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놀란 총리 "차라리 분단이 낫다", 어쩌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07> 조봉암과 진보당, 열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 번째 이야기 주제는 조봉암과 진보당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이야기 마당 4253] 5.16쿠데타

[이야기 마당 5462] 제3공화국


프레시안 : 4월혁명을 계기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과거사 진상 규명 운동, 교원 노조를 중심으로 한 노동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음을 지난번에 살폈다. 이와 더불어 이 시기를 살필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통일 운동이다.

서중석 : 4월혁명기를 특징짓는 제일 큰 것은 이승만·자유당 정권을 징치하는 특별 입법, 그러니까 부정 선거라든가 학생 등을 죽게 한 발포 사건에 대한 것까지 포함하는 특별 입법과 함께 역시 통일 운동이었다. 통일 운동은 당시 사람들의 관심을 참 많이 모았다. 분단 국가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 비해 단일 민족성이 강한, 그래서 하나의 국가로 장기간 유지해온 나라에서는 그야말로 통일에 대한 관심, 통일이 돼야 한다는 희구 같은 것이 굉장히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6월항쟁 다음 해인 1988년부터 통일 운동이 아주 강렬하게 일어나듯이, 자유만 주어지면 한국에서는 통일 운동이 일어나게 돼 있었다.

그렇지만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정권이 붕괴한 직후에 바로 일어난 건 아니고,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일어났다. 맨 처음에는 일본의 김삼규, 미국에 있던 김용중 같은 사람들이 주장한 중립화 통일론에 대한 글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이 미국 상원 의원 마이크 맨스필드였다. 존 F. 케네디 정권이 출범할 때 중요 직책을 맡게 되는 인물인데, 이 사람이 '한국은 오스트리아식 중립화 통일을 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이 불을 질렀다. 그러면서 그해 9월 이후 대학가에서 통일 운동과 관련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진다.

4월혁명 후 불어온 통일 운동 바람

프레시안 : 이 시기에 대학생들은 어떤 주장을 폈나.

서중석 : 9월 이후 학생 시국 토론회 같은 것이 고려대, 서울대 법대 등 몇 군데에서 관심을 모으면서 진행된다. 특히 서울대 민족통일연맹, 이게 유명한 민통련인데 이 민통련 발기 모임(11월 1일)에서 주장한 통일 방안은 장면 정권이나 당시 사회에 아주 큰 충격을 던져줬다. 이들은 대정부 및 사회 건의문에서 '기성세대는 분단의 책임을 통감하라. 통일에 대한 젊은 세대의 정당한 발언을 묵살하거나 억압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장면 정부는 적극 외교로 전환해 미국과 소련을 특별 방문하고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들하고 회담하라'고까지 요구했다.

소련 지도자를 만나라고 한 것, 이건 극우 반공 세력이 볼 때는 기절초풍할 만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다음 날인 11월 2일 장면 총리는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만 있을 뿐이다', 이렇게 선을 그었고 현석호 내무부 장관은 국가보안법을 고치는 문제를 강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식으로 나왔다. 미국에서도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이날 열린 야간 국회에서는 '대한민국 헌법 절차에 의해서 유엔 감시하에 인구 비례에 따라 자유 선거를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건 북진 통일론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처럼 상당히 옛날로 되돌아가는 것 같은 결의안까지 통과시키고 그랬다.

프레시안 :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가진 건 대학생들만이 아니었다. 기존 혁신 세력은 이 문제에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1960년 말에서 1961년 초에 혁신계가 재편된다. 이 과정에서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이걸 민자통이라고 부르는데 민자통 결성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전개되고 기성 혁신계를 중심으로 한 통일 운동이 전개된다. 민자통 결성 움직임은 1960년 12월경부터 전개되는데, 1961년 1월에 가면 통일 선언서를 발표하고 2월에는 민주, 자주, 평화를 모토로 한 민자통을 발족하게 된다. 여기에는 주요 혁신 정당, 사회 단체가 가담했다.

