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 망상'에서 깨어 <이기적 유전자>를 버려라!

[프레시안 books] <급진 과학으로 본 유전자 세포 뇌>

가끔씩 과학 책 베스트셀러를 확인할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수없이 쏟아지는 신간 가운데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펴냄)가 늘 수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6년에 나온 구닥다리 책이 여전히 과학 필독서로 꼽히다니! 대학을 비롯한 온갖 곳에서 생산한 무책임하고 고리타분한 고전 목록이 낳은 심각한 병폐다.

물론 과학 책도 고전이 있을 수 있다. 1859년에 나온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계속 읽혀야 할 책이고, 1980년에 나온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사이언스북스 펴냄) 역시 지금 읽어도 감동적이다.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가 과연 <종의 기원>이나 <코스모스>만큼의 대접을 받아야 할 과학 책인가? 나의 답변은 부정적이다.

힐러리 로즈와 스티븐 로즈 부부의 <급진 과학으로 본 유전자 세포 뇌>(김명진·김동광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더욱더 굳었다. 사실 이 책은 로즈 부부의 이름값만으로도 손에 들 가치가 충분하다. 저명한 원로 과학자(스티븐), 사회학자(힐러리)인 로즈 부부는 1960년대 말부터 영국에서 태동한 이른바 '급진 과학 운동'의 선구자다.

핵폭탄의 등장으로 끝난 양차 세계 대전, 산업화가 야기한 심각한 환경오염, 과학의 이름으로 자행된 대량 학살 등을 지켜보면서 1960년대 후반부터 과학자를 포함한 일군의 지식인은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의 역할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시작했다. 이 때 등장한 새로운 흐름이 바로 급진 과학 운동이다.

로즈 부부는 1969년 <과학과 사회(Science and Society)>를 펴내며 바로 이 급진 과학 운동의 시작을 알린 이들이다. <급진 과학으로 본 유전자 세포 뇌>는 바로 이들이 80 평생을 정리하면서 현대 생물학의 성과와 한계 그리고 전망을 담은 책이다. 그런데 바로 이 책에서 로즈 부부가 명시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바로 도킨스로 대표되는 온갖 '생물학적 환원주의'다.

'이기적 유전자'는 없다

▲ <급진 과학으로 본 유전자 세포 뇌>(힐러리 로즈·스티븐 로즈 지음, 김명진·김동광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이기적 유전자'는 무수한 아류를 낳으며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전자 중심주의'라는 새로운 문화 현상을 만들어냈다. 한 동안 암을 비롯한 온갖 난치성 질환의 이름이 붙은 '○○○ 유전자'의 발견이 주목을 받았고, 나중에는 '비만 유전자' '폭력 유전자' '바람둥이 유전자' 등 인간사의 모든 것을 유전자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호들갑이 계속됐다.

2003년 마무리된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는 이런 기대감이 낳은 과학 사업이었다. 하지만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가 끝난 지 10년이 더 된 지금, 정작 생명의 비밀을 파헤치는 과학자의 태도는 훨씬 더 신중해졌다. '이기적 유전자'와 그것이 초래한 온갖 아류는 애초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는 단백질 합성의 암호를 담고 있는 인간의 유전자가 고작 약 2만 개에 불과해 초파리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인간 세포를 구성하는 10만 가지의 서로 다른 단백질에 1대 1로 대응하는 유전자는 애초 없었다. 더구나 유전체의 98퍼센트 이상은 단백질 합성의 암호도 없다. '쓰레기 DNA'로 폄하되었던 이 부분은 도대체 어떤 역할을 수행할까?

'하나의 유전자'가 아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유전 정보가 발달 과정에서 꿰맞춰져 독특한 구조와 기능을 갖는 단백질을 만든다. 지금 과학자는 이렇게 단백질을 만드는 과정에서 특정한 유전 정보를 켜고 끄는 다른 요소에 주목하고 있다. 바로 유전자 중심주의가 득세하면서 잠시 잊혔던 '환경'의 중요성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로즈 부부에 따르면, DNA를 "세포를 통제하는 '정보 거대 분자'"로 여겼던 "유전자의 세기"는 "오래 전에 그 유통기한이 지났다." 생명 현상을 이해하고자 생활사 전체에 초점을 맞췄던 다윈의 오랜 전통이 부활한 것이다. 로즈 부부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의 원제를 패러디해 도킨스의 'DNA 망상'으로부터 이제는 벗어나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이다.

