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정농회(正農會) 총회에서 할머니 한 분이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홍성 홍동에 살고 있는 권정렬이라고 합니다. 나이가 일흔다섯이에요. 우리 아들과 며느리가 시골로 내려가 산다고 했을 때, 정말이지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안 된다고 반대를 했지요. 그래도 내려간대요. 울면서 말렸지요."
이 할머니는 교탁에 가려, 얼굴만 보일 정도로 키가 자그마하다. 그런데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자, 모두가 귀를 열고 집중하기 시작.
"저도 어쩔 수 없이 나중에 뒤따라갔는데, 막상 지내보니 참 좋아요. 농사일도 좀 하고, 손주도 돌봐주고. 그리고 여러 할머니들과 어울려 '장터조합' 일을 해요."
'장터조합'이라! 그 순간 내 귀가 번쩍 뜨인다. 이 이야기는 총회에서 잠깐 듣고서, 스쳐 지나갈 거리가 아니지 않은가. 더 많은 궁금증이 일었다. 그 뒤 정농회가 주관해 '할머니 장터조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마련했다.
농촌 여성 강사 훈련
여기서 잠시 정농회 이야기를 좀 하자. 정농회는 농촌 여성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는 걸 자각하고, 올 초부터 여성 강사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농사는 부부가 같이 짓지만, 실제 대외적인 활동은 거의 남성 위주다. 농장 대표자는 물론이요, 무슨 농업단체 대표니 하는 자리들도 대부분 남성 차지다. 열린 강좌를 지향한다는 귀농학교 강사들조차 대부분 남성이다.
그런데 가만히 따져보자. 여성은 농사는 기본이다. 여기에 농가 살림살이라는 게 얼마나 일이 많은가. 또 내가 아는 상당수 집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직거래 유통망을 꾸리는 일을 거의 여성이 한다. 아무래도 도시 주부들과 공통분모가 많으니, 이게 그냥 자연스럽다 하겠다. 농사, 육아, 살림, 유통…. 이렇게 안 하는 일이 없고, 못 하는 일이 없는 농촌 여성들. 앞뒤가 이렇다면 농촌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좀 더 주체적으로 자각하고, 이를 잘 살려 이 사회에 보탬이 되게 하자는 게 여성 강사 훈련의 취지다.
농사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지난 3월 19일과 20일. 첫날에는 홍성 환경농업교육관에서 여성 농부 몇 사람이 강사 훈련을 했고, 다음날에는 할머니 세 분이 예비 강사로 나섰다. 풀무학교 홍순명 선생 부인인 이승진(1939년생 77세), 권정렬(1942년생 75세) 할머니와 조합 총무인 이재자(1945년생 72세) 할머니. 각각 15분 동안 이야기할 거리를 가지고, 돌아가며 차례로 발표했다. 그 이야기를 간추려본다.
이승진, '할머니 장터조합'이 있기까지
풀무학교는 지역과 학교가 함께하고, 하나가 되는 걸 추구한다. 그동안 성과가 많았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지역 노령화가 계속된다. 노인들이 소일거리도 하면서 지역에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해보자. 그 한 가지 보기로 일본에서는 할머니들이 자발적으로 협동조합을 꾸려 활동하는 곳이 아주 많다. 우리도 한번 만들어보자. 많은 논의 끝에 2012년 6월에 발족을 했다.
조합원 17명으로 시작해 처음에는 농사지은 걸 그대로 팔았지만, 점차 반찬도 만들어 팔았다. 자주 하지는 못하고 한 달에 두 번, '지역센터 마을활력소'라는 공간에서. 그러다가 '밝맑도서관' 앞으로 옮겨서 했는데, 장터를 자주 열지는 못했지만 참여도는 좋았다. '할머니 손맛'이라 소비자들한테서 인기가 괜찮은 편이다.
그러다가 농협에서 운영하는 로컬푸드점이 생기면서 '할머니 장터조합이 함께하면 좋겠다'는 제안이 왔다. 나는 나이도 있고, 참여가 어렵더라. 옆에서 지켜보면서 잘 되길 바란다.
이재자 "배우면서 돈도 번다"
두 명씩 조를 짜, 일주일에 이틀씩 매장을 지킨다. 사실 당번 짜는 게 힘들다. 다들 나이가 있다 보니, 허리가 아파 유모차를 끌고 와야 하는 조합원이 있을 정도다. 조를 잘 짜야 한다. 마음도 서로 덜 삐걱삐걱 하는 사이로. 그리고 음식을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을 한 조로 붙여줘야 한다.
가끔 의견 대립으로 싸우기도 하지만 웬만하면 그날 풀고, 안 되면 그 다음 날에 푼다. 요즘 이야기를 많이 한다. 비폭력 대화에 대해! 정말 대화를 잘해야겠더라.
나는 솔직히 음식을 잘 못한다. 그런데 지금 이 일을 하니까 배우면서 돈도 번다. 그렇다고 자칫 돈 욕심을 내면 안 되겠더라. 맛나게 해서 기쁘게 내놓아야 한다. 돈도 무시할 수 없지만, 우리가 조합을 처음 만들 때처럼 재미나게 하고 또 남을 돕는 기쁨을 느껴야 한다.
