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이재명, 악마와 더 화끈하게 키스하라!"

[기자의 눈] 우리는 새로운 포퓰리즘이 필요하다

"포퓰리즘은 악마의 속삭임."

다음 대선 후보로 공공연히 거론되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6일 이렇게 말했다. 그가 지칭하는 '악마'의 구체적인 인물은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성남시장이다. 이들의 복지 정책이 "당장에는 달콤할지 몰라도 나라 재정을 거덜 내는 치명적인 독"이라는 것이다. 곧바로 박 시장과 이 시장의 반박이 이어졌다. (☞관련 기사 : 김무성 "박원순·이재명, 악마의 속삭임")

"박근혜 대통령이 나라를 팔아먹어도 35%는 지지할 것."

같은 시간에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에서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TV 토론에서 했던 이런 발언도 화제가 되었다. 날이 서린 말이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고정 지지층 35%가 한국 정치의 실재하는 상수라는 건 엄연한 사실이니까. (☞관련 기사 : 유시민 "대통령 나라 팔아먹어도 35%는 지지할 것")

공교롭게도 같은 시간에 화제가 된 이 두 설화는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쇳말을 가리킨다. 바로 김무성 대표가 직접 언급한 '포퓰리즘'이다. 왜냐하면, 김무성 대표가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공격하는 실체가 '좌익 포퓰리즘'이라면, 유시민 전 장관은 한국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우익 포퓰리즘"을 언급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를 가로지르는 이 포퓰리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포퓰리즘은 과연 "악마의 속삭임"인가? 마침 이런 질문에 답하는 논문이 한 편 있었다. 정치철학자 진태원 박사(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교수)가 2013년 <역사비평> 겨울호에 기고한 다음 글이다. '포퓰리즘, 민주주의, 민중'.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열쇳말, 포퓰리즘

먼저 한 가지 전제부터 다시 확인하자. 지금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열쇳말로 포퓰리즘이 정말로 유효할까?

그렇다. 왜냐하면, 진태원 박사가 지적했듯이 포퓰리즘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2000년대 이후 한국 정치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김대중(DJ)이나 김영삼(YS)에 버금가는 인상적인 정치 경력이나 조직 없이 노무현 대통령이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한 것을 넓은 의미에서 포퓰리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노무현 대통령에 열광하던 이들까지 포함해) 전 국민의 상당수가 반쯤 넋이 나가서 '대박'의 꿈을 안고 당선시킨 이명박 대통령은 또 어떤가? 유시민 전 장관의 지적대로 '어게인 박정희'를 마음에 품고 박근혜 대통령을 '묻지마' 지지하는 "35%"도 포퓰리즘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 대척점도 마찬가지다. 정치에 뜻이 없다며 수차례 손사래 쳤던 사람을 단지 "노무현 대통령"의 '비서'였다는 이유 하나로 야권의 대통령 후보로 만든 '애도의 물결'을 포퓰리즘 말고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심지어 그는 지금 거대 야당의 수장이고, 공공연히 다음 대선의 상수로 꼽힌다. 그러고 보니, 또 다른 대선 후보를 만든 '안철수 현상'도 있었다.

심지어 정당의 대통령 후보까지도 여론 조사로 결정하는 모습이나 여야가 함께 추진하는 '국민 경선제' 역시 포퓰리즘의 한 모습이다. 진태원 박사는 "탈이념을 내세우며"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집약적인 슬로건을 내세우고 감성에 호소하는" 한국 정치도 공유하는 현대 정치의 공통적인 현상 모두 포퓰리즘의 특징이라고 지적한다.

"포퓰리즘은 기층 민중의 저항 운동"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긴다. 이렇게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쇳말이 포퓰리즘인데, 왜 그것은 부정적인 단어로 자리매김하고 있을까?

이 대목에서는 김무성 대표와 유시민 전 장관도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정치 지형의 왼쪽에 있든 오른쪽에 있든 포퓰리즘은 모두 부정적인 것이다. 김 대표는 그것을 아예 "악마의 속삭임"으로 규정했고, 유 전 장관도 심지어 "나라를 팔아먹어도"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할지 모르는 "35%"를 포퓰리즘의 부정적인 결과로 보는 게 확실하다.

그런데 포퓰리즘은 과연 민주주의의 적인가?

우선 역사적인 사실부터 따져보자. 앞에서 언급한 논문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19세기 후반 러시아 농민을 계몽하려 했던 러시아 혁명가들(나로드니키)의 농촌 개혁 운동과, 같은 시기 미국에서 대지주 및 금융 재벌에 맞서 소작인이나 자작농의 이익을 옹호하려 했던 미국 민중당(People's Party)의 운동에서 유래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1970~80년대 노동자, 농민, 학생-지식인 운동을 연상시키는 이런 기층 민중의 저항 운동이 바로 포퓰리즘으로 불렸다. 특히 미국의 '포퓰리스트'들은 포퓰리즘을 자랑스러운 명칭으로 생각했다. 진태원 박사는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포퓰리즘을 '대중영합주의'나 '대중추수주의' 따위로 표현하는 것을 "피상적이고 천박한 태도"라고 지적한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

그렇다면,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진태원 박사는 "포퓰리즘은 배척하거나 제거해야 할 부정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대중의 정치에 대한 참여 의지의 표현" 즉 "민주주의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 가운데 하나"라고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세련된 전문가(정치인)들이 관리하는 영역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비전문가(대중)들의 주기적인 개입(선거)을 허용할 수밖에 없으며, 또 바로 거기에서 정당성의 근거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 체계가 불가피하게 비전문가의 개입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소요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자체야말로 "포퓰리즘의 뿌리"라는 것이다.

이런 진태원 박사의 견해를 염두에 두면 2000년대 들어서 한국 정치를 규정하는 포퓰리즘을 우리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단 지금도 인터넷 공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노무현 대통령과 이른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한 '親노'에 대한 일부 지지자의 열정적인 반응 또 대구-경북(TK)의 노동자, 농민이나 서울의 폐지 줍는 60대 독거노인이 박근혜 대통령을 '묻지마' 지지하는 현상, 이 모두가 포퓰리즘의 한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근원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그 진실이야 어떻든 간에) 해냈다고 대중이 상상하는 무엇인가를 현재의 정당(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 또 정치인이 제대로 못하는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즉, 박정희를 또 노무현을 넘어서는 대중의 '열망'을 담은 비전을 누구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진태원 박사는 "오늘날 포퓰리즘 운동 이외에 실제로 정치적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힘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며 "오늘날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정치적인 것의 조건"이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중의 해방에 대한 열망을 포착하고, 그것을 결집시킬 새로운 포퓰리즘일지 모른다.

그러니 박원순 시장이나 이재명 시장은 '포퓰리스트'로 규정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서울이나 성남에서 어쩌면 새로운 포퓰리즘이 싹 트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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