뇌 과학이 마음의 비밀을 캘 수 있을까?

로즈 부부의 생물학적 환원주의 비판은 최근 들어 각광을 받고 있는 신경 과학(뇌 과학)으로도 이어진다. 수많은 쟁점을 논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기능성 자기 공명 영상(fMRI)을 이용한 연구에 대한 논평만 살펴보자. 상당수 과학자는 fMRI를 이용한 뇌 사진을 통해서 마음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으리라고 가정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를 찍어보니 등.)

로즈 부부는 이런 연구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에 대한 성찰을 촉구한다. fMRI는 뇌의 특정 부분에서 산소가 풍부한 혈류를 측정한다. fMRI가 주목하는 영역은 직경 0.5밀리미터 정도에서 약 2초 동안 일어나는 활동의 평균값이다. 그런데 이 정도 영역에는 약 550만(!) 개의 뉴런이 1000분의 1초의 시간 척도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2초는 얼마나 긴 시간인가!

이뿐만이 아니다. 뇌 과학은 사람이 가지는 경험의 복잡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뇌 과학자는 이렇게 연구한다. '원조 식량을 나눠줄 때 공평하게 나눠줄지(평등) 아니면 소수에게 충분한 식량을 나눠줄지(효율) 선택하라!' 과학자는 이렇게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의 뇌 사진을 fMRI로 찍어서 뇌의 어떤 영역이 관여했는지 살핀다. (이 연구는 <사이언스>에 실렸다!)

로즈 부부는 이렇게 묻는다.

"(복잡한 현실에서 원조 식량을 나눠주는) 자원봉사자들이 이런 식의 단순한 양자택일의 상황에 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 fMRI 장치의 조금 시끄럽지만 따뜻한 터널 속에서 혼자 안전하게 누워서 이런 선택을 하도록 요구받는 것은 폭력으로 멍들고 상처받은 나라의 지독한 기아 환경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이 처한 상황에 견주어볼 때 지나치게 추상적인 것이다." (338쪽)

"누가 통제하고 누가 이익을 보는가?"

제목(유전자 세포 뇌)처럼 현대 생명과학의 거의 모든 부분을 다루는 로즈 부부의 이 책은 20세기 후반 생명과학의 역사를 한 눈에 조망하는 (자전적 경험이 녹아들어간) 훌륭한 역사책이다. 또 후성유전학, 재생의학, 신경과학 심지어 '바이오뱅크'로 상징되는 생물 정보 산업이나 '바이오 신약'으로 대표되는 제약 산업의 현황까지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이슈 리포트이다.

반골 지식인이면서도 학계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로즈 부부의 독특한 이력 탓에 생명과학계의 온갖 뒷담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도킨스도 그 주인공 가운데 하나다.) 진화 심리학이나 도킨스류의 유전자 중심주의에 질린 독자라면, 특히 현대 생명과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고 싶은 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영국 사회학자 니콜라스 로즈(스티븐 로즈의 친동생!), 독일 철학자 한병철 등의 영향을 받아서 한국에서도 21세기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인간형에 대한 관심이 높다. 로즈 부부는 현대 생명과학과 자본주의 주체 형성의 불가분의 관계를 이 책 곳곳에서 성찰해 두었다. 평소 과학이라면 질색인 독자들이 이 책을 손에 들어야 하는 이유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 당장 각종 추천 도서 목록에서 <이기적 유전자> 대신에 <급진 과학으로 본 유전자 세포 뇌>를 넣자. 현대 생명과학을 "누가 통제하고" 또 그것을 통해서 "누가 이익을 보는지" 묻고 "과학의 민주적 책무"를 강조하는 로즈 부부 같은 이들의 책이 외면당하는 사회에 미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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