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그때 광주에는 선동열이 있었다

[베이스볼 Lab.] 영화 <스카우트>로 보는 5.18과 선동열

김현석 감독의 영화 <스카우트>는 5.18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영화는 기존 5.18 소재 영화의 엄숙주의 대신 코미디와 드라마를 결합해 관객이 웃다 울다 마침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영화에는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지 못한 후회와 미안함, 순애보와 희생이 모두 담겨 있다. 그리고 영화 속에 묘사되는 모든 감정이 절실한 진짜로 느껴지게 하는 힘이 있다. 좋은 영화다.


영화 <스카우트>는 ‘5.18 당시 국보급 투수 선동열도 광주에 있었다’는 데서 착안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5.18이 전면으로 부각되는 후반부가 되면 고교생 선동열은 영화에서 사라져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짧은 에필로그를 통해, 그로부터 수십 년 뒤 국가대표팀의 코치가 된 선동열을 TV 화면을 통해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정작 ‘그때’ 선동열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영화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CJ엔터테인먼트
실제로는 어떨까. 사실 1980년 5월 18일 당시 선동열이 속한 광주일고 야구부 선수단은 부산에 있었다. 당시 부산에서는 광주-부산 친선야구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에서 광주일고는 강호 경남고와 경남상고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광주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자 광주로 바로 들어오지 못하고, 여수를 통해 우회해서 들어와야 했다. 당시 광주일고 소속이던 한 야구인은 “원래는 교복으로 갈아입고 이동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당시에는 교복 차림이면 수상하게 보일까 싶어 일부러 유니폼을 입고 학교로 돌아왔다”고 회고했다.


광주 전역이 삼엄한 분위기였지만, 청룡기 전국대회를 앞둔 시점이라 훈련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광주 출신 한 야구인은 “당시 시내에서는 연습이 불가능했다. 광주일고도 연습할 수 없는 상황이라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고 했다. 이에 광주일고 야구부원들은 당시에는 광주와 별도의 행정구역이던 외곽의 송정리 동 초등학교에 모여 훈련을 했다. 집이 여수, 목포 등 다른 도시에 있는 선수들 10여명은 선동열의 부친 선판규씨가 운영하는 여관에서 숙박했다. 여기에는 당시 영남대 야구부 소속이던 방수원 전 KIA 타이거즈 코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건은 5.18 발생 며칠 뒤에 터졌다. 선수들 몇 명이 골목을 지나는데 계엄군을 태운 트럭이 모퉁이를 돌아갔다. 이걸 본 근처에 있던 젊은 남자가 주먹을 날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데 그냥 지나갈 줄 알았던 군인들이 차를 세우더니 달려오기 시작했다. 방수원 전 코치는 “선수들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야구 유니폼을 입고 있어서 눈에 띈 모양이다. ‘저놈들 잡아라’며 선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욕을 한 사람은 벌써 도망간 상황. 놀라고 겁을 먹은 선수들도 숙소인 여관으로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잠시 후, 대검이 꽂힌 M16을 든 군인들이 여관으로 들이닥쳤다. 여관에는 도망쳐 온 선수들을 포함해 선동열과 선동열의 부친, 조창수 당시 광주일고 감독, 방수원 등 7~8명이 있었다. 당시 함께 있던 야구인은 “무슨 일인지 영문도 모르는데 갑자기 군인들이 나타났으니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았다”고 털어놨다. 군인들은 총검을 방수원의 배에 들이대고는 “죽어볼래?”하고 윽박질렀다. 선동열과 다른 선수들에게도 총검을 들이밀며 “도망간 놈들 어디 있느냐?”고 소리쳤다. 일촉즉발의 상황. 방수원 전 코치는 “배 앞에 대검이 있으니까 ‘이렇게 죽는 건가’ 싶더라. 혼이 나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 알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때 선동열의 아버지 선판규씨가 군인들 앞에 나섰다. “선동열 아버지가 아들뻘인 군인들에게 무릎을 꿇고 통사정을 했다. 얘들은 야구하는 애들이라 아무것도 모른다, 절대 그랬을 리가 없다며 호소하셨다.” 방 전 코치의 기억이다. 다행히 그 자리에는 광주일고 에이스 선동열의 이름을 아는 장교가 있었다. 당시 고 3인 선동열은 이미 전국구 에이스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장교는 “됐다, 그냥 넘어가자”는 말로 군인들을 진정시킨 뒤 철수했다.


계엄군이 물러간 뒤, 선수들은 한참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있었다. 선동열의 모친이 딸기를 씻어 내왔지만 도저히 목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방수원 전 코치는 “딸기가 입에 들어가는지 마는지도 몰랐다. 사람이 죽는 걸 직접 못 봤으면 모르겠는데, 실제로 시내에서 군인에게 사람이 죽는 걸 봤기 때문에 더 겁에 질렸던 것 같다.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남은 선동열은 이후 고려대학교를 거쳐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프로야구에 데뷔했다. 국보급 투수로 오랫동안 활약하며 통산 367경기 146승 132세이브 평균자책 1.20이라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기록을 남겼다. 죽음이 바로 배 앞까지 다가왔던 방수원도 이후 해태에 입단했고, KBO리그 최초의 노히트노런 대기록을 수립했다. 이들은 가슴 아픈 역사 속에서도 살아남아 꿈을 이뤘고, 야구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새겼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그러지 못했다. 영화 <스카우트> 속 임창정이 연기한 호창처럼, 수많은 사람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목숨을 잃고 희생을 치렀다. 고교생 선동열처럼, 대학생 방수원처럼, 그들 모두가 가졌던 무한한 가능성은 국가가 자행한 폭력 속에 소멸했다. 이것이 일부 비뚤어진 세력이 아무리 역사를 왜곡하고 폄훼해도 바뀌지 않는 ‘진실’이다. 한번 세워진 야구 기록이 사라지지 않듯, 역사적인 진실도 바뀌지 않는다.


<스카우트>는 여주인공 세영(엄지원)이 수십 년 뒤 TV 중계방송 화면으로 코치가 된 선동열의 모습을 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어느덧 중년이 된 선동열의 모습을 보며, 세영은 자신을 구하고 사라진 뒤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호창(임창정)을 떠올린다. 5.18 그때 광주에는 선동열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광주에는,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호창들이 있었다. 그들의 희생 위에서 지금 우리는 살아가고, 일상을 누리며, 매일 저녁마다 야구도 보고 있다. 우리가 5.18 민주화 운동을 언제나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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