민자통의 경우 자주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는 것이 반공 세력이나 중도 우파 세력한테는 논란이 될 수 있었다. 아울러 민자통에 가입하는 사회당이 남북 협상에 의한 자주적 통일을 주장했는데, 이건 반공 세력한테 크게 신경 쓰이는 주장이었다. 그렇게 되자 유명 인사들이 집결해 있던 통일사회당 쪽에서는 '그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큰일 난다. 쿠데타 같은 것도 일어날 수 있다'고 하면서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민자통과 대립되는 중통련이라고도 불리는데 '김일성 정권은 외세 추종 세력이다. 그러니까 김일성 정권의 퇴진을 조건으로 중립화 통일을 해야 한다', 이렇게 주장했다. 어떤 면에서는 극우 반공 세력이 긴장하는 것에 대해 '우리 통일사회당은 좀 다르다', 이런 면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민족 자주를 고민하던 학생들을 분노케 한 한미경제협정

프레시안 : 분단 해소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하면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미국 문제다. 이 시기엔 어떠했나.

서중석 : 1961년으로 넘어가면 반미 자주화 운동이라는 것이 일어나게 된다. 광주항쟁 이후 1980년대 운동이 민주화 운동과 반미 자주화 운동, 이 양대 운동으로 전개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나. 그것의 선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4월혁명 후 이 시기에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학생들은 이 시기에 신생활 운동 같은 것을 벌이고 국민 계몽대 같은 것도 만들었다. 여기서 초점은 '양담배, 외래 밀수품을 배격하자', 이것이었다.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하겠지만 커피도 마시지 말자고 했다. (경제 자립을 위해 사치를 배격해야 한다는 신생활 운동을 펼친 학생들은 "커피 한 잔에 피 한 잔", "오늘의 커피는 내일의 독배"라며 커피 과소비가 문제라는 주장을 폈다. '편집자') 이에 더해 '기름도 아껴 쓰자. 기름 한 방울 한 방울이 다 수입하는 것 아니냐', 이런 주장도 했다. 그랬던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에 있었다.

사실 이 신생활 운동은 아주 소박한 운동이었다. 그런데 이런 것을 학생들이 급진적 민족 자주 운동과 연결한 것이다. 거기에서 크게 문제가 됐던 것 중 하나가 미군 PX를 통한 미제 물품의 범람이었다. 그 당시로는 엄청난 돈인 7000만∼8000만 달러 내지 1억 달러 정도가 미군 PX 연간 매상고였는데 그 가운데 60∼70퍼센트가 제대로 된 수입 절차나 과세 없이 국내 시장에 유출되면서 문제가 됐다. 미군을 비롯한 미국인이 이용하게 돼 있던 외국인 전용 백화점이라고 볼 수 있는 시설인데도 그런 식으로 대량 유출된 점도 지적받았지만, 그걸 특권층이 주로 사용했다는 게 또 논란이 됐다. 학생들은 국내 시장에 이런 것들이 많이 유출되는 것도 문제이고 양담배, 커피, 양주 같은 것들이 나도는 것도 문제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그와 동시에 이 시기에는 한국의 주권이 제약되는 측면이 적잖게 있지 않았나. 횡포를 부린 미군을 한국의 법률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로 많이 등장했지만 그것 이외에도 일종의 조계지 비슷한 것도 문제가 됐다. 당시 미군 주둔지 외에도 조계지 비슷한 것들이 있었다. 예컨대 인천항의 제1도크와 부산항의 제3부두는 휴전 협정을 체결한 지 만 8년이 돼가는데도 여전히 미군 전용 또는 한미 공동 사용 항구로 돼 있었는데, 임대료는 고사하고 한국 정부의 행정권, 사법권이 미치지 못하는 특수 지대였다. 사실 인천항은 이 시기까지 한국인한테는 폐항(閉港)이나 다름없었고 주로 미군이 관리했다. 그리고 여의도공항, 김포공항, 부산공항 같은 것들도 관할권이 한국 정부에 인계됐다고는 하지만 한국 정부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김포공항의 경우 실질적으로 미국 공군이 항공기 이착륙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아울러 미군 부대에서 일하던 한국인 노동자가 한국 노동법을 적용받지 못한다는 것도 지적받고 그랬다. (오늘날 여의도는 의회 정치와 금융 산업의 중심지이지만, 1960년대까지는 그와 거리가 멀었다. 일제가 비행장을 건설한 1910년대 이래 많은 사람은 여의도 하면 비행기 또는 공항을 떠올렸다. 1970년대 들어 비행장 역할을 마감하고 국회 의사당, 증권 거래소 등이 이전하면서 여의도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61년 2월 8일 한미경제협정 체결을 계기로 미국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온다. 당시 진보 세력은 이 협정의 어떤 부분을 문제 삼은 것인가.

