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13일 파리 테러가 일어났던 바타클랑 극장에서 레퓌블리크 광장을 지나 10분 정도 걸어가면, 모퉁이에 상큼하게 하늘색으로 칠해진 아담한 가게가 나타난다. 하늘색 문을 열고 들어서면 60제곱미터(㎡)의 공간 정중앙에 채소와 과일이 기둥을 빙 둘러싸고 초록·노랑·주황·보라 등 저마다 알록달록한 색을 뽐내며 수다를 떤다. 기둥 뒤편에는 옅은 갈색·짙은 갈색·노란색·상아색·흰색의 커피·파스타·쌀·콩 등이 투명한 사일로(곡류을 보관하는 원통형 용기)에 담겨 정렬된 파스텔처럼 병풍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시각적 자극뿐 아니라 코에도 신호가 감지된다. 은은하게 과일 향도 나고, 볶은 커피 향도 나고, 수프 향도 나면서 허기를 부른다.
수프도, 포도주도, 세제도 직접 담아 간다
비치된 재활용 종이봉지에 식품을 사고 싶은 만큼 담아 저울에 올려놓고, 식품의 번호를 누르면 가격표가 출력된다. 볶은 커피콩은 그 자리에서 무료로 갈아 병이나 봉지에 담아 갈 수 있다. 채소나 과일은 봉지 없이 무게를 달아 바구니에 담아도 되고, 얇은 천으로 된 주머니에 담아서 잴 수도 있다. 수프는 플라스틱 그릇에 담아 뚜껑을 덮어 가져갈 수 있는데, 이 플라스틱 그릇은 해초로 만들었기 때문에 생분해돼서 퇴비통에 버려도 된다고 한다.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담을 긴 녹색병도 있고, 꿀을 담을 주먹만 한 투명한 병도 있다. 청소 및 설거지 세제는 반드시 동일한 세제통에 다시 채워 가야 한다. 재활용 종이봉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천 주머니, 해초로 만든 플라스틱 그릇, 병은 모두 매장에서 구입할 수 있다. 이것들은 물론 재활용할 수 있고, 집에서 직접 담아 갈 용기를 가져오면 더욱 좋다. 그런 경우 빈 용기의 무게를 먼저 재서 무게표를 붙인 뒤 장을 보고, 계산대에서 용기의 무게를 제하고 계산한다. 소비자들이 다들 알아서 챙겨 오는 용기는 달걀통이다.
포장 없으니 원하는 만큼 살 수 있어
환경을 생각하는 이 착한 가게의 이름은 '비오콥21(Biocoop21)'.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1. 프랑스어로 ‘콥21’)를 전후로 준비된 시민행사의 하나로, 파리 10구 시청에서 '비오콥'에 액체로 된 상품을 포함해서 100%무포장·무비닐·유기농 거래를 제안해 오면서 시작됐다.
비오콥은 연대와 친환경을 통해서 상거래를 하자는 취지로 2005년 생겨난 프랑스의 유기농 생협 매장이다. 일반 슈퍼마켓 체인과 다르게 협동조합으로 운영된다는 점이 '한살림'과 비슷한데, 조합원이 아닌 일반 소비자도 장을 볼 수 있다는 점과 각각의 매장이 독립적으로 운영하여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다는 점이 다르다. 유럽연합(EU)의 유기농 인증마크 'AB'는 해당 식품 구성성분 중 95%가 유기농이면 받을 수 있는데 비오콥은 무비료·무농약의 100% 유기농을 고집할 뿐만 아니라 유전자조작식품(GMO) 을 취급하지 않으며, 반경 150z킬로미터(㎞) 이내의 지역 농산물을 우선한다. 은행이나 부동산이 아닌 농부에게 이익을 재투자하여 유기농업 재생산을 유도하며, 공정거래와 환경윤리에 민감해서 무늬만 유기농인 다른 체인과 크게 다르다.
모든 비오콥 매장은 애초부터 석유를 원료로 하는 비닐봉지를 나눠 주지 않았으며, 석유 추출물이 들어간 화학제품을 취급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일반 슈퍼마켓에서는 못 구하는 곡류와 지역에서 생산된 싱싱한 채소를 구할 수 있으며 과일, 채소, 쌀· 콩 등 곡류, 파스타, 쿠키, 고기, 치즈, 빵 등을 원하는 만큼 살 수 있다. 한국인이 자주 소비하는 쌀·콩 등 곡류와 건어물 등 마른 식품을 대상으로 하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비오콥 레퓌블리크 매장이 파리 10구 시청의 제안을 받아들여 비오콥21 프로젝트가 구체화됐다. 시청에서 알선한 자리에 시장가격으로 월세를 지급하고 두 달간 시험 운영에 들어갔다. 파리총회(COP21) 관련 행사였던 덕분에 평소에 광고 한번 안 '때리는' 비오콥이 언론에 많이 노출됐다.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많았고, 토요일이 되면 코딱지만 한 가게가 미어터졌다. 무포장·무비닐 슈퍼마켓은 프랑스에 15군데 있는데, 100% 유기농 식료품만 취급하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두 달 시험 운영한 결과가 예상보다 좋아 시청은 2월 말까지 임대차계약을 연장해 주었다. 올해 프랑스에서만 무포장 가게가 160군데 새로 열릴 예정이다.
가격 거품 빠지고 비닐쓰레기 줄어드니 일석이조
비닐과 플라스틱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끔찍하다. 2012년 스페인 안달루시아 해안에 떠밀려온 4.5톤(t)의 삐쩍 마른 고래 뱃속에서 플라스틱 17킬로그램(㎏)이 발견됐고, 2013년 네덜란드의 한 해안에서 발견된 50t의 죽은 고래 뱃속에서는 플라스틱 20㎏이 나왔다. 바다거북이 물속에 떠다니는 비닐봉지를 해파리인 줄 알고 삼키면 잘 찢기지 않는 비닐이 바다거북의 몸속을 지나면서 창자를 찢어 놓는다. 이렇게 죽어가는 해양 포유동물이 연간 10만 마리, 물새가 100만 마리나 된다. 게다가 비닐봉지가 햇빛에 의해 미세한 중합체 분자로 분해되면 바다가 오염되고 해양 먹이사슬이 교란된다.
비닐봉지가 자연 분해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0년, 해마다 바다에서 건져지는 비닐봉지가 자그마치 2만 4000t. 지난 1월 19일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의 발표에 따르면 "이대로 가다가는 2050년에는 '무게 대비' 바다에 물고기보다 플라스틱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최근에 프랑스에서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한 해 500억 개의 플라스틱봉지, 즉 비닐봉지가 생산되는데 t당 5774킬로와트시(kWh)의 전기와 180리터(ℓ)의 석유가 소모된다. 한 사람당 한 해 평균 350~500개의 비닐봉지를 쓰는데 사용시간은 평균 20분이고, 고작 1%만이 재활용된다.
이 글을 읽는 당신과 가족이 비닐포장과 비닐봉지를 거부하면, 그만큼 석유가 필요하지 않게 되고 바다와 해양 동물을 오염과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 한국에도 포장과 비닐이 없는 유기농 매장이 들어서고 인식 있는 소비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기를 소망한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우리나라 대표 생협 한살림과 함께 '생명 존중, 인간 중심'의 정신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살림은 1986년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면서 싹을 틔워, 1988년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1989년 '한살림모임'을 결성하고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생명의 세계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은 계간지 <모심과 살림>과 월간지 <살림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인간의 소중함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기 : <살림이야기>)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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