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원장실에 휠체어 한 대 놔 드려야겠어요

[기자의 눈] '제2의 현병철'을 피하는 방법

'현병철보단 낫겠지'. '현병철만 아니면 괜찮아'. 지난달 20일 차기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내정 이후 주위 사람들에게서 무수히 들은 말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새로운 위원장이 전임자와 비교되는 게 뭐 그리 이상한 일일까마는, 그래도 '현병철'이라니.

현 전 위원장이 어떤 위인이었나. 그의 '어록'을 다시금 살펴보자.

"인권위원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2009년 7월 인권위원장 취임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독재라도 할 수 없다" (2009년 12월 28일 전원위원회에서 용산 참사에 대한 의견 제출이 가결되려 하자 퇴장하며)
"우리 사회는 다문화 사회가 되었어요. '깜둥이'도 같이 살고…" (2010년 7월 사법 연수생 간담회에서)
"우리나라에 아직도 여성 차별이 존재하느냐?" (취임 직후 업무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래야 돼요?" (2011년 7월 기자 간담회 도중 "인권은 법과 별개로 다루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질문에 반문하며)
"불법 농성장이기 때문에 인권을 논할 가치가 없다" (두리반 전력 공급 긴급 구제 요청을 기각하며)

▲ 현병철 전 국가인권위원장. ⓒ연합뉴스

곱씹을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현 전 위원장 스스로도 인정했듯, 인권을 모른다는 이가 위원장 직함을 달고 있었다. 무려 6년씩이나.

공들여 쌓은 탑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그런데 10년 넘게 공들여 세운 인권위는 한순간도 아닌, 무려 6년씩이나 멈춰 있었다. 스스로 시동을 꺼버렸다. 용산 참사, <피디 수첩> 사건, 쌍용차 사태,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 세월호 참사, 국가정보원 해킹 사건 및 민간인 사찰 의혹 등 현병철 체제 아래서 인권위가 묵인해왔던 일들은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벅찰 정도다.

인권위로선 '잃어버린 6년'이나 다름없었다. 오죽하면 직원들이 위원장 연임을 반대하며 1인 시위를 벌였을까.(☞관련 기사 : 인권위 직원들 십시일반 "현병철 위원장 떠나라" 광고)

그 6년 사이 국민의 인권 의식도 한없이 낮아졌다. 그 증거가 바로 '현병철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발언들이다. '현병철 수준의 저급한 인권 감수성을 가진 이만 아니라면 어떤 이라도 인권위원장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비아냥이다. 10년 넘은 투쟁으로 어렵사리 세워진 인권위는 한갓 비아냥 거리로 전락했다.

이성호 신임 인권위원장은 이런 환경 속에서 취임했다.

목표가 '현병철 뛰어넘기'여선 안 된다. 누군가 또 '현병철보다 낫다'고 말한다면, 우쭐해 하지 않기를 바란다. 현병철을 뛰어넘는 것은 물론이고, 현병철 이전 수준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과제다. 전임자들보다 두 배는 더 일해야 한다는 얘기다.

단순히 업무 시간을 두 배 더 투자하라는 뜻은 아니다. 인권에 대해 두 배로 더 고민하라는 얘기다. 가난으로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이들, 나이로, 성별로, 국적으로, 생김새로, 성적 지향성으로, 신체 조건 등등으로 차별받는 이들, 행정이나 사법부의 폭력, 기업 횡포로 고통받는 이들을 두 배로 더 생각해야 한다. '인권'위원장이니까.

'제2의 현병철'이 되지 않는 방법

"나는 휠체어에 앉아 글을 쓴다. 이유는 한 가지다. 이 의자가 지닌 거부하기 힘든 위력, 때문이다. 이 의자에는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인간이라는 장애를, 인간은 언제나 장애로 가득 찬 존재임을-휠체어는 말없이, 자신의 전부를 통해 나에게 전달해준다. 압니다, 알고 있습니다. 늘 고개를 끄덕이는 기분이 되어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소설가 박민규가 단편 '아침의 문'으로 2010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며 밝힌 소감이다. 박민규의 놀랍도록 탁월한 작가적 상상력의 원동력은 '휠체어'였다. 그 휠체어에 앉아 박민규는 '노인의 마음으로 소년의 글'을 쓰고, 반대로 '소년의 마음으로 노인의 글'을 끄적인다.

박민규의 이야기가 떠오른 건, 참 뜬금없게도 이 위원장의 지난 11일 청문회를 보던 중이었다.

▲ 이성호 현 국가인권위원장. ⓒ연합뉴스

한나절 동안 이어진 청문회에서, 나는 그가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한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다.

성별 정정을 요청한 성전환자에게 사진을 요구한 일에 대해선 피해자 입장을 헤아리고 먼저 사과하기보단 '자신이 직접 내린 명령이 아니'라며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인권 침해 사실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고 했다. 법관 임기를 마치지 않고 굳이 인권위원장을 하려는 이유에 대해선 "국가 기구로서 인권위원회를 운영하는 데에는 현장에서 그런 것만 가지고 안 되는 부분이 있으리라고 본다"며 법원장으로서 다져온 경영 능력과 소통 능력을 토대로 인권위원장 업무를 하겠다고 밝혔다. (☞관련 기사 : 이성호, 성전환자 성기 사진 요구 "피해자에 죄송")

어떤 답에서도 높은 인권 의식과 인권 감수성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서 인권이란 부차적이고 부수적인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굳이 그 이유를 '법관 30년' 경력에서 찾지는 않겠다. 그의 말마따나 어느 직책에 있느냐에 따라 하는 역할이 다르다. 법원이나 인권위나 '인권의 최후의 보루'라 불리지만, 재판장과 인권위원장의 역할이 매우 다르단 건 자명하다.

재판장에게 필요한 자질이 뛰어난 판단력과 냉철한 이성이라면, 인권위원장에게 필요한 자질은 누가 뭐래도 탁월한 인권 의식과 인권 감수성이다. 인권 영역의 지평을 넓히는 진취적 사고와 인권 약자들에 대한 공감 능력이다. 이 위원장이 자신 있다는 경영 능력은 그야말로 부수적인 문제다. 현 전 위원장이 국민에게서 제대로 미운털이 박힌 이유도 그의 경영 능력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니다. 어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턱없이 부족한 인권 감수성 때문이었다.

이 위원장은 취임사를 통해 "법관일 때 법관의 역할에 충실했듯이, 이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우리 사회의 인권 증진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법관 임기 도중 청와대로부터 연락을 받은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짧은 기간 동안 그가 인권 의식과 인권 감수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드리겠다. 박민규의 비법을 따라 해보시라. 휠체어에 올라, 휠체어가 지닌 거부하기 힘든 위력을 느껴보시라. 그 안에서 온갖 장애와 차별을 상상해보시라. 그리하여 소수자와 약자의 고통에 깊이 공감해달라. 그러한 마음가짐, 자세. 국민이 신임 인권위원장에게 바라는 바다.

그런 자세라면, 인권위 옥상 위에서 고공 농성 벌이는 노동자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 성 소수자들을 마주 대하는 게 그리 어렵고 껄끄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업무실에 휠체어를 들여놓는 인권위원장이라니, 생각만 해도 뭉클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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