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하면서 많은 책과 모아 놓은 잡동사니들이 사라졌는데, 그중에는 10여 년 가까이 제 방문에 붙여져 있던 사진(아마도 컴퓨터로 합성한 이미지겠지만요)이 있습니다. 어느 과학잡지에서 제작한 건데, 4절지 정도의 크기에 우리 은하의 모습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하의 팔 중에 약간 오른쪽 아래에 위치한 팔에 작은 검은 점이 찍혀있고, 캡션으로 '위 아 히어(We are here)'라고 적혀있었지요. (그 점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계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가끔 아침에 일어나 그 그림을 보면서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의 축과 공간의 축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를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저 점 안에, 우주의 역사 안에 나를 찍어보자면 한없이 아득했지요. 의식이 올라온 후에는, 그 모든 것이 내가 사라지면 나에게는 무의미하다는 것 또한 자명해졌습니다. 비몽사몽 간에 이런 생각을 하다가(때론 다시 잠들기도 했지요) '나에게 주어진 것은 또 오늘 하루'라는 약간의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고, 이러한 아침의 일상은 지금도 계속되고(간혹 딸아이가 "아빠 뭐해?"라며 다가와, 아이를 안아주느라 멈추곤 하지만) 있습니다.
"13년이 지났을 때(우주의 역사를 10억분의 일로 줄여서 환산) 우주는 13년을 산 것이고, 지구는 불과 5년도 되지 않은 세월을 산 것이다. 복잡한 다세포 생명체는 약 7개월 동안 존재했고, 호미닌은 약 3일, 인간은 불과 50분 정도 존재했다. 농업 사회는 불과 5분 정도 존재했고, 인간이 말하는 문명의 전체 역사는 고작 3분 정도에 불과하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산업혁명은 6초 전에 일어난 일이다." (<시간의 지도>(데이비드 크리스천 지음, 이근영 옮김, 심산 펴냄))
저 자신도 그렇지만, 환자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창문을 열고 환기하듯이 몸과 마음을 한 번쯤 활짝 열어젖혀야 할 필요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누구나 눈앞에 놓인 현실을 살아가지만, 현실에 너무 깊이 빠져 본인이 본래 가지고 있는 빛을(건강을) 조금씩 잃어가는 것을 보면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참으로 작다는 생각을 하곤 하지요.
이런 분들과는 증상과 관계없이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실없는 농담도 하고, 위대했던 사람들이 남긴 말씀을 나누면서 그들의 굳어버린 몸과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려고 노력합니다. 대다수가 큰 병에 걸려, 큰 병원에 가서 유명한 의사를 만나기 전까지 웬만하면 삶의 태도를 바꾸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능하면 그렇게 안 되는 게 좋으니, 그 전에 시들어가는 건강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작업을 해야 하지요.
그런데 최근 들어 반갑게도(한참 미시사적 관점의 책들이 유행한 적도 있었지요) 우리의 시야와 사고를 확장해 주는 좋은 책들이 나오고 있어서 환자들에게 슬쩍슬쩍 권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나에게 닥친 일을 해결해 주지도, 병을 낫게 해주지도, 내 속을 썩이는 사람의 변화를 일으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실은 대단한 게 아니고, 인간종이 존재한 이래로 끝없이 되풀이했으며, 아마도 새로운 인간종이 나타나지 않는 한(이들 또한 어떨지는 알지 못하지만) 지속하리라는 인식을 하게 해줍니다.
그러고 나면 고갱의 마지막 작품 이름처럼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얻을 수가 있지요. 이런 큰 그림이 그려지고 나면 당면한 문제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병에 관해서도 ‘이 병은 어디서 왔는가? 나에게 있어 이 병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병을 통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지요. 이 수준까지 이르면 병에 안 걸리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보다 병과 건강을 잘 다룰 수 있게 되고, 수직적이고 의존적인 의사와의 관계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불과 몇 세대 전만 해도 구전이나 책으로 전해져 온 우주와 생명, 그리고 인간에 관한 큰 이야기가 일상적이었고 인간의 삶에 깊숙이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인간이 과학이라 부르는 지식을 조금 알게 되었을 때, 그런 이야기는 전설이나 설화 혹은 미신이 되어버렸지요. 그러던 것이 인간이 조금 더 알게 되자 이제 현대인이 신봉하는 과학의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많은 시험과 과정을 거치면서 늘 당면한 과제를 풀어내는 데 익숙한 삶을 살아갑니다. 너무나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와 우리가 정신을 못 차리게 하고, 눈앞에 놓인 문제에만 묻히게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야 길을 잃지 않을 수 있고, 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삶을 사는 것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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