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어이를 상실케 하는 역대 급 '철판 발언'인데요.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박 대통령은 협상의 성과뿐만 아니라 협상에 임하는 자신의 진정성까지 강조했습니다. "다급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합의를 위해 노력했다"고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한 분이라도 더 생존해 계실 때 사과를 받고 마음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게 했다고요.
결국 상황론을 편 겁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시는 상황을 조건 삼아 하루라도 빨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표를 도출하고, 이 목표를 위안부 합의를 최상급으로 셀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은 겁니다. 그러니까 박 대통령의 역대 급 '철판 발언'의 시작점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시는 상황, 이런 상황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자신의 다급하고 절박한 심정이 되는 것인데요. 정말 그럴까요?
5개월 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지난해 8월 25일인데요. 남북이 고위당국자 접촉을 갖고 6개 합의내용을 도출했습니다. 북한의 지뢰도발로 조성된 긴장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합의였는데요. 이 합의를 놓고 정부여당은 '박 대통령의 원칙의 승리'라고 상찬했습니다. 여권의 핵심 관계자라는 사람들은 박 대통령이 남북 접촉 상황을 CCTV로 직접 챙겨보다가 재발방지책 부문 등에서 접촉이 벽에 막히자 철수를 지시하기까지 했다고 언론에 흘리며 '박근혜의 원칙과 그 원칙이 빚어낸 승리'를 강조했고, 친박의 좌장인 서청원 의원은 다음 날 청와대에서 열린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 오찬 자리에서 '원칙의 승리다'라는 건배사를 외쳤습니다. 8.25 합의가 "단호한 대응이란 원칙을 고수한 박 대통령의 철학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극찬하면서요.
박 대통령의 '원칙의 승리'로 상찬된 8.25 합의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이산가족 상봉이었는데요. 바로 이 지점에서 반문이 터져 나옵니다. 이산가족 생존자의 평균 나이는 78세입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마찬가지로 한 분 두 분 돌아가시고 있습니다. 정말 '다급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북한과 협상을 벌여 이산가족 상봉의 '불가역적인' 성사를 끌어내야 합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당시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의 판을 깨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원칙을 고수하려 했습니다. 정부여당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위안부 협상에서는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래놓고 왜 이제 와서 '원칙의 승리' 대신 '상황론'을 들이대는 걸까요? 이건 이율배반적 행보입니다.
정반대로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원칙의 승리'라는 건 정부여당의 셀프 평가일 뿐 당시 국민과 전문가는 8.25 합의를 '반쪽짜리 미봉'으로 평가했습니다.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을 낳았던 직접적 계기인 북한의 지뢰도발과 관련해 합의문에 책임 소재와 사과 내용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합의문 2항에 '북측은 최근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남측지역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데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는 문구가 들어 있지만, '지뢰 도발'이 아닌 '지뢰 폭발'로 표현돼 있고, 지뢰 도발의 책임 소재와 사과 표현은 건너뛰었었으니까요.
이렇게 보면 너무 흡사합니다. 8.25 합의와 위안부 합의는 싱크로율 99%입니다. 청와대는 책임 인정과 사과를 받아냈다고 강변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복사판입니다. 북한도 사과(엄밀하게는 유감 표명)했지만 뭘 사과했는지 모호하고, 아베도 책임을 언급했지만 어떤 차원의 책임인지를 명확히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청와대는 '승리'니 '최상'이니 하며 역대 급 '자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붕어빵입니다.
박 대통령의 외교안보 행보는 최악입니다. 아무리 좋게 봐도 이율배반이고, 있는 그대로 보면 굴욕적임과 동시에 기만적입니다. 협상 상대에 밀려 합의의 뼈대를 놓쳐버렸다는 점에서 굴욕적이고, 그 굴욕적 결과를 국민 앞에서 최상급으로 포장했다는 점에서 기만적입니다. 박 대통령의 어제 담화는 그저 이 사실을 재확인하는 자리였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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