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을 만드세요!

[김형찬의 동네 한의학] 당신의 인생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나요?

"한 가지 근심이 없어지니 또 하나가 생겼어. 내 팔자가 그런가봐."

며칠 전에 "밤마다 쑤셔서 잠 못 이루던 어깨가 날아갈 것 같다"며 주말에 쑥 뜯으러 간다고 했던 분인지라 무슨 일인가 했지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드님 정기 검진 결과가 나왔는데 무슨 탈이 난건지 병원에서 다시 항암 주사를 맞자고 했답니다.

"그 독한 주사를 27번이나 맞았어. 다른 사람들은 힘들어서 맞다가 포기도 한다는데…. 그걸 또 맞아야 한다고 하니 쑥이고 뭐고 다 내팽겨 쳐버리고 왔어. 그놈도 그랬지만 나도 얼마나 조심조심 살았는데…."

쑥을 다듬느라 까맣게 물든 손으로 연방 눈가를 훔치는 환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겨울에 수술하고 내내 힘든 데다, 아드님 바쁘다고 어디 한번 같이 놀러가지도 못하셨지요? 매번 놀러 가시라고 할 때마다 '뭐 그런 걸 가느냐'고 하셨지만, 이번 항암 치료 들어가기 전에 아드님하고 꽃구경 한번 다녀오세요. 늘 음식해서 다른 사람들 나눠만 주셨으니, 이번에는 남들이 맛있다는 음식도 사서 드시고요. 서로 그렇게 걱정만 하지 마시고, 아드님 오시면 또 말해 둘 테니 '가자'고 하면 못이기는 척 다녀오세요."

진료하다 보면 많은 분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병이 결국은 한 사람의 인생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병을 따라 가다 보면 그분이 겪은 크고 작은 일을 자연스레 듣지요. 가족을 먼저 떠나보낸 일, 오랫동안 시집살이하면서 가슴에 쌓아둔 일과 같은 가슴 아픈 일도 있고, 자식들이 잘 되거나 손자․손녀들이 잘 크는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운 일도 있습니다. 물론 아파서 온 분이라 병을 따라 올라오는 이야기란 대체로 힘들고, 우울하고, 슬프지요.

그런데 종종 너무 오랫동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을 볼 때가 있습니다.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이미 다 지난 일이고 지금은 괜찮다고 하시지만, 몸과 마음의 일부분이 그 시간에 멈춰 있지요. 대부분은 누가 봐도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기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때론 너무나 사소한 일이나 말 한마디가 그 분을 옭아맨 경우도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뎌지고 잊혀 그 힘을 잃기도 하지만, 어떤 위기상황이 되면 스멀스멀 올라와서 몸과 마음에 그늘을 드리우지요.

이런 분에게는 "과거와 화해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만, 지금부터 행복한 이야기를 채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시소가 한쪽으로 기울 때 내려간 쪽을 붙들어 올릴 수 있지요. 그러나 반대편에 무게를 더하면 자연히 반대로 기우는 것처럼, 지금부터 +가 되는 일을 많이 채우면 자연스레 -의 이야기는 힘을 잃을 것이라고(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존재하지만 영향력이 줄 뿐이지요) 이야기합니다.

내 삶의 이야기가 +(양)과 -(음)에 균형 잡혀 뿌리를 내리면 슬플 때는 +의 이야기에서 힘을 끌어 올리고, 너무 넘칠 때는 -의 이야기를 기억해 흔들리지만 쓰러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즐거운 이야기는 남들의 시선 신경 쓰지 말고(이것 때문에 우물쭈물 하시는 분들도 꽤 있더군요), 아주 사소해도 좋으니 내밀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들로 채우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만드는 게 좋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수긍하시는 분도 있지만 "그게 맘대로 되나요?", "내 나이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이 끝나는 날은 아무도 알 수가 없고 환자분 보다 제가 먼저 그 때를 맞을 수도 있지만, 그 순간까지 우리는 어쨌든 행복한 이야기를 채우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립니다. 그럼 서로 실없이 웃으며 대화가 끝나지요.

오시라 한 날인데 앞서 환자께서 오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면 아드님과 손잡고 떨어지는 벚꽃을 바라보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비 페닉은 "우리가 죽어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기억뿐"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올 봄, 개나리꽃이 다 떨어지기 전에 언제고 꺼내 볼 수 있는 행복한 기억 하나 만드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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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찬

생각과 삶이 바뀌면 건강도 변화한다는 신념으로 진료실을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텃밭 속에 숨은 약초>, <내 몸과 친해지는 생활 한의학>, <50 60 70 한의학> 등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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