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은 '박근혜 발언' 지지했을 것입니다

[주간 프레시안 뷰] 원칙과 철학이 있는 야당을 보고 싶습니다

"진실된 사람만 뽑아달라"

박근혜 대통령이 '진실된 사람'만 뽑아달라고 했습니다. 야당은 곧바로 반발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이야기를 꺼내면서 자중하라고 했습니다. 대통령이 선거에서 누군가를 지지하는 말을 하면 탄핵감이니 말조심하라는 것입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방송기자클럽 초청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이 뭘 잘해서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고 발언했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공직선거법 9조'를 위반했다고 판단했고, 대통령에게 중립의무 준수를 요청했습니다.

보통 이쯤되면 대통령이 유감을 표시하고 한 발 물러나는 것이 상례입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선관위의 결정에 납득할 수 없다고 밝히고 앞으로도 계속 특정정당을 공개지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라, 제도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튿날 새천년민주당은 재발 방지를 약속하지 않으면 탄핵 안을 발의하겠다고 선언하고,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에 탄핵안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청와대는 부당한 정치적, 정략적 압력이라며 사과를 거부했습니다.

그로부터 사흘 뒤, 한나라당 의원 108명, 새천년민주당 의원 51명이 서명한 대통령 탄핵소추 안이 발의되었고, 국회는 탄핵소추 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후에 탄핵은 헌재 판결로 돌이켜졌지만, 공직선거법 9조 위반은 여전히 인정되었습니다.

"대통령도 정치적 기본권 있다"

2007년 6월 21일 노무현 대통령은 '선관위의 선거법 준수 요청 조치로 정치적 표현의 자유 등이 침해됐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습니다. 공권력을 동원해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물론 안 되겠지만, 발언을 통해서 누군가를 지지하는 것은 허용하자는 의미였습니다.

이것은 눈가리고 아웅하면서 정치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을 그만두고, 이참에 여당 당적을 가진 대통령이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실로 용기있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헌법소원을 낸 것 자체가 부정적으로 인식되었고, 헌법재판소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노 대통령 본인도 통과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이런 비현실적인 법은 고쳐져야 하고, 누군가는 그 첫발을 내디뎌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두드리다 보면, 마침내 정치적 자유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법안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대통령이 그렇게 발언할 수 있다면, 하위직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부당한 법 조항들, 예를 들어 정치적 발언의 금지, 정당 가입 금지, 후원금 납부 금지, 정치적 결사 등 노동 3권의 제한 등도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정말로 노무현 대통령을 사랑한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저렇게 대응해서는 안 되었을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금 살아계셨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적인 자유권에 속한다. 나에 대한 탄핵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도 알 것이다. 공직선거법을 개정하자.

단, 우려될만한 부분이 없지 않으니, 개인적인 정치적 발언이 공권력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점도 더욱 명확하게 하자. 국정원이나 기무사와 같은 권력기관의 부당한 선거 개입에 대해서는 그 기준과 처벌을 더 엄격하게 하는 개정안을 함께 처리하자. 용기 있는 발언을 한 박근혜 대통령이 고맙다."

▲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프레시안


노무현은 되지만 박근혜는 안 된다

노무현은 믿을 수 있지만, 박근혜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은 정치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정치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고, 상호 신뢰와 존중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합니다.

나는 옳고 정의로우니 반드시 당선되어야 하고, 상대방은 어떤 식으로든 당선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게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정치는 일순간도 쉴 수 없는 영원한 투쟁의 장이 되고, 국민들 간의 갈등은 합리성이 아니라 오로지 싸움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지금 교과서 국정화 정국에서 야당이 빠진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선이고 상대는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세상에는, 그리고 정치에는 더욱 분명히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입장에서서 하는 운동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정치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자신들이 소수파일 때는 말입니다.

'원칙 없이 반대만 하는 야당'은 맞는 말

야당이 반대만 한다고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틀렸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국정감사에서 국회안정행정위원회는 정종섭 행자부 장관의 건배사 문제로 내내 시끄러웠습니다. 선거를 주관하는 장관이 새누리당 연찬회에서 건배사로 "총선 필승"을 외쳤습니다.

