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 회장의 "패기"가 우스운 까닭

[기자의 눈] 노태우 집안, 곧 재벌가 된다?

혼외자 출산을 공개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부인과 이혼할까. 그럼 어떻게 될까. 여기저기 물어봤다. 과거 삼성에서 조사 업무를 담당했고, 퇴직 이후엔 갤러리를 운영하며 롯데그룹 회장실 등에 미술품을 공급했던 심정택 씨(<삼성의 몰락> 저자)의 대답이 특히 흥미로웠다.

정치권력과 재벌의 혼인동맹, 끝에는?


"정치권력이 산업권력이 돼 간다. 한국 자본주의 퇴행과 맞물려 있다."

일단 심 씨는 최 회장의 부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이혼에 반대한다"고 말한 걸 믿지 않는다. 가정을 깬 책임이 최 회장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발언이라는 해석이다. 그래서 그는 최 회장 부부가 실제로는 이혼을 필연으로 받아들인다는 걸 전제로 이야기했다.


최 회장 부부의 이혼은 SK그룹 지배구조를 뒤흔드는 사건이다. 불륜 발표 이후, SK계열사 주가가 떨어진 것도 그래서다. SK그룹의 간판 기업인 SK텔레콤 인수, 새로운 주력 사업으로 키우고 있는 하이닉스 인수가 모두 최 회장과 노 관장의 결혼 이후에 이뤄졌다. 따라서 이혼하면, 이들 재산을 분할해야 한다.

최 회장의 재산 가운데 공개된 건 SK그룹 주식 4조2000억 원어치다. 개인 소유 부동산 및 다른 금융 자산 등이 있을 수 있으므로, 실제 재산은 그보다 많을 게다. 이혼 과정에서 이걸 어떻게 나눌지를 정하는 핵심 변수는, 배우자가 재산 형성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다.

최 회장 부부의 이혼 소송은 이 대목에서 여느 재벌가와 다르다. 노 관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이다. SK그룹은 노 전 대통령의 도움으로 성장했다.

최 회장과 노 관장은 노태우 정부 출범 첫 해인 지난 1988년 결혼했다. 청와대 영빈관에서 결혼식이 치러졌다. 그러나 SK그룹과 노 전 대통령의 유착은, 훨씬 전부터다.

1980년 재계 1위 기업이었던 대한석유공사(유공, 현 SK이노베이션)를 선경그룹(현 SK그룹)이 인수했다. 삼성그룹 역시 유공에 눈독을 들였는데, 매출 순위가 한참 떨어지는 선경그룹이 인수한 배경을 놓고 말이 많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산업자원부가 역대 장관들의 글을 모아 펴낸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 답이 있다. 최동규 전 동력자원부 장관은 이 책에 수록한 "정유 산업의 민영화"라는 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했다.

"그때 유공을 선경에 넘기게 한 사람은 보안사령관이었던 노태우야. 나도 몰랐어."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인수 역시 노 전 대통령의 영향력과 관계가 있다. 따라서 노 관장이 이혼 과정에서 상당한 지분을 요구할 수 있다. 최 회장이 처가 덕으로 재산을 불렸다고 주장할 수 있다.

삼성, 현대 등 다른 재벌들이 형제간 분쟁으로 분할됐다면, SK그룹은 부부간 분쟁으로 쪼개질 수 있다. 이 경우, 노 관장은 중견 재벌 총수가 된다.

"정치권력이 산업권력이 돼 간다"라는 심 씨의 설명은 이런 맥락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 집안이 '군인→정치인→재벌' 경로를 따라간다는 것. 군인보다는 정치인이, 그보다는 재벌 총수가 더 오래가는 권력이다. 정치권력이 산업권력으로 진화하는 현상은, 과거 남미 독재 국가에서 종종 나타났다. 이런 일이 21세기 한국에서 진행 중이다. 따라서 "한국 자본주의 퇴행"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한국에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중앙일보, JTBC 등을 거느린 홍석현 중앙미디어네트워크 회장 집안은 정치권력이 산업권력을 거쳐, 언론권력으로 진화한 경우다. 정치권력이 재벌과 혼인 동맹을 맺고, 이후 자기 몫을 챙겼다.


홍 회장의 부친 홍진기 씨는 이승만 정부 당시 권력 실세였다. 1960년 내무부 장관 재직 중 4·19 혁명을 맞았다. 이후 3·15 부정선거 및 4·19 발포 명령의 책임자로 체포됐다. 1961년 12월 혁명재판소 상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63년 8월 석방됐다.


4년 뒤인 1967년, 홍 전 장관의 딸 홍라희 씨가 이병철 삼성 창업자의 삼남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결혼했다. 삼성 가문과 사돈을 맺은 뒤, 홍진기 집안은 삼성 경영에 참여했다. 이후 중앙일보 등 언론기업이 삼성그룹에서 갈라져 나와 홍진기 집안의 몫이 됐다.

노태우 집안이 홍진기 집안의 길을 따른다면, 즉 정치권력이 재벌과 혼사를 통해 산업권력으로 거듭난다면, '한국 자본주의 퇴행' 사례가 추가되는 셈이다.

