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암고 아이들은 '모래시계' 검사를 어떻게 볼까?

[기자의 눈] 빛 바랜 홍준표 정치 밑천

역술원에 '개명' 상담을 하러 가면, 흔히 듣는 이야기가 있다.

비쩍 마른 소년이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수돗물로 배를 채우던 그는 원래 의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의대 학비가 너무 비쌌다. 결국 문과로 방향을 돌렸다. 명문대 법대에 무난히 붙었다. 신입생이던 어느 날, 강의실 창밖에 비가 내렸다. 영문학을 가르치는 여교수가 툭 던졌다. "이런 날은 카페에서 커피나 마시면 좋을 텐데."

그가 정색을 했다. "교수님, 혹시 비 오는 날 굶어보신 적 있습니까?"

그가 늘 삐딱했던 건 아니다. 유독 신문을 열심히 봤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야당 정치인 이야기를 구수하게 풀어놓는 재주가 있었다. 아는 게 많아서 하숙방 친구들과 퀴즈 시합을 즐겼다. 일주일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지만, 짬짬이 하숙집 마루에서 기타를 치는 여유도 있었다.

사법시험에는 연거푸 떨어졌다. '남들처럼 종일 공부만 할 수 있다면 나도 붙었을 텐데.' 어느 겨울밤, 그는 울산 앞바다를 찾았다. 거기엔 현대중공업에서 일당 800원 받고 경비원으로 일하던 아버지가 있었다. '세상은 왜 이리 불공평한가.'

이를 악물고 다시 공부한 그는 결국 합격한다. 그렇게 힘들게 검사가 됐는데, 이를 어쩌나. 관운이 나빴다. 한직으로 돌았다. 어느 날, 선배가 이름을 바꾸라고 권했다. '판' 자가 들어가는 이름이 검사에겐 좋지 않다는 게다. 홍판표는, 그래서 홍준표가 됐다. '개명'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어쨌든, 그 뒤론 출세가도를 달렸다.

홍준표 경상남도 지사는 고려대 72학번이다. 이 또래라면, 사회 주류 엘리트 중에도 가난했던 기억 한 토막을 유리조각처럼 품고 살았던 이들이 많다. 그런데 유독 홍 지사의 가난 이야기는 유명하다.

가난하면서, 반항적인 수재. 세상에 대한 분노. 그리고 출세. 매력적인 스토리가 갖춰야 할 요소를 꽉 채웠기 때문일 게다. 드라마 작가와 역술인이 모두 좋아할만 하다. 실제로 인기 드라마가 됐다. <모래시계>다.

'가난 이야기'로 스타가 된 탓인지, 홍 지사는 정치 입문 뒤에도 서민 이미지를 유지했다.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가 서울 동대문구였던 탓도 있을 게다. 하지만 그의 서민 정치 행보는 별 성과가 없었다. 지난 2006년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도전할 당시가 정점이다. 당시 그는 '반값 아파트' 정책을 내걸었다. '포퓰리즘'이라는 비판만 들었다. 진보 쪽에서 점수를 딴 것도 아니다. 결국 한나라당의 서울시장 후보는 오세훈이 됐다. 오세훈의 매끈한 외모가 홍준표의 서민 정책을 꺾었다는 말이 나왔다.

이름을 바꾼 덕에 출세했다는 역술인들의 해석을, 홍 지사가 믿는지는 모르겠다. 대신, 정책 노선을 바꾸면 정치 운이 잘 풀리리라는 믿음은 갖고 있는 듯싶다. 9년 전 자신을 꺾었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노선을 따라한다. '반값 아파트'를 주장하던 그가, 무상급식 공격수가 됐다. 경상남도가 교육청에 제공하던 무상급식 예산은 결국 끊겼다.

홍 지사의 변신이 그의 정치 운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더 두고볼 일이다. 다만 분명한 건, 그의 정치 밑천이었던 '가난 이야기'는 이제 확실히 빛이 바랬다는 점이다. 얼마 전, 서울 충암고에서 교감이 급식비를 못 낸 아이들에게 공개적으로 폭언을 했다. "내일부터 오지마" "밥 먹지마" "꺼져라" 등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이 홍 지사의 '가난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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