서중석 : 자주성 문제에 불을 확 질러버린 게 바로 한미경제협정이었다. 이 한미경제협정에 대해서는 보수 세력하고 진보 세력이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보수 세력은 이게 1950년대에 있었던 것하고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진보 세력, 특히 학생들은 이건 주권 국가 간 협정이라기보다 미국 측의 일방적인 통고라며 반발했다. 이들은 이 협정으로 한국 경제에 대한 미국의 감독권이 강화됐고, 미국의 원조 사업에 고용된 사람들에 대한 특혜 조치가 확대됐으며, 한국 정부의 편무적 의무 조항이 많다는 것 등 여러 가지를 지적했다. (미국 경제 고문이 요청하면 예산, 재정 등 한국 경제 상황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고, 원조 사업과 관련된 미국인 회사원과 기술자 등에게 외교관적 지위를 부여하며, 원조 사업과 관련해 도입되는 물자에 대해서는 한국의 세법을 비롯한 법률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이 협정의 주요 내용이었다. '편집자')

그러면서 이미 체결된 한미경제협정을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통일사회당까지 포함된 기성세대 혁신계에서는 미국 문제에 상당히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에, 이 협정을 비판하더라도 아주 조심스럽게 했다. 이와 달리 학생들은 강렬하게 이 운동에 나섰다. 이 협정이 구시대의 침략적 제 조약이나 을사조약보다 더 가혹한 편무적 불평등 조약이며, 경제적 예속과 내정 간섭을 강요하고 무제한한 치외법권과 조차지 인정으로 통치권을 유린한다고 하면서 미국을 비난했다. 2.8협정이 예속적이고 식민지적인 불평등 협정이라고 학생들은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학생들은 2.8협정 반대 투쟁에서 민족 해방론적인 주장을 전개하면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제국주의를 반대한다고 강렬하게 천명했다.


잦아들던 시위를 되살리고 혁신계를 강화한 2대 악법 반대 투쟁


프레시안 : 미국이라는 존재를 지금보다 훨씬 더 성역에 가까운 것으로 여기던 시기다. 그러한 시기에 터져 나온 미국 비판 목소리는 어느 정도 호응을 얻었나.

서중석 : 이러한 반대 투쟁에서 일부 학생들이 반미 자주 노선 같은 것을 강렬하게 폈지만, 그건 소수에 그쳤다. 호응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그런데 혁신 세력이 힘을 키우는 데는 2대 악법으로 불린 두 법을 장면 정권이 만들려 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

학생들과 진보 세력이 통일 운동, 2.8협정 반대 투쟁 등을 통해 새로운 주장을 하니까 장면 정부는 반공임시특별법을 만들어야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 시안을 3월 10일 발표하는데, 이게 5.16쿠데타 이후 악명 높은 반공법으로 정착되는 것이다. 이에 더해 데모 규제법으로 불린 법도 만들겠다고 나왔다. 사실 데모는 1960년 7∼8월까지는 좀 많았지만 그 뒤에는 크게 약화됐다. 1961년에 들어오면 데모가 거의 없어지고 2.8협정 반대 데모 정도가 있었는데, 그것도 별로 호응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3월 초순에 정부에서 데모 규제법과 반공임시특별법을 만들겠다고 하자 이것에 대한 반대 데모 때문에 데모가 다시 살아나고 그러면서 혁신계가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난다.