장터조합을 하면서 변한 게 많다. 요즘 세상에는 할머니들 주머니에도 늘 돈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조합 활동으로 큰돈은 아니지만, 용돈을 벌어 당당하다. 또한 우리가 벌어 각자 형편이 되는대로 어려운 곳에 조금씩 후원한다. 장애 아이들을 돌보는 '꿈이 자라는 뜰', '밝맑도서관', 지역 학교 후원회, 새로 준비하는 의료생협, 그리고 착한 은행으로 무이자로 맡기고 무이자로 빌려 쓰는 '도토리회' 등. 둘러보면 우리가 도울 곳이 참 많더라.
권정렬 "건강이 이전보다 한결 좋다"
"내려가서 손주들 돌봐줘라."
내려와서 보니 농사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더라고. 농사지을 줄도 모르는 애들이 농사로 먹고산다고? 처음에는 참 막막했다. 우리 아들이 풀무 전공부를 졸업하고, 어떻게 사는가 보자 했더니 장애 아이들을 가르치겠대요. 돈도 제대로 못 벌면서. 한창 벌어도 시원찮은데…. 노파심에 자꾸만 속상했다.
저희들은 한다고 하는데, 내 마음에 하나도 안 들었다. 그런데 몇 해 살아보니까 그런대로 살 만하더라고. 여기 동네 사람들이 대부분 시장을 안 간다. 발에 차이는 게 먹을 거다. 생활비가 많이 안 든다. 도시와 달리, 여기서는 쌓아 놓는 걸 못하지만 잘 먹는다. 조합 여러분을 만난 것도 좋다. 그냥 집에 들어앉으면, 점점 늙어간다. 이제는 집에 거의 있지 않고, 한 주 내내 밖으로 나온다. 장터조합에 모여서 일하면서 웃고 떠들고 하니 좋다.
일주일에 두 번, '할머니 장터조합' 조리실과 판매대가 있는 로컬푸드 매장으로 출근한다. 가면 먼저 '내가 만든 반찬이 나갔나?'를 본다. 일찌감치 진열되면, 기분이 좋다. 그리고 요리도 막 연구하게 되더라고. 돼지감자, 그야말로 유기농이잖아요? 근데 팔리는 속도가 느려. 그러다 보니 시들시들 시들어. 이걸로 김치를 담그면 어떨까? 깍두기로! 껍질을 까지 않고 잘 다듬어서, 식초와 소금에 절였다가 액젓, 파, 마늘 넣고 버무리니 괜찮다. 효소 담갔다가 효소는 먹고 남는 걸로 장아찌를 하니, 여전히 아삭거리고 괜찮아.
허리가 꼬부라지고 손이 굳었는데도 일할 수 있다는 거, 참 좋다. 머리도 쓰면서 계산도 하고 하니까, 치매는 안 걸릴 거 같아. 여럿이 함께 일하니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있지만 우울증 안 걸려서 좋다. 건강이 이전보다 한결 좋다.
'할머니 귀농 강사단'을 그리며
할머니마다 주어진 시간은 딱 15분. 사실 처음에는 조금 걱정했다. 이야기가 옆길로 샌다거나 시간을 많이 끌면 어쩌나 하고. 근데 세 분 다 15분을 지켜주셨고, 내용도 푸짐했다. 이 할머니들은 다 사회 활동을 하기에 세상이 자신들에게 바라는 게 뭔지를 그냥 몸으로 아는 듯했다.
나는 이야기를 듣다가 할머니들 팬이 됐다. 세 분 할머니 전화번호를 얻어왔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 카카오톡을 여니, 총무님도 카톡을 하시는 게 아닌가. 반가움에 카톡에 인사를 남겼더니, 하루쯤 고민하다 답을 했다. 문자를 보내는 손은 서툴고, 띄어쓰기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지만, 한 자 한 자 정성으로 보내온 카톡. 나 자신이 숙연해진다.
젊은이들이 귀농을 선택할 때 부딪치는 벽 가운데 하나가 나이 드신 부모님들의 반대. 하지만 권정렬 할머니는 이제 귀농 전도사가 되었다. 반대를 많이 했기에 할머니 말씀은 그만큼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할머니 장터조합'을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고 싶다. 홍동 지역에서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홍순명(80세) 선생님 생각은 어떠실까?
"지역에서 젊은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고령자, 장애인 그리고 어린이들 표정이 밝아야 인간이 존중받는 삶이 가능하다. '할머니 장터조합'이 바로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대신에 단계적으로 가야 한다. 안 해보던 걸 하는 거니까. 처음 시작한 장터가 재미있었고, 이제 로컬푸드 매장으로 들어가 경험을 쌓고 있다. 차츰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겠나? 풀무 전공부와 결합도 고민하고 있다. 언젠가 할머니들이 지역에서 요리 교사가 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나도 기대한다. '할머니 장터조합'이 잘 발전하길. 가능하다면 이번 강의를 잘 살려, '할머니 귀농 강사단'을 꾸려볼 수도 있으리라. 그리하여 언젠가는 할아버지들도 발 벗고 나와, 할머니들과 어울려 음식도 만들고, 판매도 하고, 수다도 떨 그날을! 내가 바라는 내 노년의 한 모습으로.
귀농통문은 1996년부터 발행되어 2014년 9월 현재 71호까지 발행된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계간지입니다. 귀농과 생태적 삶을 위한 시대적 고민이 담긴 글, 귀농을 준비하고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귀농일기, 농사∙적정기술∙집짓기 등 농촌생활을 위해 익혀야 할 기술 등 귀농본부의 가치와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긴 따뜻한 글모음입니다. (☞바로가기 : 전국귀농운동본부)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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