선거중립 위반이라는 야당 의원들의 공세에,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은 "의원들의 강력한 요청을 받고 건배사를 한 것이고, 다른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 새누리당 의원 연찬회에서 건배사를 한 것이라서 문제될 소지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이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이 여당이고, 행자부 장관이 와서 같은 말을 했다면, "건배사 한 마디 한 것과 선거관리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새누리당은 말도 안되는 정치공세를 그만하라"며 장관을 감싸 안았을 것이라는 점도 확신합니다.

정종섭 장관은 물론 문제가 있습니다. 고향인 경주 출마를 강력히 부인하면서도 28억 원이나 되는, 다른 지역 평균의 3배가 넘는 특별교부금을 내려주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엊그제 총선 출마를 시사하며 갑자기 장관직 사퇴를 발표했습니다.

이런 관행은 잘못된 것입니다. 야당은 정 장관을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마땅히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야당의 지지율이 올라갈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여기서 바로 야당이 착각하는 지점입니다. 국민들은 야당이 여당되어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당을 욕하면서도 야당을 지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에서는 정 장관과 같은 일이 전혀 없었습니까?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인가요? 청와대 측근들과 장관들은 출마하지 않을 것인가요? 공천을 앞두고 출마예정지에 혜택을 준 공천신청자들을 철저히 골라낼 것인가요? 그것을 지금 선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당에 대한 비판이 자신의 표로 이어지려면 대안이 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야당은 자신들이 과거에 했던 일, 그리고 앞으로도 또 할 일들을 가지고 청와대와 여당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알고 있는데 본인들만 철면피처럼 같은 비판을 합니다. 누가 공감하겠습니까?

친일과 독재가 아닌 국정교과서는 괜찮은가?

교과서 국정화를 다루는 야당의 태도에도 원칙과 철학이 없습니다. '다원성을 부정하는 국정교과서 반대'와 '친일 독재 교과서 반대'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야당이 친일과 독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에서 정답을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여당에게 '아직 교과서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그런 명분으로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다'는 말을 듣습니다.

논리적으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야당이 친일과 독재를 미화했다고 생각하는 교과서도 출간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당이 종북 교과서라고 간주하는 교과서가 출간될 수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사 청산이 미흡한 현실, 분단이라는 정치적 한계, 교과서라는 특수성을 감한해, 당분간은 검인정 체제를 통해서 해석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또한 원칙적으로는 교과서를 자유 발행하는 것이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국가가 취해야 할 자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리 말해도, 새정치민주연합의 많은 의원들은 박근혜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같은 선상에 놓는 것만으로 불쾌해 할 것입니다. 친일 독재 교과서라고 해서 전선을 펼쳐야 유리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정치의 미래가 어두운 까닭입니다.

원칙과 철학이 있는 정당이 필요합니다

막말정치를 그만두지 않으면 야당이 어려워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항변도 들려옵니다. 스스로 아젠다를 만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국정을 운영하는 집권여당이 아니고 언론환경도 나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야당은 원래 반대를 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반대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성이 없는 반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과 정종섭 장관의 건배사에 야당이 원칙있게 대응하는 것, 그것이 야당이 대안세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길입니다.

'저쪽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원칙과 철학이 있는 정당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면, 국민이 싫어할까요? 싸울 줄 모르는 정당이라고 할까요?

야당 스스로는 새누리당과 다르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치하는 방식, 말하는 방식,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 기득권에 연연하는 것을 보면, 두 정당은 별로 차이점이 없습니다. 이쪽에서 보면 새정치가 옳고, 저쪽에서 보면 새누리가 옳은 것 뿐입니다.

이념과 노선은 보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민주화 이후 유권자 분포에서 진보/보수는 거의 5:5:로 비슷했습니다. 이런 선거 지형에서는 신뢰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원칙과 철학이 있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정당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공천 싸움, 계파 싸움에만 몰두하는 정당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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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후

16대, 17대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하고,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적 대표'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와 경남연구원에서 일하고,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 국무총리 메시지비서관을 지냈다. 정치의 이론과 현실에 모두 관심이 있다.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로 있으며, <프레시안>을 비롯해 <경향신문>, <한겨레>, <피렌체의 식탁>에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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