2대 악법 반대 투쟁은 3월 18일 대구에서 시작되는데, 3월 21일에는 시위가 더 큰 규모로 일어난다. (3월 18일에는 약 1만 명, 21일에는 약 1만5000명이 참가했다. '편집자') 3월 22일에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반공법과 데모 규제법을 반대하는 성토대회가 열렸다. 여기에 모인 시민 숫자는 대구에 비해 적었다. 서울과 경기도는 원래 혁신계가 약한 데 아니었나. 그렇지만 서울에서 열렸던 것이고, 2대 악법 반대 성토대회 집회가 끝난 후 횃불을 든 청년들이 시가행진을 한 것 등 때문에 사회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3.22 시위 이후 2대 악법 반대 규탄 데모가 대구를 중심으로 크게 일어나고 부산, 마산, 전주 등으로 퍼져 나가서 4월 초까지 꽤 큰 시위가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속에서 혁신계가 상당한 힘을 얻었다고 이야기한다.

프레시안 : 2대 악법 반대 투쟁을 거치며 혁신계가 힘을 얻은 1961년 4월은 4월혁명이 일어난 지 1년이 되던 때였다. 4월혁명 1주년은 혁신계뿐만 아니라 당시 여러 세력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갔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4월이 되면 통일 문제가 새로 대두하는데 '4.19 1주년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학생들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이것이 사회의 관심사였다. 그런데 학생들은 이때 굉장히 신중을 기했다.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자들이 학생들을 부추기는 속에서, 학생들은 '이거 위기가 오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했고 여러 상황을 볼 때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4.19 1주년에 서울대 문리대 같은 데서도 침묵시위 정도만 했고 전국이 그야말로 조용했다.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자들이 이날을 계기로 뭔가 해보려고 했지만,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4.19 1주년을 맞아 서울대 학생들은 '4.19 제2선언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서울대 학생회에서 발표했는데, 여기서 학생들은 이승만적 반민족 체제가 모습만 달리해서 지금 지속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1960년 3∼4월 항쟁을 계속 발전시키기 위해 반봉건·반외압 세력, 반매판 자본이라는 3반 운동을 일으켜 민족 혁명을 이룩해야 한다고 선언했는데, 이게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여기서 반외압 세력이라고 한 건 반제국주의를 그렇게 표현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4.19 1주년을 맞으면서 통일 운동이 관심을 끌게 됐는데 그건 뜻밖에도 유엔의 한국 문제 결의안과 관련돼 있었다.


▲ 4월혁명 1주년 분위기를 보도한 <동아일보> 1961년 4월 20일 자 3면. '경건한 경축으로 뒤덮인 혁명 첫돌'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동아일보> 사이트 갈무리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프레시안 : 당시 유엔은 어떤 결의를 했나.

서중석 : 유엔 주재 미국 대사 애들레이 스티븐슨, 이 사람이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3세계의 도전에 직면해 1961년 4월에 고육책으로 들고나온 것이 '북한이 유엔의 자격과 권한을 인정하면 북한 대표를 유엔에 참석토록 초청하자'는 폭탄적 제의를 했다. 조건부 남북 동시 초청안을 제기한 것인데, 이건 두 개의 한국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미국은 대한민국이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 유엔에서 한국 문제를 토의하는데 이와 같은 안을 제기했고, 4월 12일 그게 통과됐다. 물론 반대편에서 내놓은 것은 통과되지 않았다. 이 일은 한국 사회와 장면 정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혁신계에도 영향을 줬다. 심지어 야당인 신민당, 그리고 민주당 구파가 모인 이쪽에서 일부 세력은 이런 제안을 상당히 중시하고 적극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도 하고 그랬다.

