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시작되던 어느 날 아침. 출근을 해보니 낯익은 인상의 여성이 사무실 상담 대기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나쁜 기억력을 더듬기도 전에 여성이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 그 때 이혼 각서 문제로 찾아왔다가…."
생각이 났다. 그 해 봄이 시작될 무렵 남편과 '잘' 헤어지고 싶다며 찾아왔던 의뢰인이었다.
의뢰인은 미용실을 운영하는 40대 초반의 여성으로, 15살, 7살 자녀를 키우고 있었다. 지금의 남편과는 재혼이었다. 재혼한 지는 10년이 조금 넘었다. 첫 번째 결혼 생활은 길지 못했다. 전 남편은 자상한 사람이었지만 도박 중독이었다. 아이가 태어났지만, 전 남편은 도박을 멈추지 못했다. 남편은 아이가 돌이 되기도 전에 의뢰인과 결혼하면서 장만한 전셋집과 세간까지 다 들어먹었다. 의뢰인 앞으로 적잖은 빚마저 생겼다. 앞으로 살날이 막막했다. 전 남편에게 빌다시피 애원해서 이혼을 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어렵게 끝낸 의뢰인은 재혼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이와 먹고사는 것이 급했다.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을 받아 직업 교육으로 미용 기술을 익혔다. 미용실 바닥 쓸기 같이 잡다한 일을 하며 싱글맘으로 자리를 잡았다. 결혼이 아니어도 행복해질 것 같았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이 남자는 도박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전 남편과는 달리 의뢰인에게 더 많이 집중했고, 좀 더 엄격한 것도 같았다. 그런 남자한테 왠지 의지가 됐다. 곧 학교에 들어갈 아이가 한 부모 가정이란 편견을 받을까 걱정도 됐다. 남자가 아이를 친양자로 입양하자고 말했다. 내 아이로 키울 거라 다짐도 했다. 재혼이라 망설여지면서도 재혼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렇게 의뢰인은 재혼했다. 한동안은 행복한 것 같았다. 맞벌이를 하니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이번에도 행복이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 날 남자 손님의 머리를 감겨주던 의뢰인을 우연히 본 남편이 불 같이 화를 냈다. 그런 남편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러냐고 묻는데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다. 처음으로 남편에게 맞은 날이었다.
남편은 의뢰인을 때린 날이면 유난히 다정했다. 때린 이유를 의뢰인이 남편을 '떠날까봐'라고도 했고, 의뢰인이 '화를 돋게 만들어서'라고도 했다. 의뢰인은 자신이 조심하면 남편이 바뀔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떤 날은 아이가 보는 데서 맞았다.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임신을 했다.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지만 남편의 의처증이 호전되진 않았다. 그렇게 결혼 10년차가 되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계속해서 사업에 실패했다. 남편의 의처증도 더 심해졌다. 의뢰인이 이혼을 간곡히 원하자, 남편은 의뢰인에게 재산을 다 포기하면 이혼을 해주마 약속했다. 의뢰인은 이제 그만 놓고 싶었다. 아직 젊으니 돈은 더 벌면 될 일이라 생각했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큰 아이가 받은 상처도 너무 컸다.
의뢰인은 "전 재산을 양보하겠다, 작은 아이를 남편에게 주겠다, 매달 작은아이의 양육비를 지급하겠다"라는 이혼 합의서를 썼다. 그러나 남편이 쉬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다. 결국 의뢰인이 변호사 사무실을 찾게 됐고 나를 만났었다. 당시에도 남편의 의처증이나 폭력과 관계된 증거들이 부족했다.
그러나 큰 아이가 진술을 할 수 있는 정도의 나이고, 어느 해인가 경찰에 신고를 한 적도 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뗀 진단서도 있었다. 의뢰인은 그저 이혼만 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폭행과 상해로 고소를 하고, 이혼 소송도 제기하자고 권했다. 지난봄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의뢰인에겐 남편에 대한 연민도 생기고 남편이 키울 작은 아이에 대한 걱정도 생겼다. 결국 소송을 포기하고 일단은 별거나 하자 마음을 바꿨다. 그 후 연락이 없었다. 의뢰인으로 하여금 나를 다시 찾게 만든 건, 남편이 그 즈음 먼저 이혼 합의서를 근거로 이혼과 전 재산, 양육비 지급을 청구했기 때문이었다. 소장 사본을 들고 찾아온 의뢰인은 망연자실해 있었다. 큰아이와 먹고살던 미용실을 당장 뺏기게 생겼다며 한참을 울었다.
불안해하는 의뢰인에게 이제라도 반소를 제기하고 차근차근 대처하면 된다고 다독였다. 이혼 전에 바람을 피면 이혼하고 전 재산을 다 상대방에게 주네 어쩌네 하는 식의 부부 간의 각서들은 소송에서 효력을 인정받기 어렵다. 따라서 재판 과정에서 법리에 따라 재산 분할을 다시 받을 수 있다. 혼인 파탄의 책임이 있는 상대방에게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의뢰인의 경우도 남편의 의처증으로 인한 폭력이 혼인을 파탄시킨 것이니 위자료를 청구하기 충분해 보였다. 특히 큰 아이가 남편에게 친양자라 하더라도 남편의 양육의 의무가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남편이 의뢰인에게 일방적으로 둘째 아이의 양육비를 청구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의뢰인은 남편의 이혼 소송에 대하여 반소를 제기하여 적극적으로 다투고 있고, 남편의 폭력 행위에 대한 형사 고소도 진행하고 있다. 의뢰인의 이혼 소송이나 형사 고소가 처음에 불발된 것은 다소 아쉽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권리를 찾고자 나선 것은 아이를 위해서나 의뢰인을 위해서나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정폭력을 해결하고 이혼 소송을 하는 과정과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증거의 문제다. 대부분의 경우 겁에 질리고 수치심에 쉬쉬하는데, 그러면 증거가 확보되기 어렵다. 따라서 남편에게 의처증이 보이거나 남편이 폭력을 휘두른다면, 당장 이혼을 하지는 않더라도 나중을 위해서 맞은 곳의 사진을 찍어둔다거나 바로 직후에 상담 센터에 전화를 걸어 상담 흔적이라도 남겨두는 것이 좋다. 하다못해 물건을 던져 유리창을 깨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유리를 교체하는 과정이라도 남기 때문이다.
이혼 전에 쌍방이 작성한 이혼 합의서나 각서는 그 자체로는 이혼 소송에서 효력을 갖기 어렵다. 더구나 배우자의 협박이나 폭력에 의해 작성하였다면, 그것은 비단 이혼 합의서가 아니라 하더라도 무효의 법률 행위에 해당한다. 원하지 않는데 강요받아 작성한 서류일수록 그 등장에 당황하지 말고 그 효력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옛말이 있다. 구닥다리 같은 속담이고 뻔한 이야기지만, 예나 지금이나 통용되는 바른 말이다.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 포기하지 말고 그 때부터 증거를 모을 것, 별거 아니지만 내가 상처받고 있음을 보여줄 만한 증거가 무엇이 있을지 고민할 것, 강요에 의해 한 행동들이 다 불리하게만 작용될 거라고 맹신하지 말 것, 그리고 경찰이든 법원이든 변호사든 전문가와 상의할 것.
너무 늦은 때도 없고 이미 끝난 삶도 없다. 지레 포기할 때 삶도 끝난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고 결심하고 다시 행복하자, 결심한 순간, 그 때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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