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전후 70주년 담화 "중국인 고통" 특별히 강조

중국-한국 '갈라치기' 시도?…中 "진정성 없다" 혹평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발표한 담화에서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일본이 제국주의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일본인·중국인들이 과거 전쟁에서 고통을 겪었다는 점을 언급하는 등 과거 총리들이 발표했던 담화와 다른 양상을 보였다.

14일 각의(국무회의) 결정 후 기자 회견을 통해 전후 70주년 담화를 발표한 아베 총리는 "세계 공황이 발생하고 각국이 식민지 경제 블록화를 추진하자 일본 경제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일본의 고립이 심화되고 외교적·경제적으로 침체되자 힘의 행사를 통해서 이를 해결하고자 시도했다"고 밝혔다.

물론 그는 "나아가야 할 진로를 잘못 선택해서 전쟁으로의 길을 걸었다"면서 당시 일본의 선택에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전후 50주년에 발표된 무라야마(村山) 담화, 전후 60주년에 발표된 고이즈미(小泉) 담화에서 일본이 제국주의의 길을 걷게 된 이유를 별도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과 비교했을 때, 이 대목은 일본의 과거 행태를 정당화하려는 일본 우익의 역사적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가 담화 마지막 부분에 "경제 블록화가 분쟁의 싹을 키운 과거"라는 표현을 쓴 것도 이와 유사한 맥락으로 해석된다. 일본이 당시의 경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제국주의의 길, 전쟁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14일 오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총리 관저에서 전후 70주년 기념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아베 총리는 담화에서 "300여만 명의 동포들이 목숨을 잃었다"며 일본인들의 희생을 언급했다. 그는 "조국의 평온을 기원하고 가족의 행복을 원하면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종전 이후 이국땅에서 기아와 질병에 허덕이면서 목숨을 잃은 분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 도쿄를 비롯한 각 도시에 대한 폭격, 오키나와 지상전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참히 희생됐다"고 밝혔다. 이 역시 이전 두 번의 담화에서 일본 국민보다는 점령지 국민들의 희생과 그들에 대한 사죄를 강조했던 것과 온도차가 있는 대목이다.

중국에 화해 손짓 내미는 아베?

이번 담화에서 아베 총리는 중국인의 피해를 별도로 언급했다. 그는 "전쟁의 고통을 당했던 모든 중국인과 일본군에 의해 극심한 고통을 받은 모든 포로들이 그토록 관용을 보이기까지 얼마나 마음의 갈등을 겪었으며 어떤 노력을 했을지, 우리는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반면 한국인의 피해와 관련해 아베 총리는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 대만(타이완), 한국, 중국 등 이웃한 아시아 사람들이 걸어온 고난의 역사를 가슴에 새기고 전후 일관되게 평화와 번영을 위해 힘써 왔다"는 언급에 그쳤다.

아베 총리가 전쟁 포로 문제를 꺼내며 유독 중국을 언급한 것을 두고, 과거사 문제에서 한국과 중국을 분리시키려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실제 지난 7월 24일(현지 시각) 일본의 대기업 미쓰비시(三菱) 머티리얼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강제 노역을 당했던 중국 노동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금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법적인 상황이 다르다"며 사과나 보상금 제공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한 바 있다.

한동대학교 김준형 교수는 "일본 정부가 과거사 문제에 있어, 한국을 더 이상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지난 4월 미-일 간 새로운 안보 가이드 라인을 제정하면서 미국과 확실한 동맹을 구축한 일본 입장에서는, 어차피 한-미-일 안보 동맹으로 끌려 들어올 한국에 대해서는 과거사 문제를 별도로 챙길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다만 김 교수는 "그렇다고 아베 총리의 이번 언급이 과거사 문제에 있어 중국이 만족할 만한 수준의 답을 얻은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과거사 문제에 있어 항의를 받지 않을 정도의 발언이라고 본다. 또 중국과 한국을 제외한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을 향해 우리가(일본이) 이 정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메시지"라고 분석했다.

아베, 위안부 문제 암시한 까닭은?

이번 담화에서 아베 총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 그는 "20세기 전쟁 하의 많은 여성들의 존엄과 명예가 깊은 상처를 입은 과거를 계속 가슴에 새기겠다"며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항상 받아 안는 국가이고 싶다. 21세기야말로 여성의 인권이 손상되지 않는 세기가 될 수 있도록 세계를 선도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이전 무라야마, 고이즈미 담화 때는 별도로 언급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이를 두고 아베 총리가 한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정상 회담을 실현시키기 위해 자신의 지지 기반인 보수층의 반발을 사지 않는 수준에서 일종의 '접점'을 찾은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위안부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에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신호를 줬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이 발언이 위안부 문제에서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아베 총리의 기본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앞서 아베 총리는 지난 3월 27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의 희생자"라고 표현했다.

▲ 지난 4월 29일 제1176차 수요 시위에 나선 김복동(왼쪽) 피해자와 길원옥(오른쪽) 피해자. ⓒAP=연합뉴스

인신매매라는 표현은 언뜻 보면 '강제성'을 강조한 것으로 읽힌다. 하지만 이는 인신매매의 주체를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국가가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인식이기도 하다. 실제 아베 총리는 위안부를 동원한 주체가 국가가 아니라 소위 '포주'로 불리는 민간 업자들이라는 주장을 펼쳐왔다.

이번 발언 역시 위안부 동원의 주체가 명시돼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과 침략임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20세기 전쟁'을 통칭하는 화법을 구사했다. 이를 두고 한국여성인권진흥원 한혜인 박사는 "위안부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결국 국가의 책임을 빼려는 의도"라고 평가했다.

아베 담화 '진정성 없다'는 중국…우리는?

한편, 중국은 관영 매체 <신화통신>을 통해 아베 총리의 담화를 비판하고 나섰다. <신화통신>은 "아베의 '희석된 사과'는 '진정성 시험'에서 불합격했다"고 평가했다. 이어서 <신화통신>은 이날 아베 총리가 역대 내각의 사죄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최대한 희석시켰다"고 지적했다.

반면 한국 정부는 현재까지 입장을 유보하고 있다. "현재 담화를 면밀히 검토 중에 있다"며 "이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나 평가는 조만간 밝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담화 발표와 관련해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 대신이 이날 오늘 오후 7시 15분경 윤병세 외교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이 흔들림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에 대해 윤 장관은 기시다 대신의 설명 내용과 함께 담화 내용을 면밀히 검토하여 우리의 입장을 곧 밝힐 것이라고 전했다"며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행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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