(인도네시아가 유엔에 남북한을 동시에 초청하자는 안을 제기하자,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그에 대응해 조건부 남북 동시 초청안을 제시했다.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제안이었지만, 미국의 이런 태도는 한국 정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스티븐슨안이 통과된 직후 '유엔 결의를 전폭 지지한다'고 밝혔던 장면 총리는 며칠 후 "용공적인 통일이라면 차라리 남북한의 분단 상태를 이대로 두는 편이 낫다"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한편 미국 측 예상대로 북한은 조건부 동시 초청안을 거부했다. '편집자')

그런 속에서 5월을 맞이하는데, 5월 3일 서울대 민통련에서 사회에 아주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결의를 한다. 서울대 민통련은 남북한 학생들이 힘을 모으자, 남북 문화 교류를 하자고 주장하면서 구체적으로는 남북한 학생 회담을 열고 학생 기자 교류, 학술 토론회, 모든 예술·학문·창작의 교류, 학생 친선 체육 대회 같은 것을 단시일 내에 실행하자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런 주장이 과거 학생 운동에서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때는 그 분위기가 달랐다고 볼 수 있다. 5월 3일 서울대 민통련에서 결의하자 5월 5일에는 19개 대학이 참여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 준비 대회에서 이를 지지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 대회 참가자들은 '5.3 학생 회담 제의를 적극 지지한다. 학생 회담 장소는 판문점으로 하자. 북한 학생과 당국도 적극 호응하라. 우리 정부는 학생 회담에 임하는 이들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 이렇게 나왔다. 이날 발표된 공동 선언문에서는 광대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인민들의 민족 해방 투쟁을 지원하는 입장을 펴면서 민족 해방론적인 논지를 주장했다.

프레시안 : 이 시기를 상징하는 구호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은 당시 국제 사회의 변화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서중석 : 1960년을 전후해 스티븐슨 안(案) 같은 고육책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한데, 1960년 한 해에만 아프리카의 16개 나라가 새로 유엔에 가입했다. 그래서 유엔에 가입했던 99개 나라 가운데 아시아, 아프리카에 속한 나라가 46개나 됐다. 소련권도 10개 나라나 됐다. 특히 쿠바에서는 이미 1959년 1월 피델 카스트로 세력이 수도인 아바나에 입성했고, 알제리 민족 해방 투쟁도 굉장히 큰 규모로 전개됐고 콩고, 라오스 같은 데서 전개된 반제 투쟁도 학생들한테 강한 영향을 끼쳤다. (오랫동안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던 아프리카 곳곳에서 1950년대 들어 민족 해방 운동이 전개됐다. 그러면서 하나둘씩 독립국이 탄생했는데, 특히 1960년에는 무려 17개 국가가 독립했다. 이 때문에 1960년은 '아프리카의 해'로 불린다. '편집자')

그렇지만 5월 3일 민통련의 주장이 나오자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사회에서 적잖게 나왔다. 그러자 학생들 사이에서 '우리가 너무 나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이를 수습하려는 모습도 나타났다. 그런 속에서 민자통이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서 남북 학생 회담을 환영하며 민족 통일을 이룩하자는 큰 규모의 궐기 대회를 주최한다. 통일사회당을 제외한 주요 혁신 정당 그리고 학생 운동 세력이 많이 참여했는데, 여기 모인 인원은 자료마다 크게 차이가 나지만 약 3만 명이 모였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서울에서 있었던 집회로는 보기 드물게 큰 집회였다. 이 집회를 마치고 종로 일대에서 중앙청 앞까지 시위도 벌였다. 그러고 나서 3일 후에 쿠데타가 일어나게 된다.


