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커피 한 잔' 대신 '시 한 편'!

[김형찬의 동네 한의학] 커피 한 잔의 여유와 시 한 편의 여유

"가슴이 쿵쾅거리고 머리가 아파서 너무 힘든데 혈압 한 번만 재주세요."

환자가 막 걸어온 참이라 물 한 잔 마시고 잠시 앉아 있게 하면서 자초지종을 들으니, 좋은 날씨에 친구들과 점심 먹고 기분이 좋아져 분위기 있게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고 합니다. 평소 커피를 마시면 가슴도 뛰고 잠도 잘 못 자는 편이라 조심했는데, 가을 하늘과 친구들의 유혹을 견디지 못했다고요. 한참 후에 혈압을 재어 보니 정상 범위를 훌쩍 넘어섭니다. 그래서 심장을 편하게 하고 위로 치밀어 오른 기운을 아래로 내려주는 치료를 해드리면서, 다음에는 커피 대신 허브 티나 홍차를 드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차 한 잔 할래?"라는 말은 "커피 한 잔 할까?"라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거리에는 수많은 커피 전문점이 생겨났고, 생소한 이름의 커피들이 등장했습니다. 광고 속에서는 차가운 계절을 배경으로 잔잔하고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감미로운 미소를 띤 남녀 배우들이 커피 한 잔을 마시라고 손짓하지요. 친구와 연인을 만나거나 왠지 무료하고 지칠 때,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을 갈 때조차도 사람들은 커피를 챙기고, 들판에서 일하시는 어르신들도 종이컵에 타서 마시는 믹스커피 한 잔을 즐깁니다. 모든 게 빠른 대한민국의 특징을 반영이라도 하듯, 커피는 어느 순간 온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아라비아에서 처음 음료로 발전한 것으로 알려진 커피는 초기에는 약재로 이용될 정도로 귀했습니다. 주로 활기를 주고, 정신을 맑게 하고, 졸음을 없애는 용도로 이용되었는데, 특히 종교적 이유로 술을 마실 수 없는 이슬람교도들의 기분을 풀어주는 위안거리였다고 하지요. 이러던 것이 이슬람 권역을 중심으로 동인도와 서인도를 거쳐 전 세계로 퍼졌다고 합니다. 한의학에서는 간장의 기운 소통을 돕는 효과가 있어서 이담제로 이용되었다는 기록이 있고요.

최근의 커피 전문점은 다양한 문화적, 심리적 코드까지 씌워서 마케팅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커피를 찾게 되는 본질적인 요소는 카페인입니다. 그리고 카페인의 효용은 중추신경계통 활성화(흥분)입니다. 최근에는 커피콩과 관련하여 다양한 건강상의 효용이 발표되어 건강에도 좋은 차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있지만, 과도한 카페인 섭취는 우리 몸에 해가 됩니다.

카페인 섭취가 과하면 신경증과 불안, 불면, 불규칙한 심장박동과 심계항진(두근거림)을 일으킬 수 있고, 피로를 더하고 혈당 조절을 어렵게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불균형은 몸속은 지쳐가도 지금 당장 우리를 긴장하고 깨어 있게 만드는 데서 발생합니다. 남은 에너지를 소진한다 하더라도 달리지 않으면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에 빠진 현대인에게 커피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게다가 잘 포장된 '여유와 낭만'이라는 근사한 이유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말하는 저 자신도 커피 중독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차를 즐겨 마시고 몸 상태에 따라 약차를 만들어 마시기는 하지만, 하루 한 잔 정도는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광고에 등장하는 '커피 한 잔의 여유'라는 말이 조금 거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말을 '열심히 일한 당신은 떠날 수 있다. 그리고 돌아와서 열심히 일해라. 그래야 또 떠날 수 있을 테니까'라고 들었습니다(아마도 제 안의 삐딱함 탓이겠지요). 그런 생각이 들면서 커피 한 잔의 여유라는 말도 바쁘게 일하다가 지치면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잠깐 쉬고, 다시 열심히 일하라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인프라는 이러한 생활을 가능하게 해 줄 테고요. 하지만 이러한 생활이 반복되면 결국에는 몸도 마음도 지치게 되고, 그때는 아무리 진하고 좋은 커피도 소용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올가을 먼지가 쌓인 시집을 다시 펴고 읽으면서 '커피 한 잔의 여유'로 대표되는 세상의 반대쪽에는 '시 한 편의 여유'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의 마음이 쌓이고 쌓여 더는 담아둘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비로소 정제된 언어로 튀어나온 좋은 시는 삶을 돌아보게 하고, 마음에 울림을 주지요. 시 한 구절에 가슴이 따뜻해지고 눈물이 나기도 하는데, 이러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몸도 마음도 한결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시 한 편이 있는 삶은 정신없이 휩쓸리지 않고, 세상의 흐름에서 잠시 벗어나 '과연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시에는 나를 속이면서까지 달리게 하는 대신, 한걸음 떨어져서 나를 솔직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눈을 맑게 하는 효능이 있습니다. 물론 시 한 편을 감동적으로 읽었다고 해서 이전까지와 전혀 다른 삶을 선택하는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하지만 정신없이 돌아가는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출 수는 있겠지요.

'커피 한 잔의 여유'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반대쪽에 있는 '시 한 편의 여유'도 즐길 줄 아는 삶이 조금 더 건강할 것입니다. 올가을에 만난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이 가을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보내시길 빕니다.

멀리서 빈다


나태주

어딘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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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찬

생각과 삶이 바뀌면 건강도 변화한다는 신념으로 진료실을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텃밭 속에 숨은 약초>, <내 몸과 친해지는 생활 한의학>, <50 60 70 한의학> 등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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