SK그룹 공식 출판물에 담긴 정경유착 역사

다만, 한국 사회에 한 가지 성과는 남긴다. 노소영 관장이 최태원 회장과 이혼한다면, 재산 분할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게다. 노태우 집안이 SK그룹의 성장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에 대해 말이다. 이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정경유착의 단면이 드러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아울러 이미 공개된 사실이 더 널리 알려지는 계기도 될 수 있다. SK그룹이 펴낸 출판물 <공격경영으로 정면승부하라 - SK 창업자 담연 최종건 평전>, <SK 60년사> 등에는 정경유착으로 성장한 역사가 잘 정리돼 있다. 다만 SK그룹의 노련한 홍보 덕분에 도드라져 보이지 않았을 따름이다. 공개된 출판물 속 정경유착 관련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SK그룹의 모태였던 선경직물은 일본 기업들인 '선만주단'과 '경도직물'이 합작해 설립한 회사였다. 창업자 최종건은 일제 강점기 선경직물의 기술자였다. <공격경영으로 정면승부하라>에 따르면, 해방 직후 청년 최종건은 선경치안대를 조직해 선경직물의 일본인 간부들이 무사히 일본에 돌아가도록 도왔다. 이를 계기로 리더십을 인정받아 공장을 장악했고, 한국 정부는 1953년 최종건을 선경직물 대표로 공식 인정했다. 친일파와 정치권력이 유착한, 적산 불하 유형이다. 요컨대 SK그룹은 출발부터 정경유착이었다.

이불 안감을 만드는 작은 회사였던 선경직물이 대기업으로 도약한 계기는, 5.16 쿠데타였다. 최종건은 중앙정보부 간부 및 공화당 국회의원 등을 지냈던 이병희 씨와 친분이 깊었다. 이병희 씨는 김종필 전 총리를 통해 5.16 쿠데타에 가담했다. 쿠데타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선경직물을 방문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당시 선경직물은 자금난에 허덕이는 상태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방문했다는 소문이 나자, 너도나도 최종건에게 돈을 빌려주겠다고 나섰다.

최종건은 훗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사돈을 맺었다. 최종건의 넷째 딸이 이후락의 넷째 아들과 결혼했다. 1973년 박정희 정부가 매각한 워커힐 호텔을 선경그룹이 헐값에 인수했다. 그 역시 이후락과 최종건의 유착 때문이다. 당시 한진그룹이 인수하기로 돼 있었는데, 이후락-박정희 라인이 이를 뒤엎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선경그룹이 인수 의사가 있다고 보고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선경에 (워커힐 호텔을) 매각하라"고 지시했다. <SK 60년사>에 담긴 내용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었다. 박정희 정권 실세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했던 선경그룹은 위기를 맞았을까. 아니었다. 같은 해 12월 12일, 역시 쿠데타를 통해 '하나회' 소속 군인들이 군권을 장악했다. 선경그룹은 핵심 멤버였던 노태우에게 선을 댔다. 그 결과, 이듬해 유공 인수에 성공하며 새로운 도약을 했다. 당시 유공은 단일기업으론 공기업, 사기업 통틀어 1위 규모였다. 선경그룹의 세 배에 가까운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었다. 새우가 고래를 삼킨 격이다.

유양수 전 동력자원부 장관은 "공직과 소신"이라는 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1980년 6월 중순 모처로부터 유공 민영화 검토 제의를 받았으나 당시 유공의 지분 50%를 소유한 걸프사 지분을 정부가 전량 인수, 국유화하는 것이 최우선책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이후 1980년 7월 하순 선경의 C회장(최종현, 최종건의 동생으로 선경그룹 2대 회장이다)이 장관실로 직접 찾아와 단도직입적으로 유공을 자기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그로 인해 유공 민영화를 독촉하던 고위층의 뒤에 C회장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서 소개한 최동규 전 동력자원부 장관의 회고에 따르면, "유공 민영화를 독촉하던 고위층"은 노태우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셈이다. 당시 유공 민영화에 반대했던 관료들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전두환 정부가 끝나고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자 최종현 당시 선경그룹 회장은 현직 대통령과 사돈을 맺었다. 그리고 지금, SK그룹(옛 선경그룹)은 재계 서열 3위로 성장했다.

이 같은 역사는, 선경그룹이 그간 광고를 통해 강조한 '도전과 패기'의 기업 문화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걸 보여준다. 권력에 도전하는 패기는커녕 굴종으로 떡고물을 챙긴 역사다.


▲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4일 신년하례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장학퀴즈> 광고, 이젠 속을 사람 없다

이런 역사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탓에, 광고에 속는 이들도 많았다. 선경그룹은 1973년부터 1996년까지 MBC <장학퀴즈> 방송에 맞춰 그룹 이미지 광고를 내보냈다. 이 광고에서 선경그룹은 '패기'를 강조하는 기업으로 묘사됐다.


그래서인지, 불륜 공개 일주일 만에 공개석상에 나타난 최태원 회장도 '패기'를 화두로 꺼냈다. 4일 열린 그룹 신년하례회에 참석한 그는 "올해 국내외 경영환경이 상당히 불투명할 것으로 예상돼 우려가 크긴 하지만 SK는 '패기'를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국가경제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스꽝스럽다. 한번 뱉어낸 이혼 이야기는, 주워 담을 수 없다. 최 회장이 원하건 그렇지 않건, 이혼 및 재산 분할을 둘러싼 설왕설래는 이어질 게다. 그때마다 노태우 집안과 선경그룹의 유착이 화제가 된다. 그보다 이전의 정경유착 역사 역시 덮어둘 수 없다.

몰랐을 땐 속았지만, 알고 나면 비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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