▲ 4월혁명 후 분단을 해소하기 위한 통일 운동이 일어났다. 사진은 한 장병이 휴전선에서 가장 넓고 높은 고지인 육군 백두산부대 최전방 초소에서 북녘을 응시하는 모습(2009년 6월 23일). ⓒ연합뉴스

이승만은 쫓겨나고 통일 운동은 일어나고…위기감 느낀 극우 반공 세력

프레시안 : 4월혁명기 통일 운동을 '분단 해소를 위한 적극적 노력'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지만 '지나치게 성급했던 것 아닌가. 극우 반공 세력의 경계심을 키워 쿠데타를 부른 것 아니냐'고 보는 시각도 있다.

서중석 : 통일 운동, 2대 악법 반대 투쟁이 혁신 세력과 진보적 청년 학생 세력을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을 지금까지 살펴봤는데, 그건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극우 반공 세력이 크게 동요하고 경계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5.16쿠데타 세력의 경우 통일 운동 등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즉 장면 정부 출범 직후부터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통일 운동이 일어난 건 거기에 구실을 더 주는 정도였다고 할 수 있지만, 일반 극우 반공 세력의 경우 이미 1960년 11월 이후부터 상당히 동요하는 걸 볼 수 있다. <사상계> 주도 세력도 그런 동요를 보였다.

이 시기에 극우 반공 세력이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극우 반공 세력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는 이승만·자유당 권력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혁명 입법 같은 것을 통해 3.15 부정 선거 원흉들을 처단하고 발포한 자들도 처단하고 그와 동시에 반민주주의 세력, 이승만·자유당 세력을 제재하는 활동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그런 활동이 언론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면서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나. 그것도 극우 반공 세력을 전반적으로 크게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바로 극우 반공 세력이 그러한 처벌 대상에 해당하는 사람들 아니었나. 특히 경찰 쪽은 장면 정부가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그중에서도 정보 업무를 맡은 사찰계 쪽을 더 많이 숙청했다. 분위기가 이러했기 때문에 극우 반공 세력은 자기들이 공격받고 약화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들의 주도층은 다수가 친일파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세력들은 한말, 일제 시기에도 도덕적·정신적으로 굉장히 취약했다. 해방 후에도 그런 면에서 대단히 취약했기 때문에 단정 운동 세력의 중심이 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지 않나. 이승만 정권 시기에는 극우 반공 체제에 의해 이들의 기득권, 사회적인 주도권 등이 유지됐다. 물론 이건 미국이 절대적인 지원과 지지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그러한 극우 반공 체제가 4월혁명으로 크게 약화된 것에 더해 자기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던 통일 운동이 일어나고 일부에서는 남북 협상론까지 이야기하니까 이 세력들이 상당한 위기감을 느낄 수는 있었다. 이런 것과 통일 운동을 어떻게 연관시켜서 평가할 것인가 하는 점을 여러 측면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 이 시기 혁신계는 대체로 장면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이야기를 했다'고 보는 쪽과 '그렇잖아도 약체 정부인데 너무 몰아세운 것 아니냐'고 여기는 쪽으로 의견이 갈릴 법한 사안이다.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하다.

서중석 : 진보 세력들, 혁신계 정당과 단체 등은 장면 정부를 아주 비판적으로 봤고 야당인 신민당과 함께 장면 정부를 계속 공격하면서 '장면 정권 물러가라'는 주장까지도 부분적으로 했다. 이 부분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다각도로 해봐야 한다.

우선 장면 민주당 정부가 무너지면 상황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선거에 의해 정권이 바뀌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다. 그렇지만 쿠데타 같은 것으로 무너지면 어떻게 되겠나. 그 경우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와 같은 기본적 자유가 제약받게 될 뿐만 아니라 혁신계가 어떻게 되겠느냐, 진보 세력이 얼마나 큰 타격을 입겠는가 하는 것을 통일사회당을 비롯한 일부에서는 분명 굉장히 염려했다. 그리고 장면 정부는 오랜만에 (극심한 부정 선거가 아닌) 자유 총선을 거쳐 탄생한 민주주의 정부였다는 점에서 이 정부가 일정하게 지탱할 수는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점을 너무 적게 생각한 것 아니냐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할 것 같다.

