은 시댁이었다. 명절 며칠 전부터 시댁에 가서 제사상에 올릴 전이며 고기며 나물을 준비하느라 부산을 떠는 게 당연했다. 꿈쩍 않는 남편들 때문에 복장 터졌으며 속으로 욕도 어지간히 했고, 명절 당일에는 허둥지둥 세배를 하고 바리바리 싸 주는 음식을 들고 오기도 했다. 동서지간에 누가 먼저 부엌에 와서 일하고 누가 먼저 집에 가느냐로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였다.
이혼하고 나서 시어머니가 문자 한 통을 보냈다. "너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가슴 아프구나." 남편과 이별하는 것을 선택하자, '어머님, 아버님' 하고 불렀던 관계들도 우수수 다 떨어져 나갔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의 가족이 아니다. 전 남편이 아이를 기르지는 않겠지만, 친권은 양보 못 한다고 명토 박고 명절 때 아이를 꼬박꼬박 데려갔다. 아빠와 만날 시간이 적은 아이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싶었다. 아이는 아직 그들의 가족이다. 아이한테는 곁이 되는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좋은 거겠지.
이혼한 첫해 명절, 나는 고향에 가려고 했다. 부모님을 만나고 오랫동안 못 본 친척들 얼굴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명절 때 내려오지 말라고 전화했다. "니가 서울 가서 잘 사는 줄 아는데, 여기 오면 이혼했다는 거 소문나고, 아버지 체면도 안 서고, 친척들도 인사가 많을 낀데…." 매몰차게 잘려나간 기분이었다. 연휴 내내 집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다. 친척 결혼식 때도 가겠다고 하니, 어머니가 전화로 말렸다. "친척들이 너 보면 말이 많을 텐데, 오지 마라." 그래도 갈 거라고 하자, "부조금 따로 들고 와라, 5만 원 이상은 돼야 한다"고 해서 그만 안 가기로 했다.
이혼한 뒤, 어머니는 종종 나를 두고 그랬다. "넌 이제 돈이 없잖아." 나를 '폐 끼칠지 모를 가난뱅이' 취급하는구나 싶어 부아가 났다. 안부 전화를 드려도 "돈이 필요한 거니?"라고 되묻는 말을 듣는 것이 싫어 전화도 자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놈의 고향, 안 가면 그만일 것을, 다음 해도 나는 명절 때 내려가겠다고 했다. "오지 마. 와서 뭐 특별한 거 있냐?" 어머니의 시큰둥한 말에 나는 농담처럼 떡국도 나물도 먹고 싶다고 했다. 차가운 대꾸가 돌아왔다. "니가 사서 해 먹어. 내가 니한테 밥은 못 해 준다." 이혼한 딸이 뭐 잘난 거 있다고 집구석에 돌아와 이것저것 주워 먹으려 하느냐는 소리 같았다. 응석, 맞다. 혼자 돈 벌고 아이 키우면서 생기는 긴장을 남의 집에 가서 풀고 남의 가족의 온기 속에 나도 보살핌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을 누리고 싶은 거였다. 남한테는 필시 불편할 손님 행세를 하고 싶은 거였다.
그날 나는 시장을 쏘다녔다. 지글지글 부치는 전들, 김이 오르는 떡들, 삶아 데쳐 놓은 나물들, 고기들, 돈을 내기 전에는 한 점도 먹을 수 없는 그것을, 누가 맛보라며 인심 좋게 내 입에 넣어 주는 상상을 하며 헤맸다.
이혼할 때 우리 집에 온 아버지가 그랬다. "애는 그쪽 집에 주고 와라." 아이는 내가 기르겠다고 마음먹은 참에 뜻밖의 말을 들은 것이다. "왜요?" "어차피 애가 크면 자기 아빠가 있는 데로 가게 되어 있다. 외가에서 아무리 잘해 줘도 소용없으니 보내라." 싫다고 했다. 내가 낳은 아이니, 내 아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성(姓)이 다른 애를 키워 봤자 소용없다고 한다. 평소에 "외손자랑 친손자가 같으냐? 친손주를 보게 되면 그렇게 귀엽단다"며 차별적인 말을 해 딸인 내 마음이 적잖이 섭섭했더랬다. 그래서 한마디 했다. "아빠, 성씨는요, 요즘 법원에 신청하면 바꿀 수 있어요. 제 성을 따르게 할 수도 있다고요." 그 집안 자식, 운운하던 아버지는 내 말에 질색했다. "그렇게 하지 마라! 절대 그렇게 하지 마!"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전혀 합리적이지 않고 근거도 없이, 내 자손, 남의 자손 편 가르며 구분하는 부계 혈통주의를 비웃었다. 자기 성을 따르게 되면, 자기한테 붙은 혹이 될까 봐 아버지는 기겁하는 것이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성씨란 것도 남자들 성만 앞세우고 여자들 성은 싹 제외한 터무니없는 것 아닌가. 우리 아이의 성씨가 무엇이든 소중한 내 자식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성이 없고 이름이 없으면 어떤가. 아이한테 그렇게 케케묵은 고정관념으로 상처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날, 같이 밥을 먹을 때 친정 부모가 내 자식에게 얼마나 거리를 두고 불편해하며 '쟤만 없었더라면…' 하는 시선을 보내는지 봤다.
어머니까지 합세했다. "니가 고향에 내려오면, 우리 좋은 시절은 다 끝났다고 아버지랑 둘이서 말했단다." 지레 연금 받고 사는 아버지한테 부담 주는 딸 취급을 하는 것 같아 내가 딱 잘라 말했다. "나는 아무한테도 손 안 벌리고 서울에서 혼자 아이를 키울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때 어머니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럼, 우린 고맙지."
그때 나는 고향에 돌아가 살고 싶었던 마음을 바꿨다. 고맙다지 않은가. 서울에서 죽은 듯이 살아 주면, 고향에 와서 소문내지 않고, 자기네 체면도 깎지 않고, 돈도 빌리지 않고, 도와 달란 소리도 없이 살아만 준다면 고맙다는데, 못 할 건 뭐냐? 무얼 더 염치없이 바랄까? 다 키운 딸자식, 결혼시켜 놓고 한숨 돌렸는데, 또 우는소리 하니 달갑지 않은 건 인지상정. 실망과 울화통이 터질 만하지. 그렇게 넘기는 것이 상책이다.
텔레비전에 귀성 모습이 비친다. 아빠와 엄마가 있고, 색동옷 입은 아이들이 있고 선물 꾸러미에 푸짐한 식탁에 세배하고 덕담을 나누는 모습이다. 저런 가족만 가족인 걸까? 우리 부모도 내가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면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겨 줄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런 걸….
여기 나 왔어요. 힘겨웠던 시간을 보내고도 정신이 말짱하고 더 단단해지고 오지랖이 넓어진, 당신들의 자랑스러운 딸이 혼자 귀향했어요. 궁금하던 세상 두루 살피고 하고 싶은 사랑 맘껏 거치고 원하던 아이 낳아서 성큼성큼 집으로 돌아왔어요. 문고리를 잠그고 덜덜 떨며 두려워하는 부모여, 부디 문을 열고 나를 맞아 주세요. 나는 당신들이 기른 딸, 당신들이 내보낸 세상에서 자란 딸, 마음으로 여전히 당신들을 사랑하는 그 딸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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