한국전쟁 이후 반공 체제는 체질화·내면화되면서 굳건한 힘을 갖게 됐다. 이것에 대해서는 장기적 전망을 세워 인내심을 갖고 여러 가지를 신중하게 고려하면서 정책을 제시하고 운동을 펼쳤어야 하는데, 실제로 그러했나 하는 부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통일 운동에서도 강한 주장만을 하기보다는, 강한 주장과 신중한 주장을 어떤 식으로 융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많이 생각하면서 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고려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충분히 했느냐 하는 점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1960년 가을에서 1961년 5월까지의 상황을 보면 학생을 포함한 진보 세력이 통일사회당을 중심으로 온건 노선을 걷는 쪽과 그보다 급진적이던 사회당, 민족민주청년동맹(민민청), 그리고 사회당과 연결돼 있던 청년 단체인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으로 재편돼가는 과정이었다. 통일사회당 쪽은 당시 유명한 사람이 많아 영향력이 제일 컸고 사회당 등은 급진적 학생들과 연결돼 있었다. 5.16쿠데타가 없었더라면, 혁신 세력 또는 진보 세력도 크게 이 두 가지로 나뉘어 보수 세력들과 경합하는 속에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통일 문제, 경제 자립화 문제 등을 논의하고 구체화하는 활동을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5.16쿠데타에 의해 침묵하게 되고 좌절된다. 5.16쿠데타 세력은 진보 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특히 통일사회당 사람들이 아주 심하게 당했다. 명망가들이어서 형량도 제일 많이 받았고 되게 당한다.

진보 세력, 운동과 정치를 구별하고 정치적 판단을 중시해야

ⓒ오월의봄
프레시안 :
분단 문제를 풀기 위한 진보 세력의 움직임을 미국은 어떻게 봤나.

서중석 : 미국은 장면 정부 출범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부터 '한국이 어떻게 가는 것인가' 하는 것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예의 주시했다. 혁신계, 진보 세력의 통일 운동에 대해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전략적 사고의 일환으로서만 한국을 중시했을 뿐, 민주주의라든가 통일 같은 것은 별로 안중에 두지 않았다.

4월혁명 직후, 그러니까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이 물러났을 때 미국은 어떻게 보면 엉겁결에 문민 체제를 승인해서 허정 과도 정부, 장면 정권이 출범하는 것까지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미국은 한국을, 소련과 중국을 막아내는 극동의 최첨단 보루로 생각했고 일본을 지키는 데 필수적인 지역으로만 판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혁신계, 진보 세력의 움직임에 대해 '이건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프레시안 : '조봉암과 진보당' 이야기 마당을 닫을 때가 됐다.

서중석 :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26년이 지나 6월항쟁이 일어나는데, 6월항쟁 후 민중당을 비롯한 여러 진보적 정당 운동이 나타난다. 선거법이 바뀌어 정당 명부제가 도입된 2004년에는 민주노동당이 국회에서 10석을 확보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런 진보적 운동은 민중적 기초 위에서 전개돼야 하는데, 1980년대 운동권 분위기에서 자란 진보 세력이 운동과 정치 현실, 이 양자를 충분히 분리하지 못하는 면도 보였다. 그러면서 2014년에는 진보 정당의 중요한 한 부분이 헌법재판소의 참으로 문제가 심각한 판단에 의해 불법화되는 일도 일어났다.

한국 전체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진보 세력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경제를 당연히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진보 세력이 약화되는 건 결국 국민 전체의 힘의 약화, 민주주의와 민주적 경제의 약화 등을 동시에 수반한다.

그러니까 진보 정당은 자기 세력의 강화 자체에만 중점을 둬서는 안 된다. 전체적인 시야에서, 우리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한국 민주주의 그리고 국민적 힘과 연결돼 있다는 면을 중시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운동과 정치를 명확하게 구별하면서 정치적인 판단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그런 부분과 관련해 진보 세력은 조봉암과 진보당의 활동, 4월혁명 직후 있었던 진보적 청년 학생들의 활동 등을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